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재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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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재정비
2021.10.07.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 거래하실 때마다 패를 제시해 주셔야 하고요, 잃어버리시면 나갈 때 일부 짐을 압수 및 수색당하실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노인에게 보초는 노끈이 달린 나무명패를 건네준 뒤,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베네지아 왕국 남쪽의 던전 관리 마을, 클로드. 그 이름답게 크기가 큰 마을은 아니지만 병사도 일부 주둔 중인, 그야말로 적당히 큰 마을이다. 상점도 제대로 갖춰져 있고, 굳이 말하자면 도시가 되기 직전의 마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런 마을에는 말이야, 꼭 뒤가 구린 곳이 있거든.”
스테치가 풀숲에 숨은 채로 조용히 말했다.
“던전에서 가져온 보물들이라고 해서 백이면 백, 전부 그냥 현금화 하는 게 아니야. 정말 그럴싸한 건 따로 떼다가 암시장 같은 곳에 팔기도 하지.”
던전이 나라에 의해 관리 받고 있는 만큼, 던전으로부터 구한 보물들은 일정 액수만큼을 책정하여 세금으로 제한다.
저주받은 무기나 방어구들은 아예 트러블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압수. 하지만 그렇게 몰수된 장비들은, 폐기되기는커녕 그럴싸한 것들을 수집하기 좋아하는 어느 부자의 손으로 흘러 들어가곤 한다.
때문에, 암시장은 던전 탐험을 장려하기 위한 차원으로 모험가에게 유용한 여러 품목들 또한 팔고 있었다.
스테치의 설명을 듣던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그래서 굳이 저 마을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뭔데? 내 말 듣고 곧장 던전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멍청아, 던전에 들어가려면 탈출 스크롤은 기본이라고. 갔다가 죽을 일 있냐.”
스테치가 핀잔을 주었다. 던전이 아티팩트를 가져가려고 온 탐험가나 모험가들 편하게 탈출구까지 만들어 주진 않는 법이다.
탈출 마법 이스케이프는 일단 사용하면 시전자와 주변 인물들을 안전하다고 판단될 만한 장소까지 이동시켜 주기 때문에, 그 유용성을 인정받아 공급이 증가함으로써 가격대가 많이 하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죄자들의 손에까지 들어가는 건 곤란한 탓에, 그 판매 루트는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표면상의 이야기고, 가격은 더 비싸지만, 암시장에서도 일단 스크롤을 구할 수는 있지. 나처럼 정상적으로 구입할 수 없는 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루트야.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단 들어가는 게 먼저지.”
마을은 나무 기둥으로 철저하게 둘러싸인 탓에, 저번처럼 즉석으로 사람들을 재우기는 힘들 것이다. 스테치는 마을 입구를 뒤로하고 나무 기둥을 따라 마을 외곽을 돌기 시작했다.
“……찾았다.”
스테치가 바라보는 지점은 어느 통나무 외벽의 아래쪽.
마감이 잘 되어 있었고 수풀로 뒤덮여 눈치채기 힘들게 되어 있지만, 나무 기둥 하나의 아래쪽이 사람 하나 간신히 기어들어 갈 수 있는 미닫이문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마을 밖에선 열 수 없는 구조였다.
똑똑.
스테치가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고블린이 먹는 생선은 민물 농어.”
그러자, 쉬다 못해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암호는 3개월 전 암호인데?”
“미안 달튼, 여기 올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목소리를 알아들은 스테치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문이 벌컥 열렸다.
좁은 문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간 스테치가 몇 미터를 기어서 통로를 빠져나오자, 수염 더부룩한 남자가 스테치를 반겨 주었다.
“스테치! 이게 얼마 만이냐. 암호는 꼬박꼬박 외워 둬야지, 감시를 보던 게 내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야?”
반가움에 스테치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은 수염의 남성이 껄껄거리자, 스테치는 대롱대롱 매달린 채 말했다.
“덕분에 살았어. 워낙 급해서 다른 방법은 생각이 안 나더라고.”
사실 달튼이 아니었더라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암호의 정답 여부와 상관없이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스테치가 고아원을 떠나 처음 탐험가로 활동한 그 순간부터 이용해 왔던 장소인지라, 어지간한 암시장 관계자들과는 제법 오랜 인연과 신뢰를 이어왔던 것이다.
“정말 별일이군, 뒷구멍은 폼이 안 난다고 항상 정면으로 들어왔던 주제에.”
달튼이 길을 안내했다. 꽤나 널찍한 공간에 배치된 테이블이 스무 개 남짓. 좌석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과 드워프 몇몇이 함께 앉아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술집에 가깝지만, 경비에게 들켰을 때를 대비한 위장에 불과하다. 테이블 하나하나가 암시장 거래인들을 위한 좌판에 가까운 것.
“그나저나 그 수배지는 뭐야? 누구 물건을 훔친 건데?”
달튼이 카운터에서 파인트를 닦던 남자와 교대하며 스테치를 자리에 앉혔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의 가격은 경우에 따라선 백만 크라운이 넘는다.
스테치에게 걸린 400크라운 정도는 상인들 입장에선 용돈 거리로도 안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신경을 안 쓸 것이다.
“어쩌다 엮인 거지, 별일은 아냐. 자리 하나 써도 되지?”
“그럼.”
달튼의 물음을 어물쩍 넘긴 스테치는 주변을 둘러보며 배낭을 열었다.
마을까지 오면서 잡은 몬스터의 이빨이나 발톱, 가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스크롤을 살 정도의 벌이는 될 것이다. 물건들을 꺼내 놓자 사람들이 모여들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요즘 스크롤 가격은 얼마나 해?”
발톱 몇 개를 정력 증강제랍시고 비싸게 팔아치운 스테치가 달튼에게 물었다.
“여기서 구하면 600크라운.”
평소 저축을 해 온 스테치라면 우습게 지불할 가격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 정도조차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
앞으로 들러야할 던전이 여럿이니, 스크롤을 하나만 살 것도 아닌지라 더 문제였다. 순식간에 챙겨온 짐의 반절을 팔아치운 스테치는 잠시 고민한 뒤 달튼을 불렀다.
“돈 좀 빌려줘. 이렇게 팔아먹어가지곤 원하는 물건 사는 데에도 한 세월은 걸리겠어.”
“싫어.”
달튼이 코웃음치며 말하자, 스테치의 얼굴은 순식간에 죽상이 되었다.
그러자 달튼은 껄껄 웃으며 물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적어도 스크롤 4개 정도 살 정도는 필요해. 늦어도 이틀 뒤까진 갚을게.”
스테치가 말했다.
달튼은 지역 암시장을 관리하는 관리인 중 하나다.
스테치의 능력과 평소 벌이를 봐온 그가, 터무니없는 액수가 아닌 이상 스테치에게 그 정도 돈을 꿔 주지 않을 리는 없었다.
“못 빌려줄 건 없지만…… 너 그렇게나 상황이 안 좋냐?”
달튼의 질문에 스테치가 일순 멈칫했다.
제라드의 눈길을 끌 만한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아예 스테치가 직접 400크라운 정도를 마련해서 자기 현상금을 지불하고 깨끗해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런 짓은 자신의 위치와 생사여부를 대놓고 드러내는 꼴이었다.
적은 액수의 현상금조차 정리를 못 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달튼에겐 되레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훔쳤길래 그래?”
달튼은 신뢰하지만, 일국의 왕족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일이 커지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스테치는 짐짓 태연하게 한숨까지 쉬어가며 말했다.
“이름도 모르는 지방 영주네 철없는 아들놈이 재수 없게 굴어서 엿이나 먹이려는 거야. 400크라운이 아무리 꽁돈이라도 내가 자존심이 있지 순순히 내줄 수 있겠냐?”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스테치가 말했다.
별로 이성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자존심’이라는 키워드가 달튼에게는 그럴싸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노출할 필요 없이 따로 활동할 만한 자금이 필요해. 빌려준 돈은 확실하게 사례비까지 더해서 갚을게.”
“고작 400크라운 가지고 자존심 세우는 것도 그닥 현명해 보이진 않지만…… 뭐 그렇다 치자.”
킬킬대는 달튼이 말했다.
이틀 안에 네자리수 가량의 금액을 벌 생각이라면 던전 탐험밖에는 방법이 없다.
스테치의 실력이라면 빌린 돈을 갚는 건 큰 문제가 아닐 것일 테니 달튼이 마음을 굳히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스크롤 파는 놈들 중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쪽은 좀 싸게 받을 수 있을 거야.
달튼은 양피지 조각을 꺼내 대충 금액을 휘갈겨 계산해 보더니 물었다.
“더 필요한 물건은 없어? 옷이나 장비를 새로 맞추려면 저기 클라이드한테 물어봐. 지불은 내 이름으로 돌리고.”
“먹을 음식만 좀 구해다 줘. 난 가서 옷이랑 무기를 새로 구해야겠어.”
팔리지 않은 짐들을 다시 배낭 안에 쑤셔 넣으며 스테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라이드는 마을에서 한 명밖에 없는 드워프 대장장이였다.
문제는 드워프의 특성상 클라이드 또한 일반적인 무구 제작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독특한 미적 감각과 제작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온갖 괴이쩍은 작품들을 기꺼이 사용할 사람이 넘치는 암시장을 통해, 싸게 물건을 풀어 ‘테스트’를 진행하는 변태적인 짓을 벌여 왔다.
그런 탓에 클라이드의 장비는 꽝 아니면 대박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함께 나도는 중이었다.
“야, 클라이드!”
스테치는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어진 드워프에게로 다가가서 의자를 뻥 걷어찼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나뒹군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한 손으로 테이블을 더듬어 술병 목을 붙잡았다.
“이런 썩을…… 어떤 자식이 다짜고짜 시비…… 끄윽-!”
거하게 트림까지 하는 모습에 스테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낮부터 술에 쩔어서는.”
“……물건이 안 팔려. 이렇게 싸게 파는데도.”
우울한 표정이 된 클라이드가 술병을 휘두르려고 치켜올린 팔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스테치가 테이블에 놓인 무기들을 보니, 하나같이 무기라는 것을 모르고 보면 무엇인지 감도 안 잡힐 정도로 괴상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대충 안 팔리는 이유를 눈치챈 스테치가 딱하다는 눈으로 이 드워프를 내려다보고 있자, 클라이드가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검증이 안 된 놈들을 너무 풀은 탓 일지도.”
“그럼 그거 때문이네. 이봐, 그 말 들으니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스테치가 물었다.
“이 무기 중에 네가 가장 잘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건 어느 거야?”
“뭐? 사, 살 거야?”
일반적인 무기라면 모를까, 클라이드가 만든 작품들은 하나같이 이질적이다.
드워프들의 무기는 제작자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마법, 혹은 기계공학적인 기믹이 가미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더불어 클라이드의 것은 외형까지 독특하니, 트랩을 해체해 가며 기본적인 지식을 쌓은 스테치조차 감히 그의 어떤 무기가 좋고 나쁜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래서 스테치는 선택을 클라이드에게 맡겼다.
“비싸게는 안 사. 싸게 해 주는 대신 내가 시험 운용해 준다고 생각해. 던전에 가서 써먹을 만한 무기가 필요하니까, 하나 골라 줘 봐.”
스테치의 말에 클라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선 갑자기 술에 쩔은 드워프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진중해진 모습으로 돌변하더니, 스테치에게 물었다.
“무기는 본인한테 맞는 물건을 들어야 써먹을 수 있는 법이지. 체격도 건장하고 근육도 좀 있으니 여기 이 대검은 어떤가?”
스테치가 무기를 살펴보고 있자,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메멘토 모템이 코웃음 쳤다.
스테치가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자기만족만을 위해 무기를 만들던 놈이니까 저런 소리가 나오지. 좁은 통로가 대부분인 던전에서 대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그렇지.’
스테치가 납득하자, 메멘토 모템이 잠깐 뜸을 들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이 드워프 되게 특이하네. 마법적인 소양이 있어 보이진 않은데, 무기 안에 들어간 장치들은 확실히…… 대단하군.』
그 말에 클라이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오늘따라 별말 다 한다.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
『난 아티팩트야. 인간의 좁쌀만 한 눈깔과 다르게 나는 사물의 이치를 꿰고 그것의 성분과 작동 방식을 느낄 수가 있지.』
만약 실체가 있었다면, 지금쯤, 이 메멘토 모템은 클라이드의 물건을 조용히 훑어보고 있는 것이리라.
마치 품평하듯 조용히 답하던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에게 말했다.
『이 녀석 물건들이 다 완벽한 건 아니야. 굳이 고르라면 맨 오른쪽의 저 검이 좋겠네.』
메멘토 모템의 말에 고개를 돌린 스테치는 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저게 쓸 만할까?’
『날 믿어, 제대로 쓴다면 어지간한 무기는 쳐다도 안 보게 될걸.』
마치 의기양양한 표정이 눈에 보일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