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99)

* * *

“아, 너무 지겨웠어.”

건물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오며 중얼거렸다.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았지만, 신전의 역사 따위는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할 일이 생겼다니.’

신녀로서의 첫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왕국이 제국으로 승격한다는 건 트럼프 제국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다.

라비엘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느릿하게 걸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사람들이 많을 테고,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니까.

‘또 욕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분명히 이그니와 페델리우스가 지켜주겠지만 말이다.

생각하며 조금 더 걸어가자 테이블 위에 찻잔 두 개를 올려놓고 이쪽을 보고 있는 라비엘이 보였다.

웃는 얼굴은 언제나 상냥해 보인다.

“수업은 잘 들으셨습니까?”

라비엘에게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그가 질문을 해왔다.

잘 듣기는 들었지.

들은 것과 재미가 없어서 돌아버릴 뻔했다는 건 확실히 다르지만 말이다.

그를 살짝 흘겨보곤 라비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나는 내가 왜 신전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신녀님이시니까 기본적인 건 알아두셔야죠. 오시리아. 차와 다과를 준비해놓고 기다렸어요.”

살포시 웃어 보이는 목소리에 화를 낼 수도 없게 됐다.

물론 화를 낼 이유도 없었지만…….

괘씸하긴 하잖는가.

열심히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보내는 건.

찻잔을 드는 라비엘을 보며 나도 찻잔을 잡았다.

매번 잡고 싶은 대로 잡았던 찻잔이지만 오늘따라 라비엘이 찻잔을 손에 쥐는 법이 눈에 들어왔다.

어설프게나마 그를 따라 찻잔 손잡이를 붙잡았다.

한 모금 마시자 향긋함이 입 안에 가득 맴돌았다.

“그래서 제게 상담하고 싶은 건 어떤 건가요?”

“아. 내 아는 사람 이야긴데, 이 사람이 저 사람한테 큰 잘못을 했어.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싫어하는데 이 사람이 저 사람 앞에 나타난 거야. 내가 듣기엔 이 사람이 저 사람한테 한 일은 아주 큰 잘못이거든. 근데 이 사람은 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데 원망하는 건 아니래. 문제는 지금부터야. 나는 저 사람이랑 친하고 이 사람은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근데 이 사람이 나보고 저 사람이랑 만날 수 있게 얘기를 해달라는 거야. 나는 솔직히 저 사람한테 이 사람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아. 하지만 이 사람이 나쁘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조금 고민이야. 이 사람이랑 저 사람을 만나게 하는 편이 좋을…….”

“잠, 잠시만요. 오시리아.”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라비엘이 이마를 짚으며 말을 막았다.

어지러워 보이기까지 한 라비엘의 모습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왜? 어디 아파?”

“아뇨. 아픈 건 아닙니다. 잠시만요.”

라비엘이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젓더니 이내 다시 나를 쳐다봐왔다.

조금 지쳐 보였다.

아니, 질려 보이는 건가?

“그, 오시리아. 다급한 건 알겠지만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어요.”

“아, 그러니까 이 사람…….”

“아뇨. 제발 뭔가 이름이라도 정해서 말해주면 안 될까요? 이 사람과 저 사람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머리가 복잡합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밖에 머릿속에 남은 게 없어요…….”

평소완 다르게 매우 지쳐 보이는 라비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그럼 뭐라고 하지?

머리가 절로 굴러다녔다.

아니, 정확히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닌 것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라비엘. 고양이랑 강아지가 있는데, 고양이가 강아지한테 큰 잘못을 했어. 내가 보기엔 고양이가 한 잘못이 아주 큰 잘못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고양이는 강아지와 다시 한번 대화를 해보고 싶어 해. 근데 강아지는 고양이가 여전히 싫대. 근데 원망은 하지 않는다는 것 같아.”

아까보다 조금 느리게 설명하니 라비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어줬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표정이 사뭇 어두웠다.

“근데 강아지가 싫어하는데 내가 고양이랑 강아지를 만나게 해줘도 될까?”

내 질문이 끝나자 고개를 숙인 채 고민하던 라비엘이 턱을 한 번 매만지곤 나를 쳐다봤다.

“오시리아, 그건 페델리우스 경과 콘니르 백작의 이야기인가요?”

물어오는 라비엘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이제 와서 아니라고 발뺌한다고 해서 넘어갈 수는 없는 듯했다.

‘어떻게 안 거지?’

의아한 눈으로 라비엘을 보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정말 틀리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너무 제대로 맞혔다.

“고양이에 비유한 게 콘니르 백작이고, 강아지에 비유한 게 페델리우스 경. 맞나요?”

“……어떻게 알았어? 대신관은 독심술도 하는 거야?”

아니면 신의 문양을 라비엘도 가지고 있는 건가?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라비엘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페델리우스 경과 콘니르 백작의 이야기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형제만큼이나 우애 깊던 두 사람이 한순간에 돌아서게 된 사건이었으니까요.”

바싹바싹 마르는 목을 축이듯 차를 한 모금 마신 라비엘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페델리우스 경은 아직, 오시리아에게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나요?”

“응. 페델리우스는 내가 강하다는 걸 안다고 말했으면서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 그러니까 고민하는 페델리우스를 보면 속이 답답해.”

그럼에도 혹시나 내켜 하지 않을까 봐 함부로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일단 입 밖으로 꺼내고 봤는데, 이번만큼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당신이 다칠까 봐 무서운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오시리아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하고요.”

“……겁쟁이네, 페델리우스는. 내가 그렇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는데.”

속이 쓰렸다. 내가 믿음직하지 않은 것인지 여전히 지켜줘야 할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쪽이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벌써 몇 년 전의 일입니다. 페델리우스 경의 저택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방화범은 붙잡혀서 이미 참수형을 당했지만……. 그 사고로 죽은 사람이 제법 됩니다.”

“죽은 사람?”

“네. 페델리우스 경의 부모님을 포함해 저택에서 일하던 시종 시녀들이 대부분 사망했습니다.페델리우스 경의 일가 중에서 살아남은 건 집사 하나와 페델리우스 경 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라비엘의 말에 눈이 크게 뜨였다.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선 들었지만 설마 시종들이 다 죽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럼 페델리우스의 지금 식솔들은…….’

그 이후에 페델리우스가 한 명씩 데리고 온 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용히 라비엘을 다시 쳐다봤다.

궁금하다면 그의 이야기를 더 들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내 시선에 라비엘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상황이 참 곤란했던 게, 페델리우스 경이 그날 크게 아팠습니다. 그날 낮에는 주치의가 와서 일주일 치 약을 챙겨줬을 정도라고 들었거든요.”

페델리우스가 아팠다고? 라비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순 없는 일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속이 상하고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있었다면, 도와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다락방에 갇혀 있었지만.’

분명 나도, 페델리우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에서야 화를 내줄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페델리우스 경과 콘니르 백작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습니다.”

라비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응. 그건 콘니르 본인한테도 들었어.”

“네. 콘니르 전 백작이 제법 이른 나이에 타계해서 현 콘니르 백작은 어린 나이에 가문을 짊어져야 했거든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친우들도 많이 잃었을 테고요. 그런 그를 변함없이 단단히 붙잡아준 유일한 사람이 페델리우스 경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사람의 인연은 조금 더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있는 게 분명했다.

그저 나처럼 손을 내밀어 친구가 되자고 하는 것이 사람을 사귀는 법의 전부는 아니었다.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라비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친해졌고 왕국의 누가 봐도 그만한 전우이자 친우는 없을 것 같았죠. 저도 사실 조금 부러워했습니다.”

라비엘이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심각했던 공기가 라비엘의 작은 목소리에 조금 풀어졌다.

“아,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일이 있던 그날도 아픈 페델리우스 경을 문병하러 콘니르 백작이 방문해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불이 났습니다. 목조 건물인 데다가 기름을 부었는지 번지는 속도는 빨랐고, 그리 많은 시종 시녀를 거느린 저택은 아니었기 때문에 불이 난 것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택을 뒤덮은 새빨간 화마가 어쩐지 눈앞에 선연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응, 그래서?”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페델리우스 경의 아버님께선 다리가 좋지 않았습니다.”

“……응.”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라비엘이 목을 한 번 더 축이고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도 계속 이야기하기가 제법 힘겨워 보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페델리우스 경도, 콘니르 백작도 그 건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으니까요.”

“…….”

“단지, 증언에 따르면 2층 창문에서 페델리우스 경을 끌어안은 콘니르 백작이 뛰어내렸다는 것 정도입니다.

페델리우스 경은 콘니르 백작의 멱살을 잡고 아주 크게 화를 냈다고 해요.”

라비엘이 빙긋 웃었다.

굳어있는 표정을 펴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뒤에 콘니르 백작과 페델리우스 경은 철천지원수처럼 거리가 멀어졌고 곧 자진해서 추방 명령을 요구한 콘니르 백작이 왕국을 떠난 거예요.”

“응……. 알려줘서 고마워.”

라비엘의 말이 끝났음에도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필사적이었던 콘니르가 이해가 돼서였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그건 페델리우스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콘니르가 아니라 나와 페델리우스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얼마나 참담했을까.

나는 콘니르처럼 용서를 구하기 위해 페델리우스 앞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콘니르가 페델리우스를 살린 거구나.”

“네. 아마도 콘니르 백작에게 소중했던 것과 페델리우스에게 소중했던 것이 달랐겠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만약 콘니르와 같은 처지였더라도 나는 페델리우스를 구했을 거다.

페델리우스의 부모님보단 페델리우스가 더 소중하니까.

“그 안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하필 그날…….”

“왜냐하면, 그날이 콘니르 백작이 페델리우스 경에게 방문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에요. 방화범이 노린 것은 콘니르 백작이었거든요.”

쿵, 심장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더는 감정선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됐다.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턱 막힌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백 번 천 번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해도 감히 그들을 위로할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내가 하는 괜찮다는 말이 도움이 될 리는 없다.

누군가 내게 괜찮다고 했던 말도 나는 곱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

왜냐하면, 난 괜찮지 않았으니까!

나는 괜찮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지 않았다.

아콰는 늘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럼에도 걱정할까 봐 나는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괜찮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은 내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저, 다시금 한없이 슬퍼질 뿐이었다.

“……잘 모르겠어, 라비엘. 난 어떻게 해야 해?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최선일까?”

“그걸 고민하는 건 오시리아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사실을 알려드리고 당신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까지인 듯해요.”

“상담해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건 오시리아가 혼자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문제예요. 정답이 있었다면 제가 도와드리려고 했겠지만…… 저는 이 일에 끼어들기에는 너무나도 제삼자니까요.”

라비엘이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라비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비엘이 저 정도로 단호하게 나온다면 어떤 말을 해도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머리가 복잡했다.

“나 혼자 있어도 될까?”

“물론이죠.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어차피 슬슬 일하러 들어갈 시간이기도 하니까요.”

“응.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비엘을 바라보곤 옅게 웃어줬다.

그래 봐야 웃는 것이 진짜 웃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라비엘에게 다시 한번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라비엘이 살짝 고개를 숙이곤 멀어져갔다.

‘내가 생각한 것만큼 단순하고 가벼운 일이 아니었어.’

타인의 관계에 함부로 머리를 들이미는 게 아니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그저 페델리우스의 고민이 있다면 해결해주고 싶었고…….

‘콘니르의 일이 궁금해서 그랬을 뿐인데.’

내가 너무 가벼웠다. 뒤늦게 드는 후회에 입술이 절로 다물어졌다.

머리가 아팠다. 간단하게 생각한 일들이 거센 해일만큼이나 커다랗게 변했다.

“이건 내가 참견해도 될 일인가?”

페델리우스도 분명히 페델리우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거다.

거기에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머리 아픈 고민에 숨이 막혔다.

도대체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무슨 일에 참견하려고? 신녀님.”

가벼운 목소리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콘니르를 쳐다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표정이 여전히…….

‘얄밉네.’

조금 전까지 들은 얘기와는 별개로 얄밉다. 콘니르가 내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뭐야?”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들어줄까 했지.”

“없어.”

있더라도 어떻게 당사자한테 이런 얘기를 물어.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상처라도 받으면 곤란하고.

“에이, 왜 그러세요. 이 착한 신도가 신녀님의 고민을 들어주겠다는데. 말씀해보세요.”

콘니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고민을 들어주기는 무슨!

어딜 봐도 딱 놀려먹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생글거리는 웃음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니.

“너한테 털어놓을 고민 없으니까 저리 가. 그리고 반말을 쓰든가 존댓말을 쓰든가 하나만 해.”

“음, 둘 다 좋으니까 제 장점으로 봐줘요. 아! 프루니아랑 친구가 됐다면서요. ‘눈치도 없고 생각도 없고 바보스러운 여자!’라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우와, 프루니아 그렇게 안 봤는데 뒤에서 욕하다니 너무하네.

어쩐지 요 며칠 보이질 않더라.

사실 어디에 사는지 모르니까 찾아와주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겠지만.

“페델리우스의 마음도 모르면서 페델리우스를 꽉 붙들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 같아요.”

“뭐야? 이런 얘기를 왜 해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신녀님이 정말 대화도 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콘니르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가 가만히 있자 콘니르의 표정이 한층 의아해졌다.

대체 내가 이놈의 안에서 어떤 이미지였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표정 변화였다.

“와, 이 찻잔 안에 뭔가 이상한 거라도 탔나?”

콘니르가 다 식은 찻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일전에 보였던 그린 듯한 미소를 또 지었다.

“정말 내 고민 듣고 싶어?”

“네, 듣고 싶은데요. 아니 사실 고민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고.”

“라비……. 아니, 대신관에게 네 얘기를 들었어.”

내 말에 콘니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아한 표정에는 여전히 만들어낸 듯한 장난기가 떠올라있었다.

“제가 얼마나 멋진 활약상을 펼치고 왔는지에 대해서인가요?”

“아니, 네가 페델리우스를 구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몇 년 전의 화재에서.”

내 말에 콘니르의 입가에 떠있던 웃음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물이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사라진 웃음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무슨 얘기를 얼마나 들었습니까?”

“페델리우스의 집에 불이 났다는 거, 네가 말한 대로 페델리우스의 부모님이 죽었다는 거, 네가 페델리우스를 구했다는 거…….”

“……그뿐입니까?”

“그리고 방화범이 널 노렸다는 것 정도.”

콘니르의 주먹이 꽉 쥐어진 채로 바들바들 떨렸다.

혹시나 검을 뽑지는 않을까 긴장한 채 그를 쳐다봤다.

다행히 내 우려와는 달리 콘니르는 내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적갈색 눈동자에서 그저 불타올라 사라질 것 같은 열기가 보였다.

“대부분 다 들으신 모양이군요.”

“응. 너와 페델리우스가 무척이나 친했던 친구 사이라는 것도 들었어.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내 말에 콘니르가 표정을 굳힌 채 나를 쳐다봤다.

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릴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기운이 사나웠다.

“그날, 집이 불에 타던 순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내 질문에 콘니르가 숨을 깊게 삼켰다.

직설적으로 물어온 질문에 제법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 말해줄 순 없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콘니르와 페델리우스뿐일 테니까.

그의 부모님이나 저택의 시종과 시녀들은 이미 세상에 없다.

남아있는 생존자는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가 나빠졌다면 분명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이 해결의 키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재차 질문해도 콘니르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대화할 의지라곤 조금도 없다는 듯이.

“당신이 알 바 아니야. 알아봐야 소용도 없을 테지만.”

“소용은 없겠지만, 널 이해할 순 있어. 네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서……. 그래서, 라비엘에게 얘기를 듣는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내 말에 콘니르가 나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찌푸려진 미간에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아니라 나와 페델리우스의 일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내게 페델리우스만큼 소중하고 그 목숨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는 없다.

그나마 그와 비견할 수 있는 이들은 메리와 아콰 정도다.

그 밖에 타인의 생명을 페델리우스만큼 귀하게 여기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얼굴도 모르고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도 없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건 어렵다.

그러나 만약 페델리우스의 가족과 소중한 연인이 된 페델리우스 둘 중의 한 명을 살려야 한다면 누구를 살리지?

나는 누구를 살리게 될까?

사실 생각해보면 결론은 당연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지금의 나는 당연하게도 페델리우스를 살릴 테니까.

“나도 페델리우스를 살렸을 거야. 네가 한 것처럼.”

“…….”

“페델리우스와 페델리우스의 부모님을 저울에 올려도 내게 소중한 건 페델리우스야. 페델리우스의 부모님과 그 저택의 시종 시녀를 전부 저울에 올려도 페델리우스에게 한참 기울어져 있어.”

당연하지만 살리는 것은 페델리우스였다.

내 말에 콘니르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 같은, 절대 즐거운 것은 아닌 묘한 웃음이었다.

“……왜 웃어?”

“그 선택으로 평생 페델리우스에게 원망을 받는다 해도 당신은 페델리우스를 살릴 거야?”

“…….”

정곡을 찔러오는 콘니르의 질문에 숨이 멎었다. 지독한 질문이었다. 실제로 닥치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내게 신의 힘도 없고 살려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런 일을, 콘니르와 같은 일을 겪고도 나는 정말로 여전히 페델리우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걸까?

내게 닥칠 일은 아니겠지만……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살리지 않으면, 평생 페델리우스를 볼 수가 없잖아.”

“살려서 평생 원망을 받거나 살리지 않아서 평생 후회를 하거나. 어느 쪽도 달가운 선택은 아니었어.”

콘니르의 목소리가 제법 아프게 느껴졌다.

억누르듯 이를 악문 목소리에 열었던 입술을 닫았다.

할 말이 없었다.

“응. 그래도 페델리우스를 살릴래. 나는 원망을 받더라도 그가 살아있길 바라. 원망받는 건 익숙하니까.”

내 말에 콘니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만으론 안 되는 것도 있다고 했다.

콘니르도 분명히 그랬을 거다.

“역시 나는 이기적이라서 나한테 좋을 법한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콘니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기대했으나 곧 다시 꾹 닫혔다. 애꿎은 찻잔만 매만졌다.

‘얘기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멱살을 붙잡고 흔들 수도 없지 않은가.

뚱하니 그를 쳐다봤다.

주머니에서 동전을 털어내는 것도 아니고, 말을 토해내라고 탈탈 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콘니르.”

“…….”

내 부름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페델리우스를 살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페델리우스를 만나서 행복해. 네가 구해준 페델리우스가 나를 지옥에서 꺼내줬어.”

내 말에 콘니르의 눈이 화등잔보다도 더 커졌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꽈악, 힘주어 쥔 콘니르의 주먹에 옅게 웃었다.

콘니르에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

페델리우스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으니까.

“……정말, 나는 제대로 한 게 맞을까? 신녀님.”

“나는 적어도 페델리우스에게 구원받았어.”

“살릴, 수가 없었어. 세 사람을 전부 살릴 수는 없었어……. 페델리우스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도망가라고 했지만…….”

억눌린 목소리로 콘니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 위로 고통스러움이 엿보였다.

“나는, 내 친우의 목숨이 더 소중했으니까.”

꽉 쥐었던 주먹을 천천히 풀며 콘니르가 말했다. 후회하듯, 고해성사하듯 흘러나오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뱃속이 아릿하고 울렁거려서, 심장조차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괜찮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괜찮다고 말해봐야 상대에게는 부담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제 가족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녀석이었어. 펠은…….”

콘니르의 입에서 나온 페델리우스의 애칭에 몸이 절로 움찔 떨렸다.

비단 프루니아만 부르는 애칭만은 아니었구나. 다행이다.

‘……다행? 뭐가?’

떠오른 생각에 의문이 순식간에 붙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주먹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콘니르가 다시금 입을 여는 것이 보였다.

“펠은 좋은 약재를 구할 수 있다고 하면 위험한 몬스터의 숲도 거친 절벽 끝도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녀석이었어. 신녀님도 알겠지만, 미련하게 성실해서.”

“페델리우스가 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콘니르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웃었다. 이런 식으로 말해주면 좋아하나?’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리곤 콘니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이렇게 맞장구를 쳐준 기억은 없었다.

언제나 내 의견을 말하고 상대가 내 의견을 들어주거나 내가 떼를 쓰는 정도가 대화의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 녀석과의 약속을 못 지켰어요. 불이 났을 때 급하게 페델리우스를 깨웠는데…… 정신을 못 차리던 녀석이 잠깐 눈을 떴거든요.”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콘니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메마른 손에 가득 박인 굳은살과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페델리우스가 자기는 알아서 나갈 테니 부모님을 데리고 나가달라고 했고 나는 알았다고 했어.”

“페델리우스답네. 정말…… 그거 보는 사람은 괴롭단 말이야.”

“맞아. 근데 그 녀석은 몰라요. 자기가 희생하면 다라고 생각하지. 남겨질 사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무정한 놈이지.”

콘니르가 찻잔에 조금 남은 차를 바닥에 쏟아 부으며 말했다.

땅에 순식간에 스며들어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다 다시 콘니르를 쳐다봤다.

그는 아주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말을 했다가, 멈췄다가, 고민하듯이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길 반복하면서 말이다.

“당연하지만 페델리우스는 혼자서 움직일 수도 없었고, 다시 기절해서 눈을 뜰 기미도 없었지……. 솔직히 그 정도로 아픈데 제정신인 게 웃긴 거고. 나는 고민했어요.”

정말, 최악의 상황이 분명했다.

지금 다시 고민해봐도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을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콘니르의 고민이 물씬 느껴졌다.

“불길은 코앞까지 번져왔고…… 이대로라면 다 타 죽을 것이 뻔했으니까. 나는 하나뿐인 친우를 잃고 싶지 않았어.”

감정에 따라 존댓말이 됐다가도 다시 반말이 되는 콘니르의 말투에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면 페델리우스를 배신하는 게 되는 걸까?

“그냥, 진부한 이야기죠. 이런 진부한 이야기. 친구를 살렸지만, 친구의 의지에는 반해서 미움을 받게 됐다는 뭐 그런…….”

말하던 콘니르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숙여진 고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페델리우스는 콘니르를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그런 무겁고 슬픈 기운이 아니었다.

원망이라는 감정과는 지독히 거리가 멀었다.

“아아, 너무 격하게 말하느라 예쁘게 존댓말 하는 것도 잊어버렸네. 머릿속에서 지워주세요, 신녀님.”

“페델리우스가 널 원망한다고 생각해?”

이제야 생각난 감각이지만, 확실했다. 페델리우스는 콘니르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조금 더 복잡한 것이었다.

물론, 콘니르를 보기 싫은 사람이라곤 표현했지만.

“잔인한 신녀님. 흑흑, 확인사살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네, 절 원망하고 있어요. 부모님 대신 자신을 살린 절 분명히 원망하고 있을 겁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입을 열려는데 콘니르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녀석이 왜 불쌍하거나 안되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가만히 못 두는지 아십니까? 제 딴에는 죄책감을 덜어보겠다고 속죄의 의미로 그러는 듯하더군요. 텅 빈 집 안에 누군가라도 있었으면 해서요.”

콘니르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상처받아서 몇 겹의 방어막을 두른, 예전의 나와 제법 비슷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아니라곤 못 하겠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그다지 무섭지 않게 됐으니까.

“시간을 마련해줄게.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변덕입니까?”

“그냥, 내 변덕. 그리고 페델리우스는 널 원망하고 있지 않아. 널 보기 싫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악의 같은 감정을 내뿜지 않았어.”

살기도, 악의도 아니었다. 원망의 감정도 아니었다. 그런 감정에 가장 예민한 것은 나였다. 그건 누구 앞에서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십 년간 한 나라의 원망을 받아온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

“…….”

“페델리우스는 콘니르, 너를 원망하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제대로 대화를 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콘니르가 눈에 힘을 준 채 나를 쳐다봤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놀란 것 같지도 않은 묘한 눈빛이었다.

‘아콰한테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드는 능력은 없냐고 물어봐야지.’

물로 공간을 만들면 분명히 둘만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나를 원망하지 않으면 이렇게 오랜 시간 나를 용서해주지 않을 리가 없어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페델리우스는 네 얘기를 할 때 어두운 감정을 내뿜진 않았어. 적어도 원망이나 증오 같은 종류는 아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십 년 동안 원망받고 살아온 나를 믿어.”

어깨를 쫙 편 채 당당하게 내뱉은 말에 콘니르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페델리우스를 꾀어내는 일이었다.

“슬슬 페델리우스 올 시간이야. 기회를 잘 만들어볼게. 준비하고 있어.”

“네……. 감사합니다.”

멍한 표정으로 대답한 콘니르를 뒤로한 채 냉큼 신전의 출입구로 몸을 돌렸다.

‘……라고 말은 했는데.’

사실 자신 없다.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는 걸 페델리우스가 좋아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절로 고개가 푹 숙어졌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역시 페델리우스의 아픔에는 공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페델리우스가 왜 화를 냈는지는 모르겠어.’

단순히 살리고 싶었던 이들이 죽어서일까? 그럼 페델리우스는 자신이 죽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페델리우스,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힐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가족 같은 친구였는데 순식간에 적으로 생각할 정도라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은 걸까?

“오시리아.”

눈앞에 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페델리우스다. 멍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페델리우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음……. 페델리우스 생각.”

내 대답에 페델리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다가 팔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손을 붙잡았다.

‘거기에 콘니르 생각도 같이 섞여 있었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분명히 서운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페델리우스를 가만히 보다 보니 요즘 얼굴을 보기 힘든 이그니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그니도 요즘은 밖에 나가 있는 일이 많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수고하셨습니다. 주군.”

마중하러 나오는 일은 절대 까먹지 않지만.

휙, 하늘에서 몸을 날린 이그니가 페델리우스와 내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하하…….’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니까.”

“파렴치한 변태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무심한 표정으로 내뱉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시선은 페델리우스에게 향해 있었다. 얘네 둘 사이 안 좋은 게 분명하다.

“오늘은 시장 안 가?”

“주군을 모셔다드리고 갈 예정입니다.”

“음……. 오늘은 뭐 사 올 거야?”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인지 뒤뜰이 동물농장이 될 것 같아서 묻는 건 절대 아니다. 응, 절대 아니지.

페델리우스가 사이로 끼어든 이그니를 노려보다가 내 반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그니가 그를 노려보면서도 움직이진 않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음, 그래. 시장에 다니는 건 어때?”

“신기합니다.”

단답형의 말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즐겁다’도 ‘재밌다’도 아닌 ‘신기합니다’는 어떤 대답이지. 뭐가 신기하다는 걸까?

“뭐가 신기해? 새로운 사람은 사귀었어?”

“…….”

내 물음에 이그니가 대답하지 않았다.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는 듯한 이그니의 행동에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내가 물으면 간이고 쓸개고 전부 내어주고 극비정보까지도 내어줄 것 같았던 이그니가 아니던가.

그의 행동이 의아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페델리우스도 신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그니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그니?”

“아.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각났습니다. 다녀와도 괜찮겠습니까?”

이그니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평소라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줬겠지만, 어쩐지 묘하게 괴롭히고 싶어진다.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다가 활짝 웃어 보였다.

“대답부터 하면 가도 좋아.”

“……주군.”

이그니가 나를 불렀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에 곤란함이 엿보였다. 맨날 무표정만 얼굴을 가장하던 이그니치고는 드물게도 감정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응. 그래서, 누군가 친구라도 사귀었어?”

일전에 이그니가 만났던 사람을 떠올리며 물었다. 이그니가 입을 꾹 다문다. 페델리우스가 턱을 매만지며 내 손을 붙잡아왔다.

“신경 쓰이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친구는 아닙니다.”

“친구는 아니야? 그럼 뭔데?”

“임시 호위기사입니다.”

임시…… 호위기사? 호위기사면 호위기사지 임시 호위기사는 뭐지? 근데 호위기사라는 게 겸업이 되는 거였어?

물론, 나는 더 이상 지켜줄 필요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그니가 원해서 직접 다른 사람을 모신다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임시 호위기사가 뭐야?”

“옆에서 일을 도와주는 보조입니다.”

임시 호위기사면 임시 호위기사지 도대체 옆에서 일을 도와주는 보조는 뭔데?!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 상황이었다.

내가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자 이그니가 묵묵히 내 시선을 마주쳐왔다. 정말 약간의 거리낌도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물론 그럴 수도 있지. 보조이면서 임시 호위기사라는 게 아직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진 않지만.

“지금은 좀 즐거워, 이그니?”

“즐거운 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당신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기계처럼 대답하는 이그니의 말에 입이 절로 닫혔다. 조금 상황이 달라진 줄 알았는데, 이그니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이그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정말 본인의 감정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로.

이그니가 나보다 누군가를 우선시하는 상황이 오면 좋겠다.

‘조금 서글프긴 하겠지만, 분명 무척 기쁠 테니까.’

붙잡은 페델리우스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페델리우스가 내 손을 단단히 마주 잡아 왔다.

“……아니야, 이그니. 그거 말고. 네가, 그 사람과 같이 있는 게 즐겁고 재밌어서 자꾸 가고 싶고 그래?”

내 설명에 이그니가 묵묵히 나를 내려다봤다. 가늘어진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여전히 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즐거운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한 자라 주기적으로 가고 싶다고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신기한데?”

“보고 있으면 신기합니다. 그리고 뭔가를 자꾸 해주고 싶습니다.”

어쩐지 문답 시간이 된 것 같지만 역시 궁금했다.

이그니가 정말 변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담담히 내뱉는 이그니의 대답에 고개가 옆으로 툭 기울어졌다.

“음……. 그렇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착해 보였고 분명 이그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건 어떤 거지?’

팔짱을 낀 채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흠. 느릿하게 걸어가다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니 페델리우스의 옆얼굴이 보였다.

페델리우스가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그니는 불쾌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봤지만.

“곧 네놈에게도 똑같이 복수할 기회가 올 것 같아 다행이군.”

“……뭐?”

“그는 먼저 보내고 돌아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옅게 웃으며 내 손등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이그니가 냉큼 한 걸음 내딛자 페델리우스가 내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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