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결혼 1년 차
“……죽고 싶어.”
짜증 난다. 짜증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
오시리아가 치고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최근 들어 짜증이 늘었다. 이유 모르게 짜증이 난다.
불현듯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났다가도 페델리우스나 메리가 가져다주면 또 문득 먹기가 싫어진다.
식욕도 무척 늘어서 몸이 무거워졌다. 살이 찐 게 분명한데도 음식이 자꾸 먹고 싶었다. 뭔가 하고 싶어서 밖을 나가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는다.
우울했다.
이유 모르게 그냥 우울하다.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아서 그런지 한층 짜증이 더 났다.
“아, 짜증 나.”
침대에 양 팔다리를 쫙 펴고 드러누운 오시리아가 중얼거렸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입 밖으로 내는 짜증인지 모르겠다.
왜 짜증이 나는지 이유도 모르겠다. 그냥 짜증이 난다. 머릿속에 가득한 짜증에 오시리아가 이불을 끌어안았다.
숨을 훅 들이마시니 페델리우스의 냄새가 남아있다.
“왜 안 와.”
일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알고 있다. 알지만, 역시 요즘은 투정을 부리게 된다.
보고 싶다고 하면 제 일은 전부 내팽개치고 옆에 있어줄 사람이라는 걸 뻔히 아니까 요즘은 맘 놓고 투정도 부리지 못한다.
신녀라고는 해도 너무 평화로워진 자르딘 왕국, 아니 자르딘 제국은 무척이나 재미가 없다. 오시리아가 이불에 얼굴을 푹 묻으며 엎드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시리아는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노크라면 대개 메리나 혹은 아콰뿐이다.
아콰도 요즘은 메리 옆에 찰싹 달라붙어 다니더니 메리의 습관을 전부 배운 모양이다.
저번에 인간에게 인사를 하는 아콰를 보며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다.
“주인님, 들어가도 돼요?”
“아콰?”
“네.”
“들어와.”
언제부터 허락을 받았냐는 말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나쁜 변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콰는 분명히 변했다. 누구보다 다정해졌고 누구보다 상냥해졌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던 녀석이 지금은 누구보다 메리를 잘 이해했다.
메리도 아콰에게 제법 의지하는 모양이다.
‘너무 멀어진 것 같아.’
그래서 씁쓸하고, 그래서 속상하고, 그럼에도 기쁘다. 이 미묘한 감정을 잘 모르겠다.
“아콰아.”
투정을 부리듯 아콰를 부르자 아콰가 냉큼 다가온다.
페델리우스만큼 덩치가 커졌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콰가 순순히 오시리아에게 안겼다. 그리곤 저도 손을 뻗어 오시리아를 끌어안는다. 시원한 감촉에 짜증만이 가득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많이 우울한가요? 주인님.”
“응. 무척. 너무 우울해. 근데 왜 우울한지 모르니까 더 짜증이 나.”
“음. 저도 인간은 잘 모르겠어요.”
아콰가 내 품에 안긴 채 웅얼거렸다. 꽉 끌어안았지만, 도망가거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아콰가 바닥에 앉은 채 오시리아를 안아 제 무릎에 앉혔다. 오시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아, 아콰가 나보다 힘이 세졌어.”
“힘이 세진 지는 오래됐어요.”
아콰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오시리아가 불만을 툴툴 토했다. 아콰가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메리랑은 사이가 좋아?”
“네, 나쁘지 않아요.”
“둘이 사귀는 거야? 결혼하고 아기도 낳아?”
“아뇨? 친구인데요?”
아콰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개를 한껏 기울인 얼굴이 무척이나 기이하다.
그러니까, 왠지 할 거 다 해놓고 모른 척한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오시리아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아콰를 쳐다봤다.
“친구랑 같은 침대에서 자?”
“주인님이랑도 맨날맨날 같이 잤는걸요.”
그거랑 이건 조금 다르지 않던가.
설명을 해줄까 잠시 고민하던 오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오시리아도 어렴풋이 이해할 뿐 어떤 점이 다른지 설명하긴 조금 어려웠다.
“으음…….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부분이요?”
“글쎄…….”
오시리아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대답하기가 곤란해서 입을 다물곤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인간은 여전히 어렵네요.”
아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오시리아가 똑같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보고 싶다.”
고개를 푹 숙인 오시리아가 중얼거렸다.
“누구 말입니까?”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오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야 페데……. 페델리우스?”
“네.”
부드럽게 눈꼬리를 휜 페델리우스가 손을 뻗어 오시리아를 번쩍 들었다. 품에 안고 있던 온기를 빼앗긴 아콰가 불만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근데 주인님.”
“응?”
“맨날 물어보려다 까먹었는데, 주인님 언제부터 심장이 두 개였어요?”
구겨진 옷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콰가 문득 물었다. 심장이 두 개라니 그건 무슨 뜻이지? 오시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왜 심장이 두 개야?”
“몇 달 전부터 주인님에게서 두 개의 심장이 느껴지는데요? 저는 새로운 정령이라도 품으신 줄 알았어요.”
고개를 기울인 아콰의 말에 오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정령은 무슨. 그녀에게 정령이란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로지 아콰뿐일 거다.
“잠깐, 생명이 두 개가 느껴진다는 말입니까? 정령님.”
“너 대체 언제쯤 정령님이라는 이상한 호칭 그만둘 거야?”
아콰가 제 팔로 몸을 비비며 물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게 꽤나 불편한 듯했다.
‘예전엔 좋아했으면서.’
오시리아는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아콰라고 불러!”
“네, 아콰 님.”
“……너도 징하구나. 주인님은 네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네. 어쨌든 대답을 해주자면 맞아. 생명이 두 개 느껴진다고도 할 수 있겠네.”
아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질린 표정의 아콰와는 다르게 페델리우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꼭입니다, 오시리아.”
“응? 아니, 갑자기 왜…….”
“메디르 님을 모셔오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한 손으로 오시리아를 번쩍 들었다. 덜렁 들어 올려진 오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오시리아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혀 이불까지 덮어주고서야 방을 뛰쳐나갔다.
“응……?”
이불을 붙잡은 오시리아가 멀뚱히 아콰를 쳐다봤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페델리우스가 문을 거칠게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메디르 님이 들려있었다.
아니, 정정하자.
정확히 말하자면 넋이 나간 듯한 메디르 님이 페델리우스의 옆구리에 꽂혀 있었다. 덜렁덜렁 안아들고 온 모양이다.
“……페델, 리우스……?”
“허억, 허억- 메디르 님, 진찰 좀 해주십시오.”
“하늘에에…… 벼얼이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왔는지 눈동자가 뱅글뱅글 돈다. 페델리우스가 메디르를 똑바로 세웠지만 메디르는 제대로 중심도 잡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침대에서 일어난 오시리아가 손을 휘젓자 푸른 물길이 메디르를 휘감았다. 어지러워 보이던 노인이 곧 제정신을 찾았다.
“아.”
“괜찮아?”
“……페델리우스 경이 약 먹을 시간이 지난 모양입니다. 곧 약을 준비해서 입에 집어넣겠습니다.”
메디르가 가방에서 해골 그림이 그려진 약병을 꺼내 눈을 치켜떴다. 아콰와 오시리아가 두 사람의 공방을 가만히 지켜봤다.
“부탁드립니다, 메디르 님.”
“하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 아니, 신녀님.”
“음, 그래. 오랜만이야.”
오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델리우스가 메디르의 어깨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다시 어지러워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격하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메디르가 가지고 온 나뭇가지로 페델리우스의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진찰이고 뭐고 없을 줄 알게!”
뚝, 페델리우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난 아프지 않은데 대체 누굴 진찰한다는 거야?”
오시리아가 결국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메디르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오시리아의 맥을 짚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편하게 숨을 내쉬세요.”
“아니, 난…….”
“쉿.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디르의 박력에 오시리아가 결국 뚱한 표정으로 숨을 죽였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메디르가 이내 오시리아의 소맷자락을 정리해주며 손을 뗐다.
“자네의 예상이 맞네.”
페델리우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얼마나 커졌냐면 눈동자에 접시도 넣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말입니까?”
페델리우스가 메디르의 어깨를 붙잡고 또 흔들며 말했다. 메디르가 얼굴을 확 구겼다.
“정말이니 그만 좀 흔들게!”
“아, 죄송합니다. 너무, 너무 놀라서. 도대체 얼, 얼마나 된…….”
“삼 개월쯤 된 것 같네.”
메디르가 어깨를 탈탈 털며 말했다. 노인은 한숨을 쉬며 구겨진 옷을 다시 폈다.
도대체가 한시도 편할 날이 없다.
‘슬슬 은퇴할 때가 된 게지.’
이러다 애가 태어나면 얼마나 자신을 들들 볶을까. 메디르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은퇴하자.’
메디르는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결론을 십 분도 되지 않아 깔끔하게 내렸다.
“뭐가 삼 개월이라는 거야?”
“아. 설명이 늦어 죄송합니다.”
옷매무새를 만지던 메디르가 살짝 고개를 숙인다.
“신녀님께서는 아이를 임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임신 삼 개월째입니다.”
“임……. 뭐?”
“저와 당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겁니다.”
무릎을 꿇은 페델리우스가 조심스럽게 오시리아의 배에 손을 올렸다. 오시리아가 말을 잃은 듯 굳어졌다.
“애? 너랑 내 아이?”
“네.”
페델리우스가 오시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벅찬 듯 꽉 감은 눈과 끌어안은 팔에 오시리아가 숨을 삼켰다.
‘……아이.’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이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오시리아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메디르가 인자하게 웃으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정말이야?”
“네. 요즘 감정기복이 심하고 음식이 많이 당기진 않으셨습니까? 그 외에 입덧이 있었을 수도 있고……. 사실 여태 눈치채지 못한 게 신기하긴 합니다.”
워낙 오시리아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페델리우스이니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령이 그걸 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메디르에게도 조금 신선하게 다가왔다.
‘폐하께서도 매일 밤 재상에게 찾아가느라 바쁜 것 같고…….’
메디르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빨리 그만두자.’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모시는 상사의 연애사에 관여하다가 그 일에 휘말리는 거다.
메디르가 허허롭게 웃으며 지금껏 품에 안고 살아왔던 사직서를 떠올렸다.
“사랑합니다. 오시리아.”
울먹이는 페델리우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메디르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사직서를 제출할 날은 오늘이 가장 적당할 듯했다.
* * *
“오시리아, 뭐 드시고 싶은 건 없습니까?”
“별로.”
“오시리아,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응.”
“오시리아, 오늘 식사는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
가만히 들으며 대답해주던 오시리아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종잇장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본 페델리우스가 또다시 호들갑이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
“메디르 님을 모셔올까요?”
페델리우스에게 지친다.
오시리아는 최근 페델리우스의 얼굴을 보는 데 지쳐가는 스스로를 느꼈다. 아니 사실 좋은데 싫다.
그러니까, 페델리우스가 옆에 가만히 있어 주는 건 좋은데 저렇게 쉴 새 없이 물어보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니 짜증 난다.
하루 이틀이면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일주일째라는 거다. 일주일째!
앞으로 일곱 달을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어디 먼 데 도망이라도 가 있어야 하나 고민된다.
“페델리우스야.”
“예. 오시리아.”
군기가 바싹 들어간 페델리우스가 대답했다.
“너 짜증 나.”
“……예?”
“일 안 가?”
“오늘은…… 휴일입니다…….”
아, 그랬던가.
오시리아가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육아휴직을 내겠다는 페델리우스를 뜯어말렸다. 일곱 달이다. 자그마치 일곱 달 휴직이 말이 되는가.
게다가 페델리우스는 집에 시종과 시녀들도 있다. 굳이 그가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다.
“아, 먹고 싶은 거 생겼어.”
“말씀하십시오!”
“뭔가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
오시리아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입 밖에 냈다. 페델리우스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달콤하고 시원해야 돼.”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페델리우스가 허리를 굽혀 오시리아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오시리아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호선을 그린다.
“금방 오겠습니다.”
“응, 조심히 갔다 와.”
손을 흔들자 페델리우스가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방을 나섰다.
‘아, 조용해졌다.’
먹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 이면에 조금만 조용히 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이걸 그대로 말하면 페델리우스는 분명 삐지겠지.
“정말, 여기에 있는 걸까?”
오시리아가 납작한 배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냥 먹고 싶은 게 조금 더 늘었고 음식을 섭취하는 양이 조금 늘었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아이는 어떻게 키우지?”
자신처럼 그저 내버려둔다고 자라진 않을 거다.
굶지 않게 꼬박꼬박 먹을 걸 챙겨주고 옷을 입혀주고 그저 부모가 같이 있어 주면 되는 건가?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 걸까.
밤만 되면 잠이 제대로 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다. 그러다 낮에는 또 잠이 너무 많이 와서 낮잠을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잘 모르겠네.”
누군가는 부모에게 받은 대로 아이에게 해준다고 하는데, 오시리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받은 게 없으니 해줄 것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 잘못된 일일 게 분명하다.
“책, 책이 필요해.”
침대 위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던 오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뛰지 말라는 소리를 하도 들어서 옛날처럼 달리지도 못하게 됐다.
“메리!”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오시리아가 배에 힘을 주며 메리를 불렀다.
다다다닥.
어디선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 전체에 카펫을 깔아둬서 소리가 크게 나진 않지만 말이다.
“가고 있어요! 시리 님!”
계단을 뛰어오른 듯 메리가 헉헉거리며 코앞에 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려갈 걸 그랬다. 오시리아가 어색하게 웃는다.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이가 나올 것 같나요? 메디르 님을 불러올까요?!”
“어…….”
메리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무리 모르는 게 많아도 이 정도는 안다.
예를 들어서…….
“적어도 아이가 삼 개월 만에 나오진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메리…….”
“아! 죄송합니다. 저는 또 조산이신가 괜한 걱정을…….”
“음, 메디르에게 듣기론 이제 막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을 거라던데……. 조산은 좀…….”
은퇴하겠다는 메디르에게 페델리우스가 매달렸다. 은퇴해도 부르면 와달라는 말에 메디르는 다른 좋은 의원을 소개해준다며 페델리우스를 다독였다.
물론, 전혀 효과는 없었다는 게 문제지만.
결국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와서 간단한 교육을 해주고 몸 상태를 봐주기로 약속했다.
메디르와 페델리우스의 극적인 협상 타결이었다. 대신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부르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오시리아도 처음 보는 의원보다는 아는 사람이 편하긴 하지만…….
‘이 집에 살아달라고 한 건 좀 심했지.’
저택 사람들 모두가 메디르를 붙잡아놓으려고 매달렸다.
몰래 도망가려다 걸려서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다. 페델리우스와 합의하기까지 메디르가 고생을 많이 했다.
“헤헤, 아기씨인지 도련님인지는 몰라도 아기가 태어난다니 너무 기쁘네요.”
메리가 언제나처럼 몽실몽실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오시리아도 마주 웃어줬다.
“그럼 어쩐 일로 부르셨어요?”
“나 책이 필요한데. 아기를 어떻게 키우는지 알려주는 책. 혹시 집에 없어?”
오시리아가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메리가 인상을 확 찡그린다. 고민하는 듯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이내 그녀가 손뼉을 짝 쳤다.
“아, 그거라면 주인님 서재에서 본 것 같아요.”
메리가 번뜩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정말? 가져다줄 수 있어?”
“으음, 하지만 주인님 개인 서재라서요.”
“내가 말해둘 테니까 그냥 가져다줘. 페델리우스도 아기 때문에 고민했나 봐.”
오시리아가 퍽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매번 기대감에 찬 얼굴로 허리를 붙잡고 끙끙 앓더니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가져올게요. 앉아 계세요. 아, 시원한 음료는 어떠세요? 오늘 들어온 레몬이 아주 신선해요.”
“달콤하게 해주면 좋아.”
“알겠어요. 루덴에게 전하고 올게요.”
메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찾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아콰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메리보다도 머리통 하나가 더 커진 아콰는 페델리우스와 비교해도 키 차이가 없다.
“안녕.”
“네, 레몬주스를 만들까 하는데 아콰도 드실래요?”
“뭔데? 맛있어?”
“음, 네. 달콤하게 하면 맛있어요.”
“그럼 좋아.”
아콰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메리가 알겠다며 옅게 웃는다. 이렇게 보니 사이가 퍽 좋아 보였다.
“그럼 아콰도 여기 계세요. 다녀올게요.”
“혼자는 힘들잖아? 도와줄게. 인간은 연약하니까.”
팔짱을 낀 아콰가 말했다. 메리가 낮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책과 음료 두 잔을 가지고 오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진 않지만, 사양하진 않을게요. 혼자는 심심하니까요.”
“좋아.”
아콰가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메리보다 한 걸음 먼저 앞서 나간다.
“아, 주인님!”
“응?”
나가던 아콰가 불쑥 고개를 들이민다. 졸지에 길이 막힌 메리가 눈을 멀뚱멀뚱 깜빡이다가 슬쩍 비켜섰다.
“메리도 같이 마셔도 돼요? 레몬주스인가 뭔가요.”
“아니, 아콰! 전 괜찮…….”
“당연히 돼.”
오시리아가 담담히 대답했다. 어려울 것도 없다.
셋이서 먹는 게 그다지 나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이 계급이라는 건 오시리아에게 달갑지도, 내키지도 않으니까.
“그럼 다녀올게요, 주인님!”
“응, 잘 다녀와.”
어른이 됐는데도 무척 발랄하다. 가끔은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페델리우스가 어린아이처럼 손을 붕붕 흔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딱 그런 느낌이다.
“날씨 좋다.”
이런 날은 나가서 놀고 싶은데.
페델리우스는 같이 산책하러 나가는 게 아니면 무척이나 불안해했다. 식사도 아주 옆에 딱 붙어 앉아 떠먹일 기세였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돌봐주는 게 좋으면서도 부끄러웠다.
“주인님, 다녀왔어요!”
창밖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오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열려있던 문이 완전히 젖혀졌다.
“책도 가져왔어요, 시리 님.”
“응, 고마워.”
책은 메리가 들고 아콰가 허공에 레몬주스 세 잔을 능력으로 띄우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탁자 위에 음료와 책을 내려놨다.
“아이를…….”
제목을 따라 읽던 오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법]
그녀는 메리가 페델리우스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끝이 닳아버린 책은 꽤 두꺼웠다.
그리고 조금 오래되어 보이기도 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 고민한 거야?’
알게 된 지는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같다.
“페델리우스는 의욕이 엄청난가 봐.”
페델리우스는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떤 아이로 기르고 싶은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중간중간 종이 끝을 살짝 접어놓은 곳도 있다. 오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느릿하게 책장을 넘겼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 책을 읽는 데 큰 문제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게요. 훌륭하게 키우고 싶으신가 봐요.”
“나는 그냥 잘 키우기만 바랐는데.”
페델리우스와는 또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그녀는 그저 자기와 같은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그저 아이가 행복하다고 느끼길 바랐다.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그래도 이렇게까지 공부하고 있다니 신기하다.”
“그러게요. 이렇게 공부하시는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오시리아의 말에 메리가 맞장구쳤다.
“나도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책을 읽는 건 그다지 취미는 아닌 것 같지만, 메디르가 말하길 노래를 많이 듣고 좋은 걸 자주 보고 책도 많이 읽는 편이 좋다고 하니까.
“일단 얼음이 녹기 전에 주스부터 드세요.”
“응, 같이 먹자. 메리도, 아콰도 얼른 앉아.”
오시리아가 책을 탁자 옆으로 밀어두며 말했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법]
살짝 손때가 탄 가죽 표지의 제목이 영롱하게 빛났다.
* * *
“다녀왔습니…….”
낮에 나갔던 페델리우스가 저녁이 다 되어 돌아왔다.
수박 두 통을 어깨에 짊어진 채 말이다. 이걸 구하겠다고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간신히 구해서 가지고 왔지만, 시간이 생각보다 늦어 있었다.
“어, 페델리우스. 왔어?”
촛불을 켜놓고 달빛 아래에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법]을 읽고 있던 오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진홍색 머리카락에 페델리우스가 수박을 한쪽에 내려두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고개를 숙여 오시리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다가 부족하다는 듯 볼에도 입을 맞추고 이윽고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아!”
오시리아가 통증에 작은 신음을 흘린다. 그러면서도 페델리우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가 주는 고통은, 사실 고통이라고 표현하기도 그렇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다.
자신을 해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상처 주는 모든 이들에게 이를 드러냈던 예전의 오시리아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물론 몇몇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지만.
“보고 싶었습니다.”
“응, 나도.”
오시리아가 손을 뻗어 페델리우스의 볼을 쓸어내렸다.
페델리우스가 눈을 감은 채 오시리아의 손길을 느낀다.
그녀가 볼을 감싼 손을 천천히 내려 페델리우스의 목덜미를 붙잡아 눌렀다.
페델리우스의 얼굴이 한층 더 밑으로 내려온다.
오시리아가 페델리우스의 입술을 훔쳤다.
“뭘 사온 거야?”
“먼 남쪽에서 들어온 과일이라는데 굉장히 달고 차가운 곳에 뒀다가 먹으면 아주 시원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난생처음 보는 모양새이긴 하다.
오시리아가 눈을 슬쩍 굴리다가 페델리우스를 향해 웃었다.
“고마워.”
“지금 잘라 올까요?”
“음, 아니…….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
오시리아가 느릿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먹고 싶었을 때 바로 가져다 줬으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게다가 아까 레몬주스를 먹어서 그런지 과일 생각이 싹 사라졌다.
레몬이 시큼해서 입맛에 딱 맞았었다. 페델리우스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속상해하겠지만.
“저녁도 먹어서 배도 부르니까 내일 먹자.”
“알겠습니다.”
페델리우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축 처진 눈매를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페델리우스가 오시리아를 끌어안으려다 한 걸음 물러난다.
“페델리우스?”
“잠시 씻고 오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아, 응. 밥은 먹었어?”
“대충 먹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찍 주무셔야 하니까 얼른 씻고 같이 자죠.”
페델리우스가 말을 남기더니 욕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오시리아가 손을 저어 둥글고 큼직한 물방울을 만들었다.
그걸 움직여 페델리우스가 가져온 과일을 집어넣었다.
커다란 물로 만든 공간에 들어간 과일을 보던 오시리아가 물의 온도를 한껏 낮췄다.
얼지는 않을 정도지만 얼음물만큼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오시리아가 책장을 맨 앞으로 넘겼다.
대충 어떤 내용인지 훑어봤으니 이제 집중해서 천천히 읽을 시간이다.
그녀가 첫 장을 넘겼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그 첫 번째 방법.>
아이에게 어린이를 위한 책을 많이 읽어주세요. 이때, 여러 사람이 각자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해주면 정서 발달에 더욱 좋습니다.
추신! 이때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읽어주면, 더욱 진한 정서적인 교감이 가능합니다.
책을 많이 읽어주라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책을 읽어주는 건 무리다. 지금 뱃속에 있는 애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리도 없고.
‘아, 근데 메디르는 노래도 좋은 거 듣고 책도 많이 읽어주라고 했는데…….’
그건 왜 그래야 하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오시리아가 복잡한 시선으로 책을 내려다본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모르겠다.”
그녀가 다시 글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페델리우스가 책을 가져다준 적이 있지.’
그건 누가 봐도 어린애들이 읽는 동화책이었다.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페델리우스가 나름대로 저를 위해 애썼다는 건 알겠다.
‘심지어 무릎에 앉히려고 한 적도 있지.’
그건 자존심이 상하긴 했다. 보통이 아니라 무척 많이 상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이 책이랑 좀 많이 비슷하네.’
무심하게 생각한 오시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연히 겹친 게 분명하다. 설마 이 책을 보고 제게 책을 가져온 건 아닐 테니까.
“그냥 책을 많이 읽어주면 되는 거지?”
페델리우스에게 저번에 던져버렸던 동화책 다시 가져다달라고 하면 가져와 주려나? 오시리아가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페델리우스가 원하는 대로 훌륭한 아이를 키우려면 책을 많이 읽어줘야 하는 모양이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오시리아가 몇 장 더 넘겼다.
뒤쪽으로는 어떤 식으로 아이에게 글을 읽어주면 좋은지, 목소리는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은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를 아이가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흠흠!”
헛기침을 한 오시리아가 목을 매만졌다.
그녀가 두 번째 장을 넘겨 시선을 내렸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그 두 번째 방법.>
하루에 한 시간! 아이에게 투자하세요.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세요. 그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각종 놀이를 함께 해주세요.
인형극이나 공놀이, 인형 놀이나 흔들 목마 등은 아이에게 아주 좋은 경험이 된답니다.
추신! 아이는 함께 놀아주는 사람을 훨씬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답니다. 최근 아이와 사이가 서먹하다면 무엇보다도 이 두 번째 방법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느릿하게 글자를 읽어내려가던 오시리아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우연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왜 우연이 두 번이나 겹치는 걸까?
“인형극…….”
인형극엔 끔찍한 기억이 있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이다. 얼마나 끔찍하냐면 그때 생각만 하면 페델리우스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싶은 심정이다.
페델리우스는 두 번이나 오시리아에게 인형극을 보여주었다.
한 번은 손가락에 끼워서 연극을 하는 인형극, 또 한 번은 직접 사람이 옷을 입고 하는 인형극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는 결코 알맞지 않았다.
한번은 공놀이는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온 적도 있었지.
모든 것들이 책과 겹친다. 그녀가 한숨을 푹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싸한 느낌이 등을 쿡쿡 찌른다.
달칵.
“오시리아? 뭐 하십니까?”
욕실 문이 열리고 페델리우스가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물어왔다. 오시리아가 책을 덮었다.
“책을 읽었어.”
“아, 책을 읽으셨습니까?”
“응.”
고개를 끄덕인 오시리아가 페델리우스를 쳐다본다. 페델리우스가 싸한 기분에 미간을 좁힌다. 어쩐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의 발걸음이 곧장 오시리아에게 향했다.
“오시리아, 괜찮으십니까?”
“페델리우스.”
“예, 말씀하십시오.”
페델리우스가 말했지만, 오시리아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책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책 표지를 페델리우스의 앞에 들이밀었다.
의아한 표정을 한 페델리우스가 한 걸음 물러난다. 아무래도 책 표지를 너무 가까이 들이댄 모양이다.
책을 본 페델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이건 어떻게…….”
“난 네가 우리 아기를 위해 공부한 줄 알았거든.”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갓난아기보단 조금 더 자란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적어도 갓난아기에게 인형극을 보여주고 책을 읽어주라는 말을 먼저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오시리아도 잘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그랬다.
게다가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공부를 한 흔적이 있다. 오시리아와 페델리우스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딱 일주일 전이다.
페델리우스는 시간 대부분을 그녀의 곁에서 보냈다. 그녀의 곁에 없을 때는 황성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가 언제 저렇게 열성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있었을까? 오시리아가 생각하기엔 여러모로 무리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떠오르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말이 없는 오시리아를 보며 페델리우스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숨을 삼켰다.
“너, 이거 언제 샀어.”
오시리아가 눈을 매섭게 뜨며 페델리우스를 쳐다봤다. 페델리우스가 입을 열지 못한다.
그녀가 ‘너’라고 부르는 일은 무척 드물다. 보통은 페델리우스든 페데리야든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니까.
“오시리아, 이건 말입니다…….”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연다. 변명이라도 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책을 언제 샀냐고 물었을 뿐이었으니까.
“너. 인형극도, 동화책 가져다준 것도 전부 이거 보고 한 거지?”
오시리아의 기세가 무섭다. 평소보다 훨씬 더 무섭고 날카롭다. 그가 숨을 삼킨 채 고개를 숙였다.
“그게 아닙니다.”
“날 훌륭한 아이로 키우려고 했구나?”
페델리우스의 몸이 굳었다. 사실 그때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훌륭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기보다는 잘해주고 싶었다.
“좋아, 할 말은?”
“예?”
“열 자 이내로 요약해서 말해봐.”
“잘못했습니다. 오시리아.”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사과 한마디로 끝나기엔 이미 그녀의 마음은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나 집 나갈래.”
미소 띤 오시리아의 말에 그가 입을 다물고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방금 결정했어. 나 아이는 혼자 키우기로 했어. 너, 따라오면 가만 안 둬.”
이를 한껏 드러내고 으르렁거린 오시리아가 곧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페델리우스가 황급히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능력을 써서 날아가는 오시리아를 잡기는 무리였다.
‘신전 방향…….’
페델리우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늦은 밤, 페델리우스는 울상을 지은 얼굴로 달렸다. 그의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될 정도로 빌고 빌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페델리우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책을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신전에 아예 제 방을 만들어놓고 살기 시작한 오시리아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문턱이 닳아 없어지도록 쉼 없이 들락날락해야 했지만 말이다.
페델리우스가 가져온 과일을 오시리아의 앞까지 날라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열심히 깎아준 지 삼 개월쯤 된 후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