소설리스트

89화 (89/99)

* * *

“페델리우스가 늦네.”

평소라면 벌써 들어오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직도 오질 않았다. 저택의 모두가 함께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메리와 실비아도 있었고 페드로와 루덴이 준비한 케이크도 있었다. 메리랑 실비아랑 셋이서 거실을 반짠반짝하게 꾸미기도 했는데.

‘덕분에 혼나진 않았지만.’

옷이 더럽힌 것에 메리는 경악했지만, 별말 없이 옷을 갈아입혀줬다.

그리곤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서 종이를 엮어 주렁주렁 매달기도 했는데.

“주인님이 일이 바쁘신가 보오. 조금 더 기다리면 금방 오실 거네, 주인마님.”

실비아가 말했다.

“실비아. 있잖아. 주인마님이라는 건 페델리우스랑 결혼한 사람한테 쓰는 말 아니야?”

“맞소.”

“근데 왜 나한테 주인마님이라고 해?”

내 말에 실비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미간을 좁힌 그녀가 메리와 페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좌하며 앉아 있던 실비아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입을 열었다.

“주인마님께선 주인과 결혼할 예정이 아니오?”

“……누가 그래?”

“그야 주인과 주인마님 두 분께선 서로 좋아하지 않소.”

실비아의 말에 절로 입이 꾹 닫혔다. 아콰도 그렇고 실비아도 그렇고 정말 잘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모르는 감정을…….’

“게다가 두 분은 붉은 실로 엮여 있으시지. 나는 주인님과 주인마님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무척 보고 싶다네.”

실비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메리도, 페드로도 반박은 하지 않는다.

루덴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각하가 고백 안 했어요? 시리 님.”

“……했는데…….”

내 말에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후루룩 몰려왔다. 특히 루덴이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바짝 붙여왔다.

도와달라고 페드로를 쳐다봤지만, 페드로 역시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뭐야, 여기에 내 편이 없어.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어떻게 고백했어요? 각하께서! 고백은 받아주셨죠?”

루덴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탁자에 앉아 루덴을 흘겨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이야.”

“엑, 그런 게 어딨습니까! 시리 님, 치사하십니다!”

“고백을 받아주면 그 다음엔 어떻게 돼?”

“연애하겠죠?”

“연애? 그게 뭐야? 바로 아기 안 만들고?”

내 말에 루덴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바싹 얼굴을 가져다 댔던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호오, 주인마님은 상당히 적극적이군. 이거 생각보다 빨리 도련님이나 아가씨를 볼 수 있겠는걸.”

턱을 매만지던 실비아가 혼잣말했다.

메리가 이마를 짚더니 고개를 저었다.

루덴이나 실비아나 뭔가 이상하다니까.

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메리가 다가와 나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연애라는 건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 가까워지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네. 그러다 서로가 없으면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거고요. 물론 아이를 낳는 건 필수가 아니에요.”

메리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보다 더 가까워지면, 좋은 건가?

“물론 그사이엔 조금 더 접촉이 깊어지기도 해서……. 음.”

메리가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줄여버린 말 뒤의 이야기가 뭔지 모르지 않았다. 메리의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 것 같아.”

“그래요?”

“응. 그럼 페델리우스랑 연애하자고 해야지.”

그러다 보면 분명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내 말에 같이 있던 네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주인님께서 오신 모양입니다.”

페드로의 말에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문은 열리지도 않았다.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문이 열렸다.

놀란 눈으로 페드로를 쳐다보니 그는 잔잔하게 웃으며 나를 한 번 보더니 페델리우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페드로도 정말 신기한 사람이란 말이야.’

눈동자를 스르륵 굴리다가 곧장 페델리우스에게 걸음을 옮겼다.

“페델리우스!”

“오시리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고개를 저으며 냉큼 페델리우스의 목에 매달렸다. 페델리우스가 휘청이지도 않고 나를 받아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에 금슬이 더 좋아졌소. 주인과 주인마님은.”

실비아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뭐 하다가 늦었어?”

“아, 기사단에서 일이 좀 있었습니다. 도무지 놔주질 않아서 조금 늦었군요. 뭘 하고 계셨습니까? 식사는 하셨나요?”

궁금한 것도 많다. 고개를 저으며 거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뭔가 이렇게 보니 조금 허술한 것도 같지만 나름대로 꾸며놓은 생일 파티였다.

“생일 축하해. 페델리우스.”

“아…….”

“생일은 네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거라고 들었어. 네가 태어나서, 너와 만나게 돼서, 무척이나 기뻤어. 고마워.”

내가 웃자 페델리우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무너질 듯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페델리우스가 그대로 나를 확 끌어안았다.

“아……. 페델리우스?”

“알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페델리우스가 나를 꽉 껴안은 채 중얼거렸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가웠다. 손을 들어 등을 토닥여주니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크흠.”

“주인. 애정행각도 좋지만, 우리도 주인을 축하하려고 모여 있었다만.”

루덴이 헛기침을 내뱉고 실비아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고서야 페델리우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천천히 놓았다.

떨어져 나가는 페델리우스의 온기에 슬쩍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래, 고맙다.”

아무도,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페델리우스가 단칼에 인사를 먼저 건넸다. 메리가 슬쩍 다가와 나를 옆으로 빼냈다.

“메리?”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 좋을 거예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속삭이는 메리의 목소리가 드물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에서 날아온 케이크가 퍽, 둔탁한 소리를 내며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꽂혔다.

주륵, 툭. 새하얀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까 케이크를 두 개 만들더니 하나는 저런 용도였던 모양이다. 어쩐지 대충 만들더라.

“아…….”

“생일 축하드려요! 각하!”

주범은 루덴이었다. 페드로가 옅게 웃으며 몸을 떨고 있었다. 늘 차분한 그가 꽤나 즐거워 보였다.

“생일 축하하네, 주인.”

찌이익- 붉은색 딸기 소스를 새하얗게 물든 페델리우스의 얼굴에 무심하게 뿌리며 실비아가 말했다.

와, 쟤들은 목숨이 몇 개나 있는 걸까? 역시 오랜 시간 페델리우스를 곁에서 돌봐온 사람들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하하하하!”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절로 터져나갔다. 유쾌하고 유쾌했다. 고상하고 조용한 파티를 예상했는데,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예상 밖이다.

새하얀 생크림에 붉은 소스로 엉망이 된 페델리우스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게, 하하하! 그게 뭐야! 페델리우스 엄청 이상해. 아하하하!”

손가락으로 페델리우스를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표정을 하던 페델리우스도 결국은 제 꼴을 보고는 어깨를 떨었다.

“하하하하!”

나와 페델리우스를 시작으로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 웃음보가 순식간에 저택을 가득 메웠다.

중간에 나타난 아콰도 페델리우스의 꼴을 보더니 결국은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당길 정도로 웃어젖히고 난 후에야 웃음은 서서히 멎었다.

“으, 배 아파.”

“저도 아파요.”

메리가 불만을 툴툴 토했다. 그러면서도 제법 표정이 밝았다.

페델리우스가 씻고 내려와서야 뒤늦은 식사가 시작됐다.

‘나만 페델리우스한테 선물 못 줬네.’

식사를 다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며 눈동자를 굴렸다.

메리도, 페드로도, 루덴이랑 실비아도 전부 선물을 전해줬는데 나만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오늘은 같이 잘 수 있는 겁니까?”

“응? 아, 그럼! 같이 자야지!”

그래야 선물을 전해줄 시간이 더 생기지.

뒷말은 꿀꺽 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콰는 오늘도 메리의 뒤를 졸졸졸 쫓아 사라졌다.

“저기, 페델리우스.”

“예.”

방 안으로 들어간 페델리우스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페델리우스가 옅게 웃음을 띤 채 대답했다.

“이거, 내가 주는 생일 선물.”

남들처럼 예쁘게 포장도 하지 못했고 직접 만들어서 파는 것보다 조악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최선을 다한 선물이었다.

쭉 뻗은 내 손을 바라보다가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두 손을 펼쳐 보였다.

톡, 가벼운 팔찌가 페델리우스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뿜어지던 푸른 빛은 이미 없어진 후여서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 훨씬 투박하게 보였다.

“물의 힘을 응축해서 만든 팔찌야. 지니고 있으면 분명히, 위험할 때 널 지켜줄 거야.”

“직접, 만드셨습니까?”

“응. 돌아다녀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게 없어서. 네가 뭘 사용하면 좋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직접 만들었어. 페델리우스 너는 위험한 일에 종종 휘말리니까.”

그러니까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분명히 팔찌가 지켜줄 거다. 기력을 쥐어짤 듯이 열심히 응축해 만들어낸 팔찌니까.

“그러니까 언제 어디에 있든지 무사해야 해.”

“……감사합니다. 절대 빼놓지 않고 다니겠습니다.”

“응. 오래오래 살아줘. 나랑, 계속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어.”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딘가에서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팔찌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응. 착하다.”

페델리우스가 팔찌를 손목에 걸었다.

늘어나는 재질로 된 팔찌여서 그런지 다행히 페델리우스에게 딱 맞았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좋아. 그리고 하나 더.”

“예?”

눈을 동그랗게 뜬 페델리우스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 그대로였다.

“나랑 연애할래? 페델리우스.”

“……예?!”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던 페델리우스가 펄떡 몸을 튕겼다.

되묻는 표정이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서로 연애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우리 연애하자, 페델리우스.”

“오시, 잠, 오시리아……. 도대체 그런 말은 누구한테.”

“나는 네가 없으면 불안하고 슬프고 널 찾아다니고 싶어져.”

내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페델리우스가 눈을 한층 크게 떴다.

군청색 눈동자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프루니아랑 같이 있으면 짜증이 났어. 네가 거리를 두는 것도 싫어. 줄곧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오시리아.”

“너라면 뭐든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날 어린애로 보지 말아줘. 난, 네가 지켜주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서 있을 수 있어.”

내 말에 페델리우스의 눈동자가 한층 더 크기를 키웠다.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페델리우스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네 손에 닿은 곳은 화끈거리고 네 품에 있으면 안심돼. 나는, 사랑이라는 걸 잘 모르겠지만…… 이 감정이 메리와 아콰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건 알겠어.”

“…….”

“그러니까 이걸 이유로 너와 연애를 할 수 없을까?”

내 말을 들은 페델리우스가 뻣뻣하게 굳은 채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이번엔 내가 팔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손을 깍지 꼈다.

“나랑 연애하자, 페델리우스.”

“그런 말은, 제가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수를 치시면 제가 할 말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기쁜 듯, 곤란한 듯, 복잡한 미소를 입가에 띤 페델리우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싫어?”

“절대, 싫지 않습니다. 제가 무릎 꿇고 부탁드려도 모자랄 판입니다.”

“…….”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투박하게 내뱉은 목소리에 움찔, 몸이 떨렸다. 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평소보다 훨씬 더 뜨거워진다.

이런 감각은 늘 페델리우스에 한해서만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을, 어린애 취급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지켜줘도, 지켜줘도 한없이 부족해서. 오시리아는 저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페델리우스는 뭘 해도 혼자서 할 것 같아서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지켜주고 싶어도 한사코 사양하고 상담조차 하지 않는 페델리우스가 서운했다.

그러나 그도 그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당신이 싫다는 건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게 많이 서툽니다. 그러니까 불편한 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응. 너도 그러기야.”

“예.”

웃는 페델리우스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페델리우스의 미소는 언제나 나를 웃게 한다.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페델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오시리아, 제 연인이 되어주십시오.”

한쪽 무릎을 꿇은 페델리우스가 손등에 입술을 맞추며 말했다.

귀로 파고든 목소리에 심장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황급히 손을 들어 가슴께를 매만졌다. 심장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응.”

나도 몸을 낮춰 페델리우스와 시선을 맞췄다.

의아해 보이는 페델리우스를 보다 페델리우스의 다른 쪽 손을 붙잡았다.

“페델리우스, 내 연인이 되어줘.”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기꺼이.”

대답한 페델리우스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닿아왔다.

“으응…….”

페델리우스가 조금은 집요하게 입 안을 탐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생경한 감각에 절로 몸이 바르작거리며 떨렸다. 내가 몸을 떨자 페델리우스가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려 주면서도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가 입천장을 살짝 긁는다. 간지러우면서도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단단하면서도 말캉거리는 페델리우스의 혀가 입 안 여기저기를 고집스럽게 헤집었다.

단단하게 허리를 붙잡은 페델리우스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온몸이 간질거렸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미묘한 감각에 몸이 자연스럽게 움찔거렸다.

치열을 훑고 입 안을 느릿하게 훑으며 페델리우스가 입천장을 긁어내렸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등줄기가 찌릿찌릿하고 아랫배가 묵직해진다.

그가 내 도망 다니는 혀를 붙잡아 힘껏 빨아 당겼다. 타액이 섞여 네 것이 내 것이 되며 내게 넘어왔다. 꼴깍 그것을 삼키자 페델리우스가 하체를 바싹 붙이며 한층 더 격렬하게 혀를 움직인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껏 빨다가도 내가 미간을 좁히면 냉큼 입 안을 살살 달래듯 핥아왔다.

점점 달뜨는 몸에 절로 허리를 튕기고 싶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페델, 리……. 읏…….”

잠시 트인 숨통 사이로 페델리우스가 다시 입을 맞춰왔다. 채 완성되지 못한 이름이 끙끙거리는 신음 사이로 사라졌다.

숨통을 틔워주질 않는다. 빨리는 혀에 헉헉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그나마도 입술로 전부 틀어막았다. 숨이 막혀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힘껏 치켜든 손으로 페델리우스의 등을 한 번 내리쳤다.

페델리우스가 그제야 눈동자를 굴려 나를 내려다봤다. 안 봐도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건 짐작이 됐다.

할짝, 아랫입술을 핥은 페델리우스가 아쉽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발갛게 상기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시선을 힐끗 돌리자 페델리우스의 얼굴도 빨갰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 우리 사이에 떠도는 순간이었다.

“……파렴치한 놈.”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페델리우스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페델리우스가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이그니!”

“……주군,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이그니가 황급히 나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그니가 어디서 났는지 손수건 하나를 꺼내 내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얼마나 세게 문지르는지 따끔거릴 지경이다.

“잠……. 읍웁.”

이그니가 한참을 더 닦고 나서야 손수건을 품에 다시 집어넣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대체 얘들 뭐 하는 거야.

‘페델리우스는 괜찮은 건가?’

벽을 반쯤 부수고 널브러진 페델리우스의 몸뚱어리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

물론 페델리우스도, 이그니도 서로 힘 조절은 해가며 싸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움찔, 페델리우스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

‘……아니, 정말 조절했을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페델리우스가 이그니 멱살 잡고 들어 올렸을 때도 이그니 표정이 퍽 심각해 보였지.

화끈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어느새 살얼음판보다 더 차갑게 바뀌었다.

“이게 지금,”

으득, 이를 갈며 페델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비척거리는 몸 상태가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듯했다.

“무슨 짓이지?”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나를 향한 살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침이 꿀꺽 삼켜질 정도였다.

왕왕!

갑작스러운 짐승 울음소리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페델리우스도 미간을 좁힌 채 소리의 근원을 찾고 있었다.

굴러가는 눈동자를 보다가 이그니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듯 이그니가 나를 쳐다봐왔다.

“……이그니?”

“네. 다치신 덴 없으십니까?”

그거 아까도 물어봤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았던가. 어색한 표정으로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난 괜찮은데…….”

네 머리 물고 있는 그 개는 괜찮은 거야?

아니, 일단 네가 괜찮니? 이그니.

눈동자가 절로 굴러갔다. 이그니의 머리카락을 물고 뜯고 씹고 즐기고 있는 작은 강아지가 발톱을 세운 채 이그니의 머리 위에 버티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그니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듯싶었지만.

저러다 검붉은 머리카락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져 탈모가 오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깨달은 듯 이그니가 머리에 얹힌 강아지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발버둥 치던 강아지가 순식간에 몸에 힘을 쫙 빼며 편안하게 늘어졌다.

“이번 물건입니다.”

“……물건이라기보단, 강아진데?”

“네. 이것의 이름이 강아지입니다.”

“아니, 그건 얘 종족 이름이 아닐까?”

그게 뭐가 문젯거리가 되냐는 듯한 이그니의 눈빛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이름도 없이 물건으로 취급당하는 강아지에게 안타까움을 느껴야 하는 건가.

‘하물며 내 이름도 인간은 아니었는데…….’

한층 더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새하얀 강아지인 듯했지만 꾀죄죄한 모습이 오랜 시간 관리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

짧은 한숨을 내뱉은 페델리우스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그니가 강아지를 내 품에 안겨줬다.

“내가 오늘은 시장에 가서 사료…… 사 오라고 하지 않았어?”

분명히 아침에 그렇게 말했고, 뒤를 쫓아갈 때만 해도 이그니는 웬 여자에게 사료를 주문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사히 사 올 거라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린 거였는데.

물론 이그니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네, 사 왔습니다.”

이그니가 창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그니의 손가락을 따라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목을 쭉 뺐다.

화단 아래에 사료로 보이는 뭔가가 세 포대나 쌓여 있었다.

“…….”

이그니가 자못 당당하고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페델리우스와 비슷한 모습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 이그니의 머리카락을 두드렸다.

“잘, 했어. 잘했는데……. 그러니까…….”

사흘 전엔 달걀, 이틀 전엔 닭, 어제는 고양이, 오늘은 강아지와 기타 동물들의 사료…….

이쯤 되면 내일 뭘 가지고 올지 무섭기만 했다.

“이 개는 뭐지?”

“주군과 둘만의 약속이다.”

“……오시리아, 둘이서 뭔가 약속을 하셨습니까?”

“어, 으응. 그랬지.”

페델리우스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그니가 있는 앞에서 말하기는 조금 그랬다.

그래도 동물은 그만 데리고 와줬으면 좋겠는데.

“이건 어쩌다? 사 왔어?”

“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길을 가는데 혼자서 낑낑거리며 괴롭힘을 당하기에 구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이그니였지만, 일단 말하는 주체가 이그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그니가 그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물론! 이그니를 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때 이그니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물며, 인간도 아니고 짐승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더욱더 아니었고.

게다가 괴롭힘을 당하는 걸 구해올 사람도 아니었다.

“음……. 음.”

“어디 아픈가? 아프면 네 방에 가서 잠이나 자는 게 어때.”

“지극히 멀쩡하다. 파렴치한 변태 놈아.”

“……그 호칭 당장 고치지 않으면 죽여버린다.”

“네가 날 죽이는 것보다 내가 네 목을 베는 편이 더 빠르겠군.”

이그니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페델리우스의 말을 맞받아쳤다.

페델리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빠득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왕왕! 왕! 왕왕!

내게 안긴 채 강아지가 짖어댔다. 몽글몽글 폭신폭신한 털이 퍽 솜처럼 느껴졌다. 조금 뻣뻣하고 새까맣긴 했지만.

‘메리한테 씻기자고 해볼까?’

내가 씻겼다간 무슨 문제가 생길 수도…….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물의 힘을 다룰 수 있었지.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손에 푸른 기운을 모아 강아지의 털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새까만 먼지 덩어리 같던 강아지의 털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꾀죄죄했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귀, 귀여워.”

강아지가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느릿하게 눈을 굴려 이그니를 쳐다봤다.

“이그니, 이거 이그니가 키울 거야?”

“네. 잘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음. 그렇구나.”

누구에게 잘 키우겠다고 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누군지 말해주지 않아도 대충 감이 잡혔으니까.

‘이그니는 그 여자애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어쨌든, 조금 아쉬운 건 페델리우스의 온기가 이미 훅 떨어져 나갔다는 것 정도다.

“그럼 얼른 데려다 놓고 사료도 주고 산책도 시켜주고 놀아주고 그래야 해. 알았지?”

“네.”

“자, 얼른 하고 돌아가서 쉬어.”

“내일도 다녀와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그니가 순식간에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좀 평범하게 내려갈 순 없는 거야?’

한숨이 절로 새어나갔다. 근데, 이그니. 다 좋은데…….

“설마 내일도 동물을 데리고 오진 않겠지?”

이러다가 페델리우스의 뒤뜰이 동물농장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 울타리 너무 낮은걸.

어떤 동물이 더 올지는 몰라도 자라면 전부 울타리 뛰어넘어 도망갈 게 분명했다.

“이참에 아예 자기 집 만들어서 나가라고 쫓아내는 건 어떻습니까?”

페델리우스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물었다.

자연스럽게 닿아오는 온기가 꽤나 어색했다.

페델리우스는 늘 내게 뭐든지 허락받고 행동하곤 했으니까.

“이건…… 불편하십니까?”

내 몸이 굳은 걸 눈치챘는지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풀죽은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 놀란 거야.”

“정말입니까?”

“응. 페델리우스, 네 온기는 언제나 좋아. 그러니까 괜찮아.”

그가 내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페델리우스가 느릿하게 얼굴을 바싹 대어왔다.

“하던 거, 한 번 더 해도 되겠습니까?”

귓가에서 작게 속삭여오는 목소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페델리우스의 귓불도 붉어진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물어오는 모습이 신기했다.

페델리우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어깨를 떨었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페델리우스의 귓불이 한층 더 빨개졌다.

“좋아. 대신 이번엔 내가 먼저.”

페델리우스가 말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냉큼 그의 입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었다.

페델리우스가 한 건 대충 기억하는데 그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여러 의미로 힘들었다. 입술만 멍청히 부딪친 채 굳어버렸다.

이번엔 페델리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입술을 맞댄 채 속삭인 페델리우스의 진동이 입술 끝을 타고 전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톡톡 아랫입술을 건드리는 페델리우스가 느껴졌다.

천천히 입술을 벌리자 페델리우스의 혀가 침투해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주 느릿하게 치열을 훑으며 페델리우스가 입 안을 다시금 침범했다.

벅찬 숨을 애써 삼키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코앞에 보이는 페델리우스의 눈동자가 밤하늘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쿵,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속이 찌릿찌릿해.’

뱃속은 커다란 뱀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뭉근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몸이 잘게 떨렸다.

그거 알아? 페델리우스.

가끔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을 내게 처음 깨닫게 해준 건 바로 너야.

생각하며 힘껏 페델리우스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밤은 생각보다 길고 내가 모르는 감정은 아직도 수없이 많았다.

“라비엘! 오늘은 마중 나왔네. 몸은 어때?”

“괜찮아졌습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라비엘의 말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기분이 좋긴 했다. 말하기는 조금 그런 이유긴 했지만.

말없이 고개를 젓자 라비엘이 낮게 웃었다.

“오늘도 수업은 잊지 마십시오.”

“정말 싫다…….”

오자마자 공부라니.

공부는 이미 아콰에게 강의를 들으면서 얼마나 질리도록 했는지 모른다.

물론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해야지.

불퉁한 내 표정을 발견했는지 라비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를 한번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곧 오시리아도 나설 일이 있을 겁니다. 황성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이 자르딘 왕국이 곧 제국으로 승격하니 그것을 위한 축제가 열릴 예정이니까요.”

“내가 나서서 뭘 하면 되는 건데?”

“축복을 내려주시면 됩니다. 비를 내려주셔도 좋고, 당신의 힘으로 만든 용을 하늘에 띄워주셔도 좋아요.”

라비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물론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나한테 시킬 거면 내게 먼저 물어봐야 하지 않나?’

망할 왕! 그러고 보면 얼굴도 못 본 지 제법 된 것 같다.

부를 기미도 없고. 페델리우스랑 지내느라 신경도 못 쓰긴 했지만 말이다.

“라비엘, 신녀도 연애 같은 거 할 수 있어?”

“페델리우스 경이 연인이 되자고 고백했습니까?”

라비엘의 말에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굳이 따지면 페델리우스가 고백했다기보단 내가 했지.

아이를 낳는 건 싫지만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으니까.

“으음……. 아니, 내가 했어. 연인이 되자고.”

“오시리아가 했다고요?”

이번엔 라비엘이 놀란 눈을 했다. 내가 연인이 되자고 한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적극적이군요……. 아, 물론 연애도, 결혼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제재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럼 다행이다.”

어제 페델리우스랑 나눴던 입맞춤은 정말 놀라웠다.

이상한 감각들이 온몸을 스쳐 지나가서 정신이 멀리 튀어나갈 뻔했다.

“라비엘, 나 상담할 게 있어. 얘기를 좀 들어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라비엘에게 물었다. 상대방의 의견을 알고 싶으면 일단 물어보는 것이 먼저라고 했으니까.

‘페델리우스도, 메리도 항상 내게 먼저 물어봤었고.’

그런 규칙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나뿐이지 않을까 싶다. 내 말에 라비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그럼 지금 당장……!”

“그 전에 일단 수업을 받고 오시면 얘기를 들어드릴게요.”

라비엘이 웃는 얼굴로 내 말을 잘라냈다. 아직 끝까지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잘렸다.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너무하긴.’

어느새 알렉이 눈앞에 있었다. 라비엘이 여유롭게 티 테이블에 앉아 내게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오시리아.”

“……대체 여기서 위험할 게 뭐가 있어.”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알렉의 뒤를 쫓았다.

알렉이 재미있게 강의를 해주는데도 늘 이 시간이 싫다.

어쩐지 ‘수업’이라는 단어부터가 내키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건데 왜 싫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어서, 이마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은 역시나 지겹고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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