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왕과 재상
“정말 그대로 갈 거란 말이지?”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걸어가시는 앞길에 찬란함만이 가득하시길.”
재상이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사표도 제출했고 미련이라곤 없다. 적어도 왕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왕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재상은 다시금 깊이 허리를 굽히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경사와 흉사가 같이 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왕이 아직도 수리하지 못한 사직서를 내려다봤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조금도 비뚤어짐 없이 적힌 글씨는 그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왕이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가 처음 만날 때부터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없어.”
수천 년 전 모든 걸 뒤로하고 인간이 되겠다며 필멸자의 길에 들어설 때도.
그리고 필멸자가 되어 만나서도…….
“단 한 세기, 인간의 삶이 끝나는 그 짧은 시간만큼이라도 곁에 있어주기가 그렇게 어렵더냐.”
왕이 이마를 찌푸렸다. 늘 뒤쫓는 건 자신이다. 그녀는 사랑보다도, 연인보다도 늘 하고 싶은 일이 먼저였다.
그럼에도 좋았다.
마지막에는 언제나 그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곁으로 와준 그녀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조차도 질린 듯 그녀는 필멸자의 길을 걸어갔다.
수십 번 죽었다가 수십 번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는, 기억도 잃고 한없이 짧은 시간만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
그럼에도 매번 태어나 살아가는 그녀는 영혼의 성격답게 늘 강했다.
노예였을 때도 강했고 영웅이었을 때도 누구보다 강인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같은 시간을 살아보고자 했다.
왕이 사직서를 꽉 움켜쥐었다.
‘이번이 아니면…….’
또 몇천 년의 세월이 흘러야 만날 수 있을까?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음 만나러 갔을 때도 다를 바 없었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집무실을 나섰다. 긴 칩거 끝의 외출이었다.
왕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엘레나를 처음 만난 것은 꽤 어릴 때였다. 열두 살쯤 되었을까.
그녀는 수십 번의 환생을 반복하고 있었고 이번 대에 주어진 삶은 밥 한 끼도 먹기 힘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버림받은 고아였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리 정의롭지 못한 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면서.
* * *
허름한 나무상자 위에 주홍빛 머리카락을 한 소녀가 앉아있다.
잘 관리하지 못한 듯 푸석푸석하고 탁한 주홍빛이었다.
사실 소녀, 엘레나는 오늘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까부터 뒤에서 누군가 계속 쳐다보는 기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뒷골목에서 구르다 보면 자연히 타인의 시선쯤은 느낄 수 있게 된다.
“……짜증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엘레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떠나려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브를 쓴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가 소녀의 앞에 섰다.
제법 다급해 보이기까지 하다.
“안녕, 네가 이 주변에서 범죄자들 루트를 뚫어주고 있다는 쭉쭉…….”
웃으며 말을 하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빵빵한…….”
늘어지는 목소리에 의아함이 담긴다.
고개도 살짝 기울어졌다. 미간이 좁아져 굵직하고 묵직한 주름마저 생겼다.
그 생각의 변화가 고스란히 엘레나의 눈에 담겼다.
엘레나가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미……녀……?”
그런 엘레나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아예 끝을 올리며 의문형으로 말을 마쳤다.
엘레나가 눈을 치켜떴다.
붉은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에 닿으면 당장이라도 불이 붙을 것처럼 두렵다.
“음. 내가 잘못 찾아왔나 보군. 미안하다.”
고개를 저은 남자가 빠르게 몸을 돌렸다.
냉큼 뒤를 도는 남자의 옷자락을 엘레나가 꽉 붙잡았다.
남자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뭐 하는…….”
눈을 매섭게 뜬 엘레나가 남자의 로브 자락을 붙잡은 채, 무릎이 접히는 부분을 발로 힘껏 차올렸다.
정말 이를 악문 채 있는 힘껏 말이다.
“어흑.”
남자가 멋없는 소리를 내며 냉큼 몸을 숙였다.
그가 다리를 바들바들 떤다.
헛숨을 삼키는 소리 외엔 말이 없었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그의 고통을 대변했다.
“예의 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엘레나가 짓씹듯 말을 내뱉곤 몸을 돌렸다.
저런 남자들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다.
멋대로 부풀린 소문만 듣고서 제멋대로 편견을 가지고, 멋대로 실망한다.
사실 뒷모습만 보면 오해할 만하긴 하다.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헤친 덕에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유독 저 남자가 기분 나쁜 이유는 뭔지.
‘온종일 뚫어져라 쳐다본 이유가 저거였다니.’
다가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린 자신이 멍청해진 것 같다.
엘레나가 허름한 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으며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저벅.
타박타박.
저벅.
두 걸음 옮길 때마다 뒤에서 한 걸음씩 다가온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누군지 파악하는 것은 엘레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파악이라고 할 것도 없다.
아까부터 따라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엘레나의 앳된 얼굴 위로 짜증이 서렸다.
뚝,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자 따라오던 소리도 멎었다.
이대로 가다간 집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엘레나가 몸을 돌렸다.
“이봐, 아저씨. 왜 따라와?”
“아무리 봐도 잘못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야.”
뜬금없이 남자가 말했다.
엘레나가 표정을 굳혔다. 무슨 개소리냐는 말이 표정에서 빤히 느껴졌다.
“…….”
“나와 함께 나라를 바꿔보지 않겠나?”
엘레나가 무슨 일인가 싶어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한참 만에 열린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매우, 무척이나, 의미가 없었다.
“미친놈.”
엘레나가 한마디를 내뱉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슨 의뢰라도 하려나 싶었더니 뜬구름이라도 잡는 소리였다.
“얘기라도 좀 들어주지그래, 소녀여.”
“할 말 없어.”
엘레나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좁은 골목길 사이로 쏙 들어갔다.
당황한 왕이 뒤를 쫓았지만, 가면 갈수록 좁아져서 결국 낑낑거리며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허, 너무하네.”
이렇게 면전에서 박대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왕이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아직은 왕이 아니긴 하지만.’
곧 왕이 될 거다.
기왕이면 왕위를 물려받기 전에 인재들을 모으고 싶었다.
“잠복이나 해볼까.”
왕이 가볍게 나무를 밟고 올라가 지붕 꼭대기에 착지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 * *
‘이제야 좀 조용하네.’
엘레나가 따돌린 남자를 생각했다. 뒷골목 고아에게 나라를 바꾸자고 하는 미친놈이라니. 적어도 어느 집안에서 탈출한 노예나 환자가 분명했다.
어쨌든 제정신은 아닌 듯 보였다. 엘레나가 안심하며 자신의 아지트로 곧장 향했다. 그녀는 오늘도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나이는 어리지만 일 처리가 정확해 엘레나는 꽤 많은 거래의 중간다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엘레나가 긴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녕? 꼬마 아가씨.”
“…….”
불쑥 튀어나온 남자를 엘레나가 무시하고 지나쳤다.
“아, 오늘은 날도 좋지. 이런 좋은 날 내 얘기를 들어줄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
엘레나가 무시하고 지나가자 남자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툭 내밀었다.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남자는 제법 순발력 있고 체력도 좋았다.
“오늘이 일주일짼데, 언제쯤 얘기를 들어줄 거야?”
“포기할 때가 됐는데.”
남자가 다리를 굽히며 쪼그려 앉았다.
엘레나와 정면에서 눈을 마주한 그가 빙긋 웃는다.
“나랑 같이 가자. 곧 평민도 황성에서 일할 기회가 생길 거야. 그 첫 시험에 그대가 지원을 해줬으면 해.”
“난 배운 게 없어.”
“음. 재상직이라면 딱 걸맞을 것 같은데.”
“미친놈.”
“책이라면 얼마든지 가져다줄 테니까.”
엘레나가 얼굴을 구겼다.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은 여전했다.
고아원에서 구를 대로 구른 그녀가 황성에 시험을 봐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신이 뭔데?”
“어, 내가 곧 왕이 될 거라서. 시간이 많이 없어.”
엘레나가 굳었다.
그녀가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을 치며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너, 너, 아니, 당신, 왕족이야? 귀족?!”
“쉿. 그렇긴 한데. 뭐, 지금은 한량.”
엘레나가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난, 그런 거 못……합니다. 그러니까 돌아가 주세요.”
엘레나가 어색한 존댓말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귀족이라면 귀족 모독죄나 왕족 모독죄 같은 걸 이용해 얼마든지 그녀를 개미 죽이듯 죽일 수 있을 거다.
그녀가 지금까지 했던 막말들을 떠올리며 새하얗게 질려갔다.
“존댓말은 됐어. 아직 왕도 아니니까.”
“…….”
엘레나가 말을 잃었다.
“좋아, 재상직을 맡으면 이 내가 지켜주도록 하지. 그대가 어떤 위험에도 처하지 않도록 말이야. 이 정도면 수지에 좀 맞나?”
[좋아! 내가 널 지켜줄게. 어떤 위험에 처해도 지켜줄 테니까 우리…….]
엘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
종종 꿈에서 듣던 목소리와 굉장히 흡사하다.
얼굴은 늘 안개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 즐겁고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 꿈을 꾸는지는 엘레나도 알지 못했지만.
순간 말을 잃은 엘레나가 손을 들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세요.”
엘레나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하곤 제 갈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물론 왕이 포기하는 일도 없었지만.
“아아, 나무도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고 하던데, 그대는 일곱 번을 찍었는데도 아직 건재하군.”
“…….”
엘레나가 깔끔하게 무시했다.
열 번을 찍든 백 번을 찍든 황실이라는 곳에 들어갈 마음은 없다.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가장 편안했다.
“어린아이가 하기에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야.”
진지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레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이 정도로 부족함 없이 사는 이유는 이런 일이라도 하기 때문이니까.
“이 바닥에서 일하는 애들 중에 그걸 모르는 놈은 없어……요.”
엘레나가 대답하곤 한숨을 삼켰다. 멈추지 않으면 끝까지 따라올 기세다.
“여기가 내 집인데 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거예요?”
엘레나가 쏘아붙였다.
“음……. 자네 집까지.”
쾅!
엘레나가 다 무너져가는 허름한 집의 문을 세게 닫으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왕만이 허망하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 * *
“네가 중개상이냐?”
“뭐야?”
덩치가 소만 한 남자가 팔짱을 딱 낀 채 엘레나를 내려다봤다. 출렁거리는 뱃살을 보며 엘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블랙독’이라는 애들 알지?”
엘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온갖 위험한 일은 다 하는 놈들이다. 무법으로 가득한 용병집단이라고 들었는데 위험한 약물은 물론 독약도 취급한다고 들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엘레나로선 결코 발을 들이지 않는 영역이기도 했다.
몇 번인가 보긴 했지만, 그쪽으론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물론 그런 놈들이 주는 일거리도 결코 수락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그놈들 일거리는 얼마를 줘도 안 해.”
“놈들과 연만 터주면 돼.”
“나도 말해본 적 없어.”
“스카우트 제의는 있었다면서? 얼굴은 알 거 아냐?”
엘레나가 얼굴을 구겼다. 얼굴을 알든 모르든 그녀는 놈들을 상대할 마음이 조금도, 정말 조금도 없었다.
놈들이 뒷골목 생태를 망치고 있었다.
돈이 되는 건 뭐든 다 독식하려고 했다.
한 번은 자신들의 일을 중개하라는 제안도 해왔는데…….
‘단칼에 거절했지.’
몇 번인가 아쉽다는 듯 말을 더 걸어왔지만, 여전히 단호히 고개를 저으니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사실 그들에게 순순하다는 단어가 어울리긴 할지 모르겠지만.
“마약이라도 팔아먹으려고?”
“뭐, 좋은 걸 구해서 말이야. 놈들에게 주는 대신 두둑하게 챙기려는 거지. 어쨌든 소개해주면 돈 넉넉하게 준다고 약속하지.”
“얼마를 줘도 안 한다고 했잖아?”
“하는 게 좋을걸.”
남자의 커다란 손이 엘레나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2m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는 걸을 때마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거 안……! 큭.”
숨이 막힌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다리를 움직여 발버둥을 쳤지만, 놈은 쉽게 놔줄 기미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널 죽이는 게 더 빠를까, 그냥 거래 한번 터주는 게 빠를까? 돈도 준다고 하잖아.”
“개새끼가!”
여전히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는 엘레나를 한 손으로 막은 남자에게 그녀가 욕설을 내뱉었다.
엘레나는 이 바닥에서 가장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인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약 유통도 가끔은 했지만,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부 거절했다.
“날 죽이면 나랑 거래 튼 녀석들이 네놈들을 가만히 둘 줄 알아?”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엘레나가 손에 덜렁덜렁 매달린 채 으름장을 놨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인다.
“뭐, 네년만 한 놈이 없다고 알고 있긴 하지.”
“알면 놔.”
“천만 루웰. 어때? 한 번 거래 터주는 거에 천만 루웰이라고.”
엘레나가 얼굴을 구겼다. 그녀로선 무척 짜증 나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이 바닥에서 생활하며 그쪽이랑 안 엮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아이고, 웬 미친놈이 우리 애를 괴롭히냐? 난 아직 악수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넌 뭐……. 커흑!”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왕이 그대로 남자의 몸을 힘껏 밟았다. 남자의 커다란 덩치가 무너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엘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애 멱살을 잡고 지랄이야, 지랄은.”
“……당신, 정말 황족 맞아……요?”
엘레나가 욱신거리는 목을 매만지며 눈치를 살폈다. 말투가 뒷골목 양아치만큼이나 무척 멋없다.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얼마나 가볍냐면 훅 불면 휙 날아갈 것 같다.
“말투 때문에?”
“그렇지……요.”
“왕이 되면 이런 말 못 쓰니까 지금이라도 질리게 써놔야지.”
왕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엘레나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쓰러진 남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덩치 큰 남자의 배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다리 사이를 노리며 있는 힘껏 뛰어내렸다.
“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홉떴던 남자가 다시 기절했다.
“오……. 화끈하네.”
말하던 왕이 제 다리 사이를 슬쩍 손으로 가렸다. 엘레나가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당신 건 작아서 어차피 밟히지도 않아.”
……요. 작게 뒷말을 덧붙인 엘레나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골목길을 훌쩍 빠져나갔다.
“누가 작…….”
왕이 엘레나의 뒤를 쫓았다.
“내게 작은지 안 작은지 어떻게 알아?!”
엘레나의 시선이 왕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층 더 비참해진 왕의 동공이 느리게 떨렸다.
“정말, 너무하는군.”
왕의 말에 엘레나가 작게 웃었다. 휘어진 눈동자가 퍽 즐거워 보인다.
“장난이야.”
“재상, 언제쯤 같이 가줄 건가?”
“다른 사람 찾아……요.”
존댓말 쓰기가 귀찮다. 써본 적이 있어야 그나마 덜 어색한데 써본 적이 없으니 어색함이 하늘을 찌른다.
“그나저나 자리를 옮겨야겠는데.”
“자리를 옮긴다니?”
“아까 그놈들 유명한 놈들이야. 아마 날 잡아 죽이겠다고 혈안이 돼서 내 집까지 쳐들어오겠지.”
엘레나가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가 간단한 물건만 챙겼다. 떠돌이 생활은 여러 차례였지만, 이렇게 수도를 버려야 했던 적은 없다.
“안전하게 다른 영역으로 옮겨야지.”
“어디로?”
“어디든.”
엘레나가 후줄근한 천에 물건을 싸서 꽉 묶었다. 그녀가 짐보따리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둔 게 아깝네.’
어차피 한곳에 길게 머물 수 없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여기서 쌓아 올린 신뢰를 전부 버려야 한다는 뜻이니까.
“도와줘서 고마웠어. 미안하지만, 재상은 정말 무리야. 내가 그럴 능력이 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고.”
“될 거야.”
인사를 건네려는 엘레나를 왕이 한마디로 붙잡았다. 장난기가 사라진 표정을 보며 엘레나가 걸음을 멈췄다.
“넌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을 거야. 타오르는 불길처럼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겠지.”
“…….”
“장담해. 넌 줄곧 그래왔으니까.”
엘레나는 도대체 어디서 날 봤기에 그런 말을 하냐며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그가 그 큰 눈망울에서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굴 것처럼 보였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담담한 표정 위로 얼굴이 일그러져 울고 있는 그가 겹쳐 보였다.
***
“오랜만이네.”
수도의 뒷골목에 다시 돌아온 것도 오랜만이다. 돈이야 모아둔 게 있지만, 필요한 금액을 제외하곤 전부 남겨두고 왔다.
제까짓 푼돈이야 나라 살림에 얼마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길었다.’
긴 시간을 황성에서 보냈다.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았던 재상의 일을 완수했다. 미련 없이 돌아서도 될 만큼.
그것만으로도 엘레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마지막이 조금 엉망이었지만, 사실 사퇴는 줄곧 생각해두었던 것이니까.
“집을 먼저 구해야 할 텐데.”
예전처럼 다시 뒷골목 생활을 이어갈 마음은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해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니면, 뭐…….
‘그러게, 뭘 하면 좋을까.’
너무 대책 없이 나왔나 싶기도 하다. 사실은 지금보다 조금 더 안정된 시기에 나올 생각이었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엘레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누구냐.”
엘레나가 허리춤의 검을 붙잡았다. 뒤에 숨어있던 자가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황급히 검을 뽑으며 몸을 돌렸다.
“안녕, 살벌하고 쭉쭉 빵빵한 미녀 아가씨.”
가벼운 옷차림에 가벼운 목소리.
그리고 오래전 어느 날이 기억나게 하는 저렴한 단어 선택에 엘레나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있잖아, 꼬마 아가씨. 나와 함께 나라를 바꿔보지 않겠어?”
“이 자리에 꼬마는 없고 나라를 바꿀 인재는 더더욱 없습니다. 돌아가서 일이나 처리하시죠.”
엘레나가 허리춤에 검을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일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왕, 아니 황제의 자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당신은 이제 작은 왕국의 왕이 아닙니다. 어엿한 제국의 황제시죠. 떠나간 재상은 잊고 다른 좋은 인재를 또 발굴하십시오.”
왕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안 되겠어.”
“네?”
“난 역시 자네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말이야.”
엘레나가 한쪽 눈을 천천히 치켜떴다. 멍청한 소리지만, 저의를 알 수 없는 말이다.
“돌아와 주게.”
“있을 때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시니 당연히 질릴 수밖에요.”
“내게 질렸나?”
황제의 질문에 엘레나가 대답 없이 그를 쳐다봤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가 엘레나의 뒤를 쫓았다.
“자네가 너무했지.”
“……제가 뭐가 말입니까?”
“좋아하는 이가 다른 여인과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리는데 내켜 할 사람이 대체 어디 있겠나.”
엘레나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평소에도 딱딱한 편이었지만 한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는 말이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처럼 차갑게 굳은 엘레나가 뻣뻣한 고개를 애써 돌렸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켜 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그 전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인과 결혼하라고 성화 부린다고?”
“……누가 누구를요?”
엘레나의 물음에 왕이 도리어 묘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내가 자네를?”
“약 드실 시간이 지났습니다. 돌아가서 약 먹고 푹 주무십시오.”
엘레나가 단칼에 잘라내며 몸을 돌렸다. 왕이 어깨를 으쓱이곤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대가 옆에서 간호해주겠다고 한다면 그러도록 하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알고 있습니까?”
“줄곧 연모하던 상대에게 고백하고 있다네.”
엘레나가 주먹을 쥐었다. 결코, 절대 원하지 않던 결말이다.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못 들은 이야기였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폐하.”
허리를 굽힌 엘레나가 안녕을 고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성큼성큼 황제에게서 멀어져갔다.
“너무하네.”
그렇게 말하는 왕의 표정은 제법 밝았다.
“잠복이나 해볼까.”
어깨를 으쓱인 왕이 엘레나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쳐다봤다. 오랜만에 내뱉는 단어는 자그마한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이 냉큼 지붕 위로 올라가 그녀가 갔던 길을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