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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메멘토 모템 (3/203)


3화 메멘토 모템
2021.10.04.


“X발!”

더티 블론드의 젊은이가 바닥의 모래흙을 한 움큼 허공으로 뿌리며 소리쳤다. 기름을 먹인 가죽 갑옷은 흙먼지 탓에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그런 지저분한 몰골로 날뛰던 그를 어느 틈엔가 나타난 거구의 남자가 막아섰다.

“제라드 님, 진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진정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이나!”

약간이나마 이성을 되찾은 제라드가 고성으로 응수하며 눈앞의 남성을 노려보았다. 제라드는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물었다.

“발스톡! 어째서 스크롤을 사용했지?”

발스톡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스크롤에 기록되어 있던 마법은 ‘이스케이프’, 즉 탈출 마법이다.

몇 백이나 되는 숫자는 역시 무리지만, 시전자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함께 이끌고 탈출이 가능하다. 제라드는 지금 그 사실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저히 모두가 함께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제…… 아니, 왕자님.”

“이미 형님들은 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간 사실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어!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을 잃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머리가 식을수록 심장은 더욱더 타올랐다.

발스톡이 주인인 자신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덕분에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그를 책망하는 게 옳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고…… 제라드는 아파 오는 머리 때문에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발스톡에게 부끄러울 정도로 의미 없는 대화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모든 일이 틀어졌다는 사실이 제라드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리고 그건 대체 뭐냔 말이야!”

“저도 그런 아티팩트는 처음 봅니다. 단독형이나 기생형 아티팩트가 그런 일도 가능합니까?”

발스톡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둘 다 아니야. 공생형이다.”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제라드가 조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던전에서 발굴된 아티팩트는 수십 종류가 넘으나, 그것을 분류하는 기준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아티팩트와 소유자 간의 관계를 주도하는 게 어느 쪽이냐는 것.

제라드가 말했다.

“단독형은 현존하는 아티팩트 중 숫자도 제일 많고, 사용자의 의지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방식이라 사용하기도 가장 간단하지. 기생형은 단독형보다는 강력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소유자가 죽어 버리면 아티팩트 자체도 함께 파괴되어 버려. 하지만 공생형만큼은 다르다.”

발스톡은 제라드의 눈에서 불꽃을 본 것 같았다.

“너도 봤겠지? 죽은 육신으로부터 부활하는 그 자식의 모습을. 그 어떤 일반적인 아티팩트도, 심지어 기생형조차 소유자가 죽은 상태에서 그렇게까지 자율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어.”

발스톡은 그 말을 듣고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티팩트의 관계가 공생형, 즉 상호의존형인 데다 소유주를 마음대로 살려 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아티팩트는 혹시…… 순간 그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발스톡은 잡생각을 지우려는 듯 고개를 몇 번 흔든 뒤 제라드에게 말했다.

“부활하는 모습은 저도 잘 봤습니다만, 제아무리 아티팩트가 강력할지언정 던전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까지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긴 어렵군요. 아마 확실히 죽었을 겁니다.”

발스톡이 말했다. 아티팩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는 불명이지만,

그들이 있었던 장소는 최소한 지상으로부터 아래로 100m 이상은 되는 깊이다. 빠져나온다는 건 맨손으로 산을 옮긴다는 소리와 동급이다.

“일이 그렇게 쉽게 굴러간다면 좋겠지만…….”

제라드가 말끝을 흐렸다. 스테치가 부활하는 것을 보았지만, 무너지는 던전 안에서 그가 다시 죽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제라드에게는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현재 아무런 동원 병력이 없는 그로선 혹시라도 살아남았을 스테치를 잡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일단 수도로 돌아간다! 가면서 아버지께 말씀드릴 변명거리나 생각해 두는 수밖에…….”

등자를 밟고 올라가 안장에 앉은 제라드가 잠시 생각하더니 발스톡에게 말했다.

“자네는 근처 마을마다 스테치 아텔리어의 수배를 걸어두고 오게. 군수품을 빼돌려 도망쳤다는 식으로, 현상금은 너무 높지 않게.”

“수배지를 돌리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괜히 눈에 띄는 내용이 되어선 안 된다. 언젠가는 들키더라도 던전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 지금 드러나선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무단으로 던전 발굴에 나선 주제에, 그나마 아티팩트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타국으로 퍼지든 국내로 퍼지든 절대 좋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이다. 발스톡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동굴.

희미하게 들리는 폭포와 흐르는 강물의 소리만이 종유석들 사이에 어우러져 퍼지고 있었다.

툭.

강물에 떠밀려 온 무언가가 강 한가운데에 삐죽 튀어나온 바위에 걸렸다.

통나무처럼 굳어 있던 그것은 그 충격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이리저리 수류에 흔들려 이동하다가 강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그대로 물길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강가까지 밀려나 자갈과 모래가 반겨줄 때 즈음, 절묘한 타이밍에 그것은 눈을 떴다.

“푸허허억! 콜록!”

스테치는 갑작스레 크게 숨을 들이켜다가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기침했다.

대량의 물을 토해 낸 그는 눈을 떴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며 몸을 뒤집었다.

바닥을 짚은 채 주먹을 쥐자 젖은 모래가 손가락 틈새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 몸 전체가 산꼭대기에서부터 굴러 내려온 듯한 격통으로 쑤셔왔다.

덕분에 스테치는 의식을 되찾은 뒤로도 한참을 혼란스러워했다.

‘……아파!’

물에 빠졌던 건가? 저 멀리 어딘가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추위로 몸이 벌벌 떨렸다. 한참을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끙끙대던 스테치는 여기저기에서 종유석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동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어두운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왼손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왔다.

왼손의 가운데 손가락 마디 끝까지 깊게 끼워져 있는 은색의 반지. 반지의 둘레를 따라 유려한 필체로 새겨진 문구 부분에서부터 음산한 녹색의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스테치는 멍한 눈으로 음각된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틀림없다. 던전에서 구한 그 아티팩트다.

‘이 반지가 왜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 야비하기 짝이 없는 제라드에게 속아 넘어가 자신도 모르게 반지에 손을 댄 직후…… 직후에……

그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스테치는 곧 떠올렸다. 산 채로 몸이 타들어 가던 그 고통부터, 죽음과 직면한 때에 느꼈던 공포까지.

‘죽었어……? 내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절망감이 파도처럼 스테치의 전신으로 엄습해 왔다.

그는 한 번 ‘죽었었다.’. 전신을 남의 것처럼 쇼크로 뒤흔들면서, 의식이 끊어지던 그 순간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일까.

스테치의 몸이 오한으로 부르르 떨렸다.

“…….”

역시, 생각하는 건 나중이다.

제라드의 손에 진작 넘어갔어야 했을 아티팩트가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는 이유도 모르겠고, 죽었을 자신이 버젓이 살아 있는 이유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인 스테치는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은 뒤 탈출구를 찾기 위해 스킬을 사용했다.

“애니멀 인스팅트.”

『거부한다.』

“응? 아아아악!”

빠지직-!

스테치가 자기도 모르게 묻는 순간, 강한 충격이 다시금 전신을 휘감아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의 그것과 똑같진 않지만, 여전히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스킬 시전에 실패하는 상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스킬을 시전할 체력이 부족하거나, 또는 능력에 걸맞지 않은 스킬을 사용하려 들었을 때. 이 현상은 후자에 따른 패널티였으며, 그렇기에 스테치의 머릿속은 고통보다도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거부’라고?

“이, 이게 뭔…….”

『스테치 아텔리어.』

“으아악!”

스테치는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기절할 만큼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귀가 아닌 머리로 직접 전해지는 듯한 그 목소리는 절대 환청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테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머릿속 목소리는 근엄하게 말을 이어갔다.

『패시브 스킬 《리스트레인드 소울》로 널 살려 냈다. 그 외에 추가로 이것저것 사용하느라 네 신체에 스텟 다운이 걸린 거고.』

“스텟 다운? 리스트레인드 소울?”

들어본 적도 없는 스킬명 이었다.

스테치는 머릿속 목소리의 말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말인가? 추측건대 스킬 사용이 불가능한 것은 방금 언급된 스텟 다운의 영향 탓이리라. 갑자기 목소리가 힘주던 것을 멈추고는 윽박질렀다.

『쉽게 말해 너 때문에 이제 힘 좀 빠졌다 이 소리야, 멍청아. 슬슬 정신 좀 차리시지?』

“너, 넌 대체 누구야? 왜 내 머릿속에 있는 건데?”

『메멘토 모템.』

목소리만 들려오는데도 불구하고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오는 듯했다.

『내 이름은 메멘토 모템이다.』

메멘토 모템.

소유주라는 표현에 스테치는 무심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는 스테치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반지는 그저 밝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던 스테치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반지 낀 손을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탐험가로서 경험을 쌓기 시작한 후부턴 주로 스킬에 의존하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그렇다고 경험과 기술 자체가 낡아진 것은 아니었다.

강물과 바람이 흐르는 방향으로 출구를 유추한 스테치는 반지를 광원 삼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또한, 포켓과 배낭에 들어 있던 장비는 대부분 상태가 전부 엉망이었기 때문에, 써먹을 만한 물건을 제외하고는 미련 없이 전부 버려 버렸다.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문 채 반쯤 타들어 간 부츠를 질질 끌며 걸어가던 스테치는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 너는 아티팩트 그 자체란 말이지.”

『그래.』

“다른 모든 아티팩트도 너 같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나?”

『당연히 없지.』

칼 같은 대답이다.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널 가지고 뭘 할 수 있지? 사용할 수 있는 고유 스킬은 얼마나 되고?”

부활 관련 어빌리티가 없는 자신을 살려 냈다는 건 어쨌든 이 아티팩트를 통해야만 사용 가능한 스킬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스테치가 아는 한 고유 스킬이 하나라도 각인된 장비는 일반인들로선 꿈도 못 꾸는 가격으로 거래되곤 한다. 그러므로 이 반지가 생각보다 괜찮은 스킬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최악의 경우엔 팔아치워 돈을 마련하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때마침 출구의 빛을 발견한 스테치가 바위 하나를 기어오르던 차에, 목소리가 말했다.

『전 기능이 정상인 상태라면 대충 40개 정도는…….』

“어?!”

스테치는 경악하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인간이 일평생 혼자 힘으로 습득 가능한 스킬이나 마법의 개수는 많아야 10개 안팎. 인챈트 장비를 둘둘 말아도 20개 정도가 한계다.

그런데 아티팩트 하나로 사용 가능한 스킬의 수가 저렇게나 많다고? 온 세상을 다 뒤져봐도 이런 물건의 값을 치를 이는 없다고 생각한 스테치는 후크를 걸고 다시 바위를 오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 그래. 엄청나게 많긴 하네. 그런데 내가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단 하나도 없는 건가?”

『있긴 하지만 널 부활시키느라 마력이 깡그리 날아갔거든, 일단 그것부터 채우면 이야기하지.』

마력…….

그러고 보니 이 반지는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던 그 순간부터 마력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해 왔었다.

아무래도 이 아티팩트는 기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만 막대한 마력을 소모하는 모양이다. 체력과는 별개로 계산되는 개념인가?

바위를 다 오른 스테치는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동굴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바라보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집으로 돌아가서 향후 계획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스테치가 조금은 들뜬 발걸음으로 출구에 다다른 순간,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 울렸다.

『아, 이제 12시간 남았다.』

“뭐가?”

『너가 뒈지기까지.』

그것은 스테치를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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