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
(12/203)
12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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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
2021.10.13.
수도 알렌테.
남부연합국가 중 가장 큰 왕국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포장된 길이 방문자들로 하여금 수도에 도착했음을 체감하게 했다. 그리고 그 방문자들 중에는 먼 여정으로부터 막 돌아온 제라드도 끼어 있었다.
발스톡이 말했다.
“왕자님, 성에 들어가신 후부턴 침착하게 행동하십시오.”
“나도 안다.”
제라드는 입을 꾹 다문 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입구 쪽에서부터 저 멀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베네지아 왕국의 왕성, 캐슬 브랜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라드는 잔뜩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성으로 향했다.
브랜든의 메인 게이트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은 멀찌감치에서부터 말을 타고 오는 제라드를 알아보더니, 닫혀 있던 성문을 황급히 열어젖혔다.
“왕자님이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짐짓 태연한 척 말을 마구간지기에 넘겨준 제라드는 재빨리 몸을 씻으러 올라갔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이렇게 냄새나는 몰골로 왕을 알현할 수는 없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차라리 그대로 방에서 머무를 생각이었으나, 아니나 다를까 왕은 그를 호출했다.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던 제라드는 노크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누구냐?”
“나다.”
제라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금발의 남성이 다짜고짜 제라드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라드는 단추를 채우던 것을 멈추고 눈앞의 남성을 노려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인사는 접어두도록 하지. 그래, 성과는 좀 있었느냐?”
베네지아 왕국의 둘째 왕자, 알프레드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질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던 제라드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힘겹게 다스리며 말했다.
“……네. 제법 괜찮았습니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알프레드가 딱 잘라 말하며 제라드에게 말했다.
“어디 보자. 북부 전선에서의 ‘무단’이탈, 1개 중대의 ‘무단’차출. 왕의 허가 없는 특A급 던전의 ‘무단’발굴까지? 대체 무슨 일들을 저지른 거니, 동생아?”
제라드의 속을 박박 긁은 알프레드는 극적인 연출을 노리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티팩트는 어떻게 되었지?”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제라드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알프레드의 제안과 그 부하 놈의 조언만 듣고 멋대로 나선 자신의 잘못이 크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짜증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이 이상 표정 관리조차 안 되는 제라드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 알프레드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아버지를 알현하러 갈 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 그게 무슨…….”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괜히 입만 열면 곤란해지니 조용히 있다가 보조나 맞춰. 조금 있다가 알현실로 오면서 이걸 챙겨오도록 해라.”
알프레드는 제라드에게 크고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건네준 뒤 방을 나섰다.
알프레드가 나간 지 몇 분 뒤, 주머니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본 제라드는 얼굴을 팍 찡그리며 주머니를 다시 끈으로 꽉 묶었다.
잠시 후, 예복으로 갈아입은 제라드는 무거운 표정으로 왕의 알현실에 주머니를 들고 들어섰다.
왕좌에는 그의 아버지, ‘성실한 왕’ 신체루스가 앉아 있었다.
“베네지아의 제 11대 국왕이신 신체루스 전하의 셋째 아들이자 제3 왕자, 제라드 메서가 왕을 알현합니다.”
왕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제라드는 슬쩍 왕의 주변을 살폈다. 왕의 바로 양옆에는 각각 고위 위원회 소속으로서 왕의 조언가 역인 둘째 왕자 알프레드와 마찬가지로 고위 위원회의 조언가 역이면서 서방장군 직책을 겸임한 이드릴 헨리에타가 서 있었다.
‘이드릴…….’
제라드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드릴은 첫째 왕자 랍토레스 메서의 왼팔이며, 왕국 내에서 책사로서 유능한 알프레드와 견줄 만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여성으로선 놀랍게도 서해 수호를 위한 장군의 직책까지 맡고 있었다. 왕위 쟁탈전에 있어 그녀의 존재는 가히 위협적이었다.
대체 왜 저런 여자가 고작 랍토레스 같은 탕아를 보좌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던 제라드에게, 왕이 지나가듯 말했다.
“지난 2주일간 꽤 바빴던 모양이구나.”
“……예.”
당연하겠지만, 왕이 제라드를 호출한 것은 그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한 추궁이 목적이었다. 알프레드는 왕좌에 앉은 왕에게로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말했다.
“전하. 제라드는 남서쪽에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진 엘프와 일부 인간 저항군들의 봉기 소식을 들은 후에, 서둘러 진압하러 내려가느라 행선지를 먼저 전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질책할 만한 사안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맞은편에 서 있던 이드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엘프들의 집단 무력 봉기라니, 서방장군인 저조차도 난생 처음 듣는 소식이군요. 게다가 왜 북방 경계선을 지키던 제라드 왕자님께서, 왕국의 정 반대편으로 직접 남하해서까지 그들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자 알프레드는 손짓하여 뒤에 서 있던 한 남성을 불렀다.
재무대신이자 알프레드의 부하나 마찬가지인 콘라드가 안경을 고쳐 쓰며 앞으로 살짝 나섰다.
이드릴은 그런 그를 째려보았고, 콘라드는 작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양이 앞의 쥐처럼 시선을 돌렸다.
“단순한 효율의 문제입니다. 여기 콘라드가 아티팩트로 본 미래시를 통해 나는 사건 현장을 미리 발견하였고, 그 사실을 저 멀리 비발디에 있던 당신이 아니라 마침 왕성을 방문했었던 제라드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지팡이를 살짝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게다가, 그들은 단순히 아무런 생각 없이 들고 일어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관리 중이던 특A급 던전에 침입하여 그곳의 아티팩트를 노리고 있었거든요. 제라드가 제 때에 도착했기에 망정이죠.”
“뭐라고요……!”
특A급 던전의 강탈 시도가 있었다는 알프레드의 말에 이드릴은 충격을 받았다.
남부연합의 비인간 혐오 정책 탓에 베네지아를 거부한 남서쪽의 엘프들은 그 수가 워낙 적어서, 국가 전체를 상대로 들고 일어선다는 행위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이 감히 국가 관리 하에 있는 던전을 노렸다는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프레드는 가늘게 뜬 눈을 이드릴에게 향하며 물었다.
“설마 그 정도로 시급한 사안을 굳이 전달한다고 파발이나 전서구를 비발디까지 보내서, 일~이 주일이나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는 뜻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이드릴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양쪽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던 신체루스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눈앞에 부복한 제라드를 잠시 지켜본 뒤 물었다.
“결과는 어찌 되었느냐?”
“부관인 발스톡 브레스필드를 제외하고 끌고 갔던 1개 중대를 모두 잃었습니다만, 아티팩트는 파괴에 성공했습니다.”
대충 알프레드의 생각을 눈치챈 제라드는 적당히 말을 맞추기 시작했다. 신체루스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
“파괴했다고?”
“기생형이었습니다. 상대의 손에 넘어가느니 파괴해 버리는 편이 나았죠.”
제라드가 말했다. 알프레드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적을 완전 격파했다는 의미로 적 수장의 수급까지 취해 왔더군요.”
알프레드의 발언을 듣고서야 제라드는 자신이 가져온 주머니의 역할을 깨닫고, 그것을 풀러 안에 들어 있던 ‘머리통’을 꺼내 보였다.
여기저기 썩어 문드러져서 원형을 알아보기조차 어려웠지만, 엘프 특유의 뾰족한 귀는 그런 상태에서조차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주얼적으로 꽤 충격적일 법도 하건만, 신체루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왔으면 그걸로 됐다.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거라.”
“예.”
자리에서 일어선 제라드는 입을 벙긋거리며 미소 짓는 알프레드를 볼 수 있었다.
아무도 눈치챌 수 없는, 그러나 정면으로 알프레드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던 제라드만이 알아볼 수 있는 입 모양이었다.
‘나한테 빚진 거다.’
“…….”
알프레드가 마음먹으면 사실상 제라드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를 까발릴 수도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 알프레드의 농간으로 제라드가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만들어 바친 꼴이나 다름없었다.
알현실의 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왕에게 목례를 올린 제라드는, 끓는 분을 삭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 *
클로드를 떠난 스테치가 서쪽의 다른 던전들을 향해 이동한 지 사흘이 지났다.
서쪽으로 갈수록 비교적 사람의 흔적이 적어지면서,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더 눈에 띄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이동을 멈춘 채 강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리거나 채집을 하여 보존식을 만들었다.
“음, 맛있구만.”
스테치는 바싹 구운 송어를 뜯어먹으며 흥얼거렸다.
자연 경치도 예쁘고, 고민할 내용도 없이 조용하다.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여유만만이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최근엔 이렇게까지 느긋하게 있어 본 일이 드물었지. 즐기고 싶은 만큼 즐겨라.』
“그럴 거야.”
누군가가 보면 허공에 대고 말하는 미친놈으로 보겠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스테치는 마음껏 육성으로 소리 내어 반지와 대화를 나누었다.
한 손으로 구운 송어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도를 들여다 보는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그나저나 남서쪽으로 갈수록 아무것도 없네. 왜 이렇게 사람 보기가 힘든 거야?』
“엘프들 때문이지. 남서쪽 근처에 있는 숲속에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유일하게 남은 엘프들의 마을이 있는데, 인간을 무지막지하게 싫어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는 걸 막고 있거든.”
스테치는 다 먹고 남은 송어의 가시들을 훅 던져 버리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다고 싸그리 정리를 하자니 남은 엘프들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닌 데다…… 워낙 남서쪽에 개발할 자원도 없는 둥 여러 이유가 있어서, 왕국에서도 굳이 이 지역은 힘들여 건드릴 생각을 안 하는 모양이야.”
가장 최근 지도를 봐도 남서쪽에는 거점으로 삼을 만한 마을이 하나도 없었다.
변변찮은 저급 던전만 3~4개 정도 위치해 있을 뿐. 전부 돌려면 2주일에서 3주일 가까이 소요되겠지만, 제라드의 시야에 닿지 않는 지역이라 아티팩트 발굴에 최적이었다.
『덕분에 던전 안에서든 야외에서든, 눈에 띄는 일 없이 마음껏 스킬이나 어빌리티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좋은 것 같은데. 이 지역은 생각보다 괜찮은 장소 같아.』
스테치는 모닥불 위에 흙을 덮어 끈 뒤 수통에 물을 채우러 강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강에 푹 담근 통 안으로 꿀럭꿀럭 하는 물거품이 일어나며 깨끗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아.”
스테치가 뚜껑을 잠그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나라 엘프는 진~짜 위험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