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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다짐 (5/203)


5화 다짐
2021.10.06.


“…….”

왕도로부터 6일 거리.

제라드는 몹시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베네지아 왕가는 현재 왕인 신체루스의 아래로 첫째인 랍토레스, 둘째인 알프레드, 그리고 셋째인 자신이 있었다. 당연히 왕위 계승권은 기본적으로 장자인 랍토레스에게 우선시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상이라 그러지 않았던가? 제라드와 차남 알프레드는 어떻게든 자신들이 장자보다 우월하며, 왕위를 계승하기에 적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당연히 이번 아티팩트 발굴 작업 또한 그의 일환이었는데, 하필 이런 식의 결말을 맞이할 줄이야.

머릿속이 복잡해진 제라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고, 함께 말을 타고 뒤에서 달리던 발스톡은 제라드의 옆으로 이동하여 속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 점쟁이 놈 생각 중이다.”

제라드의 말에 발스톡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가 점쟁이라고 한다면 왕국 전체를 통틀어 한 사람밖에 없다.

“알프레드 왕자님의 부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콘라드라고 했던가? 그 쓰레기 자식…… 일부러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제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발스톡은 입을 다물었다.

왕자들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아티팩트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콘라드 또한 그중 하나에 속했다.

그에게는 불완전하긴 해도 미래 예지가 가능한 아티팩트가 있었고, 이는 안 그래도 머리 좋은 알프레드를 더더욱 완벽하게 만들어 주었다. 제일 만만한 랍토레스 왕자부터 몰아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알프레드와 손을 잡은 제라드는, 이번 던전 탐험을 위해 콘라드의 힘을 빌어 미래 예지를 통해 아티팩트에 강력한 저주가 걸려 있음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뒷부분을 보여 주지 않았던 거군요.”

“모르지. 놈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이제 나로선 어찌할 방법이 없다.”

제라드는 분을 삭이다 못해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콘라드는 알프레드의 부하임으로 터치도 불가능. 아티팩트 발굴 계획조차 왕의 제대로 된 승인 없이 강행한 본인의 독단.

성공했다면 아티팩트를 2개나 보유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입지가 크게 올랐겠지만, 실패한 이상 제라드는 함부로 왕국의 던전에 손을 댄 사고뭉치에 불과했다. 현재로선 그저 한시라도 빨리 성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자님. 전장에선 이보다 더 곤란한 일도 수없이 겪으셨잖습니까? 잘 해내실 겁니다.”

발스톡이 말했다.

제 3 왕자로서 다른 형들보다 늦게 태어난 제라드는, 위의 두 형들만큼은 아니더라도 태어난 이후부터 숙청과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면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안전과는 거리가 먼 국경의 전쟁터뿐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제라드는 전장에서 만난 발스톡의 보좌를 받으며 국경선 근처의 크고 작은 외침을 몇 번이고 막아 냈고, 병사들로부터 큰 지지와 호응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국경선에 배치된 병사와 장군들은 그야말로 실전으로 단련되고 솎아 내어진 강골들. 이런 핵심 인물들을 포함한 군부의 큰 지지와 신뢰 덕택에 제라드는 왕족들 사이에서도 떳떳이 버티고 설 수 있었다.

발스톡의 말에 제라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정치질 따위가 직접 칼을 맞대는 것보다도 힘들다니,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군. 어쨌든 고맙네.”

발스톡은 전투가 끝났을 때보다도 피곤해 보이는 왕자의 말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만 푹 숙였다.

* * *

푸스스스스-

산산조각이 난 그레이트 울프의 파편, 심지어 스테치와 주변 지형물을 뒤덮고 있던 혈액조차 전부 먼지처럼 작게 분해되어 갔다.

마치 보석을 으깨어놓은 듯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이 가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쪼개진 뒤 안개처럼 변하여 스테치가 낀 반지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는 광경에 스테치가 물었다.

“이걸로 된 건가?”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걸로 됐어.』

“휴…….”

스테치는 몸의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고는 해도, 가만히 있었다면 진짜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역시나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흐르던 땀이 말라붙고 희미하게 하늘이 밝아지려 할 때쯤이 되어서야, 스테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당장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고 나니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확인하기 전까지 속단은 금물이지만, 만약 왕족이 진짜로 수배령을 내렸다면 어딜 가든 대놓고 돌아다닐 수는 없겠군. 그렇다면 문제는 대체 어디에서 재보급을 하느냐는 것인데…….’

스테치는 생각했다. 그에겐 아티팩트가 있으니 최소한 한 번쯤은 누가 쫓아올지언정 절대적으로 그것을 뿌리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현재의 반지는 다재다능하고 위력도 강력했지만, 그놈의 낮은 마력 한도가 문제였다. 고작 그레이트 울프 하나를 잡아서 15퍼센트나 충전될 정도로 용량이 작은 주제에, 스킬은 세 번 정도만 사용해도 동나 버릴 지경이니 말이다.

스테치는 직업의 특성상 장기간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닌다.

필요하면 숙박업소에 일주일 정도의 숙박비를 미리 지불한 뒤 볼일을 끝마치고 일을 찾아 떠나는 방식. 이번엔 던전과 가장 가까운 마을 근처의 헛간을 빌려 짐을 풀어두고 왔으니, 스테치로선 싫어도 일단 마을에 들러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뜨고 싶었다.

‘아직 날이 밝진 않았으니 지금 몰래 들어가서 짐만 챙기고 나와야겠어.’

스테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을은 위치가 던전에서 가까운 데다 근처의 작은 광산을 중심으로 발달해서 그런지, 경계가 삼엄하다. 심지어 마을 자체가 근방의 던전을 관리하는 역할 또한 맡고 있기 때문에, 소규모이긴 해도 훈련받은 병사들 또한 던전 순찰대원으로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곳을 무슨 수로 들어갈 수 있을까?

마을의 입구 근처까지 온 스테치는 수풀 뒤에 숨은 채로, 오는 도중 뜯어 온 식물들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쥐오줌풀과 플레멘스.

둘 다 다년생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쥐오줌풀은 천연 수면제이며, 플레멘스는 그것 자체로는 아무 역할도 못 하지만 다른 재료와 조합 시 효능을 강화시켜 주는 기능이 있다.

몬스터를 상대로 하면 통하지 않는 데다, 준비 과정이 번거로워서 일반적으론 쓰지 않는 수단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스테치는 조심스럽게 부싯돌을 튀겨 쥐오줌풀 뭉치에 불을 붙인 뒤, 곱게 으깬 플레멘스를 더하고는 마을 방책 너머의 경비 막사 뒤쪽을 향해 던졌다.

쥐오줌풀 자체는 태워 봤자 의미도 없지만, 플레멘스의 효과가 더해진다면 태울 때 생성되는 연기로 사람을 재울 수 있을 정도로 강화시킬 수 있다.

“뭐야, 이 냄새는?”

“야,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찾아봐!”

막사 부근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던져 넣은 탓에, 경비들은 쉽사리 냄새의 근원지를 찾지 못하고 헤맸다.

털썩-

쿵!

새벽녘이라 방심하고 있던 경비들이 킁킁대며 쥐오줌풀의 냄새를 맡게 된 지 몇 분 후, 차례대로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풍향이 적절했던 것도 한몫했다. 옷가지들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있던 스테치는 정문을 통해 슬쩍 마을 안으로 진입했다.

『머리 좋은데?』

‘훗, 그렇지. 너도 이걸로 조금은 날 다시 보게…… 응?’

들어가는 와중에 스테치가 마을의 공문을 붙여두는 게시판을 흘끗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웬 사내의 얼굴이 커다란 ‘수배 중’ 문구와 함께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그려져 있진 않았지만, 그려진 복장과 특징 묘사를 보면 영락없는 스테치였다.

스테치 본인의 얼굴에 별다른 특징이 없다는 것과 전문가가 그리지 않은 탓에 수배지 묘사가 조악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나마도 자세히 살펴보니 포상금은 고작 400크라운에 불과했다.

“이런 개…….”

수배지를 보던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가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깬 사람은 없었다. 오직 메멘토 모템이 미친 듯이 비웃고 있는 소리만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을 뿐.

‘아니길 빌었는데 정말 수배를 걸어놨네. 넌 나중에 두고 보자.’

제라드에 대한 악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꾹 눌러 참고, 스테치는 마을에서 후미진 곳에 위치한 헛간으로 이동했다. 헛간에 가득 쌓인 볏짚 속을 뒤적이자, 스테치의 커다란 짐배낭이 드러났다. 다행히 누가 손을 댄 것 같지는 않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스테치는, 배낭을 메고 들어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 나와 마을에서 빠져나왔다. 경비들이 일어날 때 즈음엔 마을에서 제법 멀어진 뒤였다.

“하아…… 진짜 큰일이네.”

제라드의 수배령이 하룻밤 사이에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대로라면 그는 영영 어느 도시나 마을에도 발을 들이밀 수 없게 되고 만다.

아마 나중엔 스테치의 은행 계좌 또한 정지될 것이 틀림없다.

‘아니, 차라리 저금은 깔끔히 포기해 버리자.’

반지 하나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무일푼 노숙은 문젯거리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스테치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자신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영원히 살아나갈 자신은 없다는 점이었다.

먹을 것과 쉼터는 알아서 마련한다 치더라도, 최소한의 방어구나 무기를 구하려면 역시 도시에 들어가는 수밖에는 없다. 가장 간단한 해결법은 왕국 자체를 뜨는 것이었지만,

‘이게 또 그냥 고분고분 떠나주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지.’

통상적이라면 일반인 신분인 스테치가 제라드 같은 놈을 상대로 복수 달성은 커녕 시도조차 못 하는 게 맞다. 그렇다고 순순히 도망만 치기엔 스테치가 겪은 배신감은 너무나도 컸다. 최소한 그놈의 속이라도 박박 긁어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복수를 하고 싶은 거야?』

“호구가 아닌 이상은 누구나 그럴걸.”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메멘토 모템의 질문에 스테치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하하! 이제야 좀 뭔가 재미있게 돌아가네. 그런 이유라면 나도 기꺼이 돕도록 하지.』

의기양양해진 목소리에 스테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넌 운이 좋은 줄 알아. 내가 돕기로 마음먹은 한 너는 천하무적이니까.』

“이제 스킬도 4개 밖에 못 쓰는 주제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스테치의 어처구니없어하는 말투에 메멘토 모템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내 고유 어빌리티인 《커스 이팅》은 저주와 마의 근원을 먹어치우는 거야. 그런 어빌리티가 왜 존재한다고 생각해?』

“모르겠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스테치는 문득 눈치챘다.

커스 이팅으로는 사기로 뒤덮여 저주받은 장비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그 말은 즉, 아티팩트 그 자체를 흡수할 수도 있단 소리였다.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난 너에게 힘을 빌려줄 수 있다, 스테치 아텔리어. 나를 도와서, 아티팩트를 모아라. 그럼 너의 복수는 내가 함께 이뤄 주도록 하지.』

스테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자신에게 죽음의 공포와 극한의 고통을 맛보게 한 제라드를,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복수를 바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그리고 스테치는, 이 달콤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야? 네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내 손으로 직접 제라드를 박살 낼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메멘토 모템이 단언했다.

『난 최강이니까.』

믿음직스러운 확답을 들은 스테치는 최종적으로 마음을 굳힌 듯, 다음 목적지를 정하기 위해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현재 그가 있는 왕국은 대륙 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왕국 연합 중 하나인 베네지아 왕국.

남부의 왕국 중에서는 제법 강대국에 속한다. 남부 왕국을 적대할 거라면 차라리 이참에 적대국인 북부의 크로마토스 제국으로 넘어가는 편이 확실하겠지만…….

‘아무리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만으로 지금 당장 특A급의 던전을 혼자 가기엔 무리가 있어…… 작은 던전부터 차례로 공략을 해나가는 게 맞겠지. 가장 가까운 던전은 서쪽에 있군.’

현재 베네지아의 본성이 있는 수도 알렌테는 스테치의 위치로부터 북서쪽.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쉴 틈 없이 걸어간다면 이틀 안에는 가장 가까운 던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너한테서도 던전의 사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시끄러.”

히죽거리며 말하는 듯한 반지에게 핀잔을 준 스테치는 지도를 가방에 쑤셔 넣은 뒤 가장 가까운 던전 옆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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