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페델리우스의 기분이 매우, 음……. 아주 매우 좋아 보인다. 심각하게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둥글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가만히 페델리우스를 바라보다가 이그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난 괜찮아. 페델리우스랑 둘이 가도 되니까 볼일 있으면 가봐도 돼.”
“……모셔다드리고 가도 괜찮습니다.”
“아니야, 너무 늦은 시간에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면 좋지 않으니까 어서 다녀와. 늦기 전에 돌아와야 해.”
내 말에 이그니가 고개를 옆으로 툭 기울였다. 그의 검붉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그니가 입을 열었다.
“‘늦기 전’이라는 건 언제까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음, 내가 자기 전까지?”
“알겠습니다.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이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손을 흔들어주자 그가 조금은 다급하게 보따리를 꺼내들었다.
‘저건 어디서 난 거지.’
방금까지 분명히 빈손이었는데. 보따리 안에는 얼핏 옷 같은 것이 보였다.
검은색 살수 복장으로는 출입하지 않는 모양이다.
“드디어 평범한 옷을 입게 됐네.”
멀어져가는 이그니를 보며 중얼거렸다.
페델리우스가 퍽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방해꾼도 갔으니 저만 봐주십시오. 연인이 되었는데 누군가와 당신을 공유해야 한다니 서운합니다.”
“아, 그럼…… 둘이 밖에서 밥 먹고 가자.”
생각나는 거라곤 눈앞에 보이는 식당밖에 없었다. 대충 아무 식당이나 가리키며 페델리우스를 살폈다. 페델리우스가 퍽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응, 그리고 나…… 페델리우스한테 하고 싶은 얘기도 있어.”
지금 페델리우스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혹시나 표정이 어두웠으면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페델리우스의 표정이 의아함에 물들었다.
“어떤 얘기 말입니까?”
페델리우스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있잖아, 나…… 음, 콘니르를 만났어.”
옅게 미소를 지은 채 식당으로 걸어가던 페델리우스가 걸음을 뚝 멈췄다.
주위가 온통 흑백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페델리우스에게선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콘니르 백작을 만나셨다는 말씀입니까?”
“응. 일단 우리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하자.”
길거리 한복판에서 괜히 페델리우스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있으니 좀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서둘러 페델리우스를 식당으로 밀어 넣었다. 고개를 숙인 페델리우스가 말이 없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아, 두 명……입니다.”
눈동자를 한 번 굴리고 페델리우스가 평소에 쓰는 말투를 따라했다. 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한 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주문할 음식을 정하시면 불러주세요.”
“응, 아니, 네.”
모르는 사람에게는 존댓말. 존댓말이었다. 뒤늦게 고쳐 말하고는 페델리우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왜, 제게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숙인 채 질문을 던져댔다. 숨이 멎어버릴 정도로 낮디낮은 목소리였다.
생각보다 페델리우스의 감정은 훨씬 더 커다랗고 어두웠다. 움찔거리는 손을 붙잡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있잖아. 나 페델리우스 이야기를 듣고 싶어.”
“제 이야기?”
“네가, 내게 해주지 않은 이야기를…… 나는 알고 싶어. 페델리우스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알고 싶어. 내가 모르는 페델리우스가 있다는 건 너무, 슬프고 화가 난단 말이야.”
그제야 페델리우스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아니, 내게 너희들 이야기를 해준 건 라비엘이야.”
내가 고개를 젓자 페델리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콘니르는 얘기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라비엘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어디까지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건 전부.”
“……다 들으셨군요.”
페델리우스의 입술이 꽉 오므라들었다. 힘껏 힘을 준 그의 주먹을 가만히 보다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움찔, 페델리우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런데도 페델리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숨을 크게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함부로 캐묻고 다녀서 미안해. 페델리우스.”
사과해야 할 것은 사과해야 했다.
페델리우스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혹시나 상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일을 한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 일이 궁금하셨습니까?”
“응. 궁금했어. 네가 알고 싶었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페델리우스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거야…….”
그거야 다른 이들이 아는 것을 나 혼자 모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고 싶으니까.”
“……제게 물어보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난, 네가 상처받는 것도 싫었어. 네가 아파할 것 같아서…… 물어볼 수가 없었어. 무서웠어.”
타인의 아픔에 공감을 한 적은 없지만, 어쩐지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상처받아서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기분이, 나빴으면…… 그것도 미안해. 화내지 마.”
“화내지 않습니다. 조금 많이, 당황했을 뿐입니다.”
페델리우스가 묵묵하게 대답했다. 그가 찬물을 꿀꺽꿀꺽 들이마시고 한 잔을 더 따라 마신 뒤에야 힘겹게 입술을 떼어냈다.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콘니르 백작에게 잘못은 없습니다. 그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페델리우스는 콘니르를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건 알고 있다.
“그래도 페델리우스는 화가 났던 거지?”
내 물음에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워진 표정은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페델리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저는…… 가족이 살길 바랐습니다. 그분들이 살아주셨으면 했습니다. 저는 두 다리 멀쩡히 있으니까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두 분은…….”
푹 숙인 눈에 깊은 절망이 맺혔다. 아직도 그것은 페델리우스의 깊은 곳에서 그의 상처를 자극하고 있는 듯했다.
“있잖아, 페델리우스. 나는 사실 네 말에 공감할 수가 없어.”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널 살려준 콘니르가 잘했다고 생각해. 널 만나서 나는 구원받았어. 네가 없었다면, 분명히 나는 조금 더 깊은 밑바닥의 진흙탕 속에서 구르고 있었겠지.”
이기적이겠지만, 페델리우스가 살아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페델리우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그를 가장 살리고 싶어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물론 그가 아프지 않았다면 분명히 전부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다시 말할게. 살아줘서 고마워. 네가 살아있어서 기뻐.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네게 못 할 짓을 하는 걸까?”
컵을 매만지며 페델리우스에게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고 생각한다. 함께 있어줘서, 살아줘서.
“나는…… 네가 콘니르랑 대화를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콘니르와 같은 처지였더라도 나는 미련 없이 너를 구했을 거야.”
“……오시리아.”
“페델리우스. 움직일 수 없는 너는 연약했어. 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콘니르는 네 부모님보다 네가 더 소중했던 거야. 나도 그래. 네가 더 소중해. 하지만, 구할 수 있었다면…….”
페델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만약 그 상황이 내 상황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나는 페델리우스를 먼저 구했을 거다.
“내가 전부 구할 수 있었다면 네 부모님도, 페델리우스 너도 구했을 거야.”
그랬을 거다. 어느 한쪽을 구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다. 구할 수 없었으니까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콘니르의 이야기를 들었어.”
“……네.”
“그러니까 네 이야기도 듣고 싶어. 페델리우스.”
페델리우스의 두 손을 붙잡았다. 꽉 붙잡은 손을 페델리우스가 힘없이 마주 잡았다. 언젠가 아콰가 감정은 사람을 좀먹는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콘니르도 페델리우스도 각자가 생각하는 다른 죄책감에 서로를 좀먹고 있는 건 아닐까?
페델리우스가 다른 이들을 가엾게 여겨서 데리고 오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저 대신 부모님을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콘니르에게 빌었습니다. 하나뿐인 친우 녀석에게 빌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응.”
“그리고 그 뒤의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저는 기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응.”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입을 연 페델리우스가 퍽 괴롭게 보였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누군가 바늘로 계속 찔러대는 것처럼 속이 찌르르하고 아팠다. 이상한 기분에 심장을 더듬거렸다.
“하지만 눈을 뜨니 보이는 거라곤 불타오르고 있는 저택과 죄책감에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놈이었습니다.”
“그랬구나.”
페델리우스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저것이 분노인지 혹은 그 외의 또 다른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페델리우스가 현재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차라리, 널 살려줬는데 왜 그러냐고 화를 내줬으면……. 그랬으면…….”
입을 열던 페델리우스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꾹 닫힌 입술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맺힌 웃음을 입가에서 떨어뜨렸다.
웃을 수가 없다. 그의 이야기에 도저히 웃어줄 수가 없었다.
“응. 수고했어, 페델리우스. 그러니까 콘니르랑 이야기를 해봐. 그렇게 꾹꾹 묻어두고 괴로워할 거면 차라리 대화를 해봐. 그래도 안 된다면, 서로 잊는 게 낫지 않을까?”
안고 갈 수 없다면 버리고 가는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우려면 잊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 말에 페델리우스가 처연하게 웃었다.
“그가 저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했군요.”
“여러 번 도전했던 것 같은데.”
“제가 싫었습니다. 그와 대화를 하는 것도,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저 그때의 기억이 끔찍해서…….”
페델리우스의 말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괴롭고 슬픈 과거 속에 살아가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페델리우스나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페델리우스 역시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었고 메리조차도 과거의 상처에 울음을 터뜨렸다.
“응. 괜찮아, 페델리우스. 나도 아직 여전히 발밑이 진흙투성이니까.”
굳이 급하게 과거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아니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오면서 과거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 긴 시간을 한순간에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대화하자. 그리고 날 붙잡아줘.”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구해줬으면 했다. 아니, 함께 있고 싶었다. 그냥…….
“너랑 평생 함께 있고 싶어. 페델리우스.”
“……아.”
페델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벌어진 입에서 나온 탄성에 작게 웃었다. 그는 이런 말을 좋아하는구나.
“좋아해.”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가 벌겋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 서로 너무 멀어졌습니다. 이제 와서 대화를 한다고 뭔가 풀어지기는 할까요?”
“둘 다 대화하고 싶어 하잖아. 분명히 괜찮아질 거야.”
수없이 대화하고 싶어도 단 한 번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제 아비와는 다르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다녀올래?”
“……그가 말입니까?”
“응. 기운이 이 근처에서 느껴져.”
페델리우스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충분한 듯했다.
‘슬슬 콘샐러드한테 휘둘리는 것도 지쳤고.’
지쳐도, 지쳐도 이렇게 지칠 수가 없다. 그냥 얼른 해결해버리고 페델리우스와 둘이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다녀와. 난 저택에 돌아가 있을게. 음식 포장해달라고 해야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얼른 돌아와 주기만 하면 돼.”
고민하던 페델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이 나온 김에 일을 해결할 모양이었다. 언제 봐도 행동 하나는 빠르다.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응. 사과할 거지?”
“아뇨, 때리고 오겠습니다.”
응? 뭘? 사과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입을 떡 벌리자 페델리우스는 도리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개를 끄덕여?!
“다녀오겠습니다.”
“페델리우스. 이걸 쫓아가.”
흐릿한 푸른색 빛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게 페델리우스를 콘니르에게 안내해줄 거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프루니아한테 넌 못 준다고 전해줘.”
내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가 이내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가는 페델리우스를 보다가 나도 고개를 숙였다.
‘좋겠다.’
나와는 다르게 페델리우스는 용서할 사람도, 용서받고 싶은 사람도 있다. 솔직하게 입을 열어서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다.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야 깨달은 거지만,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고.’
아주 가끔 미묘하게 거슬리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건 황성에 가까이 다가가면 더 심해졌다.
“기회를 줘도 죽질 않네.”
나는 차라리 죽으라고 검이라도 던져주길 바랐던 적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는 내게 죽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아바마마.”
어떤 끔찍한 모습으로 어떻게 숨 쉬며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검을 던져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손에서 놓아버렸고 비를 내리는 것으로 복수를 끝맺기로 했다. 그 대신 페델리우스를 붙잡았다.
페델리우스와 함께할 시간을 택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잊을 거야.”
페델리우스가 제 과거를 마주보러 간 것처럼 나도 잊어야 했다. 그 사람을 잊을 거다.
“주문한 음식 포장해주세요.”
점원에게 말을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복수를 완벽하게 끝마쳐서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미래보단 역시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집이 훨씬 더 반가웠으니까.
“돌아가자.”
이제는 내 집이 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