Ⅺ
음식점을 빠져나온 페델리우스가 살짝 뒤를 돌아봤다. 식당 안에 그녀가 보였다.
흐릿할 정도로 투명한 빛이 재촉하듯 눈앞에서 뱅글뱅글 움직였다.
‘빨리 다녀오자.’
오랜 시간 끌어온 감정을 끊어낼 시간이 됐다. 끊어내지 않으면 분명 이후에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확률이 높았다.
간신히 그녀와의 관계에 진전이 생겼는데 과거에 얽매여 있고 싶진 않았다.
‘지나치긴 했지.’
최근에서야 자신이 심하게 과보호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래서 최대한 그녀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미 몸에 배어버린 습관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외출할 때만큼은 자유롭게 두려고 애쓰곤 있지만 말이다.
날아가던 빛무리가 어느 집 앞에 멈췄다. 페델리우스가 긴 숨을 뱉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 시간 마주하지 않았던 것을 마주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의외였다.
앞으로도 평생 마주할 생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페델리우스는 오시리아가 했던 말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부딪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부딪쳐도 안 되면 그녀의 말대로 버리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먹을 쥔 페델리우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묵직한 소리를 내는 나무문에 페델리우스의 몸이 절로 긴장했다. 정말 자신이 먼저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장난기라곤 없는 목소리. 끼이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열렸다. 간편한 복장으로 하품을 하면서 나온 콘니르가 눈을 크게 떴다.
“……뭐야.”
하품하던 채로 굳어버린 콘니르가 한참 만에야 한마디를 했다. 페델리우스가 묵묵하게 그를 쳐다봤다.
“신녀님이랑 대화라도 했나 보네. 먼저 찾아온 걸 보니까.”
한층 더 낮아진 톤으로 콘니르가 말했다. 페델리우스가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쳐다봤다.
여전히 가장 먼저 치솟는 것은 분노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그 뒤를 따랐다.
‘역시 괜히 왔나.’
오시리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쩐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멋대로 몸을 움직인 결과, 후회는 조금 늦게, 아니 조금 많이 뒤늦게 찾아왔다.
“대화, 나누고 싶어 했다고 하던데.”
“……그랬지. 정말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문을 가로막고 서 있던 콘니르가 살짝 비켜섰다.
턱으로 현관을 가리키며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차 한 잔 정도라면 괜찮으니까.”
“…….”
망설이는 페델리우스를 보던 콘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프루니아는 없어. 그러니 들어와.”
고민하던 페델리우스가 콘니르의 말에 곧장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둘이서 생활하기엔 문제없는 집이다.
‘저택으로는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고.’
추방당하면서 저택도 빼앗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페델리우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콘니르가 문을 닫곤 능숙하게 찻잔에 찻잎을 넣었다.
“그 신녀님 엄청 좋아하긴 하나 보네. 고집쟁이인 네가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고.”
“누구 멋대로 오시리아를 만나라고 했지?”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안 만나? 그렇게 싫으면 방에 가둬놓든가.”
콘니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모닥불 위에 걸어뒀던 주전자를 내렸다.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 페델리우스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
콘니르가 순순히 인사를 건넸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오시리아를 통해서도 만날 수 없다면 포기하자고 다짐했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왔다.”
“그게 날 위한 길이기도 하지.”
콘니르가 짧게 대답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 만이더라. 콘니르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떨어졌다.
“이렇게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글쎄. 햇수를 세고 지내진 않았으니까.”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이 뻔한 페델리우스의 행동에 콘니르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차를 홀짝이던 두 사람의 찻잔이 거의 다 비었다. 대화도 없이 묵묵히 차만 마시는 것은 두 사람에게 매우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왜, 그때 거짓말로 고개를 끄덕였나.”
찻잔을 다 비우고도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지독한 적막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페델리우스였다. 콘니르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계속 발버둥 쳤고 조금만 더 지체하면 전부 개죽음을 당할 것 같았으니까. 네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어.”
거짓말을 한 것은 콘니르도 미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페델리우스는 몸부림치면서 그를 밀쳐내려고 했다.
그저 발악하며 그들을 먼저 살리라고 소리쳤다.
자신은 괜찮다고, 혼자서도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구하러 와도 된다고.
그러나 냉정한 콘니르가 보기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무로 된 집은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게 거짓말을 했나?”
“네게,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만약 똑같은 상황에 다시 한번 부닥치더라도 같은 행동을 할 거다.”
그 시절의 콘니르에게는 페델리우스가 소중했다.
더없이 소중한 친우였고 아마 지금도 변함없을 것이다.
그때의 페델리우스는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도망칠 수 있는 체력이 남아 있었다면 콘니르에겐 분명히 두 번째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똑같은 상황이 돼도 날 구하겠다?”
“그래.”
“그러면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어? 네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왜 내게 죄인처럼 사과했나. 왜…… 너는 나를 세상에 다시없을 개새끼로 만들고 흙탕물에 처박았던 거지?”
페델리우스가 주먹을 쥐었다.
그가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누가 봐도 옳은 일을 해놓고도 죄인처럼 구는 친우였다.
그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신에게 수백 번이나 사과를 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말이다.
“뭐?”
“네가 잘못한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너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네게 소리 지르고 널 낭떠러지까지 밀어낸 건 나였어!”
죄인처럼 구는 그가 싫었다. 차라리 멱살을 붙잡고 화를 냈다면 이보다는 더 나은 상황이 됐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봐도 틀린 것은 자신이고 누가 봐도 속이 좁아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건 자신이었다.
소리치고 욕할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네가 한 일은 옳았다고,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지? 네가 뭔데!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추방을 당해! 네가 뭔데!!”
쨍그랑-!
찻잔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에는 시선도 주지 않은 페델리우스가 그대로 콘니르의 멱살을 붙잡았다.
“네 그 꼴이 나는 보기 싫었어! 네 추방 소식을,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무슨 심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네가 날 꼴도 보기 싫어해서…….”
“그래! 꼴도 보기 싫었어. 얼굴도 보기 싫었다. 너한테만 내가 친우였나? 나한텐 네가 친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나?!”
언성을 높이는 페델리우스를 보며 콘니르가 눈을 크게 떴다.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진 그의 눈을 보며 페델리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좀 필요한 일이었다. 아, 꼴도 보기 싫었지! 소중했던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까. 네게 언성을 높인 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너도 거짓말을 했잖아.”
“…….”
“그저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대화를 하면 주먹 한두 대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었어. 네가 날 구해준 건 분명히 자랑스러워해도 될 일이고. 내가 너에게 감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페델리우스의 말에 콘니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열리지 않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페델리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지키지 못해서 후회하는 건 콘니르뿐만이 아니다. 페델리우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콘니르의 멱살을 놨다.
왜 그때 아팠을까? 제 몸 하나 지킬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왜 하필 그때였을까? 왜 그곳에 남아있던 게 콘니르뿐이었을까. 왜 조금 더 단련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왜 아프셨을까.
해서는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괴롭고, 괴롭고, 또 괴로워서 죽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저를 살려준 콘니르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슬픔에 젖어있다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니 네가 자원해서 추방당했다고 하더군.”
충격 뒤에 다가온 또 다른 충격이었다.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 더는 말도 이어갈 수 없었다. 멍청한 새끼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지나도 콘니르는 돌아오지 않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잊겠다고 생각했더니 눈앞에 뻔뻔하게 나타나고.
“부모님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더니 나를 살려냈어. 부모님은 죽었어. 고맙긴 하지만 슬픔과 분노가 더 컸다.”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하지만 널 친우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야. 정신없는 와중에 네 감정까지 받아줄 여유가 없었어.”
뒤늦게야 정신을 놓고 있는 자신의 주위를 돌며 쉼 없이 사과를 했던 콘니르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했다.
“……미안했다. 널 그런 식으로 몰아치면서 네 탓을 하는 게 아니었어.”
“아니, 나야……말로…….”
크게 뜬 눈으로 더듬거리며 말하던 콘니르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콘니르. 너무 늦었지만, 날 살려줘서 고마웠다. 네 덕분에 오시리아도 만나고 지금의 식구들을 만났어.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페델리우스가 허리를 굽혔다. 90도로 숙인 페델리우스의 허리를 보다가 콘니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한 모습에 페델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미안, 미안해……. 전부, 살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할 수만 있다면 전부 살려주고 싶었다.
그때만큼 자신이 인간이 아니어도 좋으니 두 개의 손이 더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다.
불길 속에서 아무리 빌고 빌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 데리고 올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무너지는 건물 잔해 속으로 묻히던 그의 부모님을 콘니르는 지금껏 잊을 수가 없었다.
고개 숙인 콘니르가 뚝뚝 눈물을 떨어뜨렸다. 페델리우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나야말로 정말 미안했다.”
“넌 진짜 멍청한 새끼야…….”
콘니르가 목이 메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았을 거라고 발악하듯 소리치는 그를 보며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준비했던 수많은 사과의 말도 쉽게 전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셨는지 알고 있었다.
옆에서 줄곧 봐왔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페델리우스를 알고 있으면서도 원망을 감수하고 그를 구한 것이었다.
원망 따위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바라던 그 모습에는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살릴 수만 있었으면…….”
여전히 꾹꾹 억눌린 목소리로 콘니르가 입을 열었다.
“살릴 수만 있었다면 전부 살렸을 거야.”
‘하지만, 구할 수 있었다면…… 내가 전부 구할 수 있었다면 네 부모님도, 페델리우스 너도 구했을 거야.”
콘니르의 말과 오시리아가 했던 말이 겹쳤다. 페델리우스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근데, 그럴 수가 없었어.”
콘니르가 침통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길 속에서 수십 번을 고민했지만, 콘니르는 소중한 친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마음을 준 친우를 도저히 불길 속에 두고 올 수가 없었다.
친우와 나눈 약속보다도, 두 사람의 목숨보다도 처음 생긴 친우의 목숨이 수십 배, 수천 배는 더 소중했다.
그러나 텅 비어버린 페델리우스의 눈동자를 보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또한 분명히 또 다른 죄책감 속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었을 테니까.
“살릴 수 있었다면, 전부 살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그랬으면 좋았을 거다.”
그건 페델리우스도 수천 번도 더 넘게 생각해본 것이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시간을 돌리는 방법까지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이기심만으로 그 힘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그때 잠시 잠깐만 아프지 않았더라면, 다 같이 도망칠 수 있도록 5분만 몸이 나았더라면.
그런 기적이 있었다면 분명히 지금 모두가 함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페델리우스. 움직일 수 없는 너는 연약했어. 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콘니르는 네 부모님보다 네가 더 소중했던 거야.’
오시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콘니르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죄책감이 그의 눈동자에 비쳐 보였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약해져 있었다. 네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 오시리아도 만나지 못했고 너와도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겠지.”
“…….”
“나는 네 도움이 필요했었다.”
“아…….”
“네가 내 부모님보다 날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건 알고 있어.”
전부 오시리아가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마주봐야 하는 건 콘니르가 아니었다. 자신이 약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 상태론 분명히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다.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살아서 나가겠다는 콘니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거다.
“지금은 널 이해해. 그리고 아마 같은 상황이라면 나 역시 널 구했을 거다.”
만약 오시리아가 자신과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결론은 빨랐다.
아무리 그녀가 자기가 아닌 부모님을 살려달라고, 혹은 다른 소중한 사람을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어도…….
‘나는 분명히 그녀를 살렸겠지.’
그녀에게 원망을 받을 줄 알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랜 시간 고민했던 난해한 문제의 답을 알게 됐다.
“다시 한번 살려줘서 고맙다. 인사가 늦어져서 미안해.”
몇 번이고 전해도 부족할 감사 인사였다.
하지만, 분명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빠르게 이런 대화를 나눴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멋대로 떠난 건 아직도 용서할 수가 없군.”
오랜 시간 분노했던 것은 사실 멋대로 떠난 그의 행동 때문이었다.
서로 오해가 쌓여 빚어진 일이었지만.
“미안해.”
콘니르가 순순히 사과했다.
뒷목을 긁적이던 페델리우스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한 것은 그가 더 많았으니 사실 할 말이 없는 건 페델리우스 쪽이었다.
페델리우스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손을 뻗어 주저앉은 콘니르를 일으켜 세웠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저택에서 오시리아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바로 가는 거야?”
“그래, 아무래도 상태가 조금 이상했거든.”
페델리우스가 유독 차분한 데다 말도 없었던 오시리아를 떠올렸다. 표정도 제법 어두웠던 것이 그의 머릿속을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좋은 사람을 찾았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콘니르가 말했다.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프루니아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러니 프루니아에게는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가 없어.”
페델리우스가 말했다. 콘니르의 눈이 또 한 번 커졌다.
늘 둔한 듯 보이는 페델리우스는 프루니아의 마음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건가?’
콘니르가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페델리우스가 대답을 기다리듯 콘니르를 묵묵히 쳐다봤다.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진심이라는 건 오늘 오시리아에게 듣고 깨달았어.”
예전부터 페델리우스 자신을 이유 없이 따르던 프루니아였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친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겼던 적도 꽤 있었다.
최근에 들어서 그 끈질긴 시선이 오시리아를 보는 자신의 것과 닮았다는 걸 깨달아버렸지만.
“네 반응을 보니 정말이었던 모양이군. ……그녀에겐 미안한 일을 하게 됐어.”
몰랐을 땐 몰랐다고 대답하면 되지만 페델리우스는 오시리아를 통해 호감과 애정과 사랑에 대해 배워버렸다.
그녀의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잘 달래둘게. 걱정하지 마.”
콘니르가 페델리우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미 정해진 것을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어차피 끝을 내야 한다면 콘니르 역시 프루니아가 준 사랑을 되돌려받을 수 있는 다른 사랑을 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 부탁하지.”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신녀님도 같이.”
“…….”
페델리우스에게서 대답이 없다. 곧장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던 콘니르가 입을 닫았다.
“허, 사람이 사랑하면 바뀐다고 하더니…….”
저 우직하고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놈을 저렇게까지 길들인 그녀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콘니르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달은 해주지.”
한참 만에 나온 대답 역시 그다지 마음에 차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콘니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조심히 가.”
“그래, 다음에 보지.”
미련 없이 몸을 돌린 페델리우스가 멀어져갔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는 페델리우스를 보며 콘니르가 쓰게 웃었다.
‘많이 변했네. 우리도.’
이제 와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오해를 풀었다고 해도 그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콘니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소중한 게 생겼다 이거군.”
무뚝뚝한 성격에 비해서 정이 많고 속이 여린 페델리우스였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다쳐서 낑낑거리는 것조차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자라면서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페델리우스 곁에 모이는 이들은 어딘가 상처받은 이들이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숨어있을 생각이야? 프루니아.”
“……뭐야. 알고 있었어?”
물에 젖은 듯 푹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잠에서 깨어난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
콘니르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프루니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모습이 처연했다.
투둑,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가벼운 목소리를 냈던 콘니르의 입꼬리가 잘게 떨리다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미안하다. 프루니아.”
“흑, 오라버니가…… 뭐가, 미안……. 흐윽, 미안해…….”
“내가 그때 도망치지 말고 어떻게든 페델리우스랑 화해해야 했어.”
콘니르가 프루니아에게 말했다. 이미 전부 지나가버린 과거가 되어 뒤바꿀 수도 없겠지만.
“미안해.”
콘니르의 말이 기폭제가 된 듯 프루니아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흐으아아앙!”
처음 만난 이래로 줄곧, 그의 등을 좇지 않았던 적이 없다. 검을 쥔 것도 스치듯 했던 칭찬 때문이었다는 걸 분명 그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평생 알 일도 없겠지만, 그저 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엉엉 울어 젖히는 프루니아의 등을 콘니르가 차분하게 토닥거렸다. 쉽게 울지 않는 강한 여동생이었다. 적을 눈앞에 뒀을 때도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팔에 상처가 났을 때 어두워졌던 표정을 기억한다. 그것도 분명히 단 한 사람을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너는 충분히 했어.”
“흐으아앙!”
아무런 말도 없이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우는 프루니아의 등을 토닥였다. 떠나 있었던 시간 동안에도 그녀는 쉽게 페델리우스를 잊지 못했다.
마음을 정했을 때 가장 기뻐한 것은 그녀였다.
‘이어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는데.’
돌아와 보니 페델리우스에게는 이미 마음을 준 사람이 있었다.
“멍청한 놈이야, 페델리우스는. 분명히 네게는 조금 더 좋은 인연이 찾아올 거야.”
많이 아파한 만큼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이, 흐윽, 텅 빈, 것, 히끅, 같아서, 흐엉…….”
“그래, 그래. 많이 울렴. 그리고 이제 놓아주렴.”
긴 짝사랑이 보답받는 일은 아주 드물다. 단지 네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너를 좋아하면 되는 간단한 일인데도…….
서로의 사랑이 이어지는 일은 드물다.
십 년을 넘게 한 곳만 바라봐도 아주 운이 좋은 몇몇만 포상을 받는다. 프루니아는 그러지 못했다.
‘신녀님한테 반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자신도 프루니아만큼 서럽게 울고 있지 않았을까?
마음을 더 주기 전에 일이 해결돼서 다행이었다. 콘니르가 프루니아의 등을 토닥이며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