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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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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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3)
2021.10.15.
“싫다면?”
기죽지 않고 스테치가 대꾸하자, 여성의 뒤에서 함께 활을 겨누던 남자들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 날아온 화살을 튕겨 낸 것도 모자라, 3 대 1의 상황에서도 겁먹지 않고 반격할 준비를 하는 스테치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워페인팅으로 뒤덮인 얼굴을 한층 더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세 번은 말하지 않겠다. 놈을 이리 내놔.”
“뭘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스테치는 그런 엘프 여성을 째려보며 말했다.
“난 지금 되도 않는 오기를 부리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덤비려면 잔말 말고 덤벼.”
『내가 없던 시절의 너였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넘겨줬을 텐데 말야.』
메멘토 모템의 짓궂은 농담에 스테치는 속으로 중얼댔다.
‘시끄러워, 임마.’
“[어떡하죠. 지금 쏠까요?]”
엘프 남성 중 하나가 여성에게 조용히 물었다.
여성은 활시위를 뺨까지 당기고 겨눈 채 스테치와 패터슨을 잠시 번갈아 가며 지켜보더니, 갑자기 당긴 활을 늘어뜨리며 스테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선 화살보단 설명이 필요하겠군.”
“헝?”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상태로 상대를 노려보던 스테치는, 순간 맥 빠졌다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살짝 내려놓았다. 최소한 발사명령을 기대했는지, 두 남자는 소곤거리던 것도 그만두며 놀란 표정으로 여자에게 거의 소리치듯 말했다.
“[엘레나 님, 하지만!]”
“[무엇이든 보이면 쏴 재끼는 것만이 해결법은 아니다. 너희 둘은 조용히 있도록.]”
엘레나라고 불린 엘프 여성이 다시 한번 제지하자, 두 남성은 끙 하고 불만족스런 신음을 흘리더니 활을 그대로 어깨에 둘러멨다. 상황이 진정되자,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왜 그자를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는지 이유를 아나?”
“몰라. 하지만 이제부터 설명해 주겠지?”
스테치가 그렇게 말하며 페네트레이터를 다시 소드벨트에 걸어 두자, 뒤에 주저앉아 있던 패터슨이 뜬금없는 의외의 전개에 충격을 받은 듯 그에게 외쳤다.
“그게 무슨……! 엘프가 하는 이야기를 너는 그대로 듣겠다는 거야?!”
“잠깐만 조용히 해 보세요.”
스테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단순히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앞선 상태였다면, 저들은 망설임 없이 활을 쏘았을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제안했다는 점이 스테치의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기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엘레나가 물었다.
“일단 설명하기 전에 먼저 듣고 싶군. 저 남자로부터 어떤 이야기들을 들었지?”
스테치는 천천히 엘레나에게 패터슨의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상단이 습격당했던 이야기부터, 그의 일행이 죽어 나간 방식 등등. 차분히 듣고 있던 엘레나는 스테치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랄 만큼 큰 소리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핫! 이거 아주 걸작이네.”
그러더니 엘레나는 찢어 죽일듯한 기세로 스테치 뒤의 패터슨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그렇게 짜 맞췄다 이거지?”
그 시선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그 흉흉함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입 끝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엘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가다듬고선 스테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인간. 날 따라와라.”
갑자기 빙글 돌아서서 방금 스테치 일행이 빠져나온 어둠의 숲으로 향하는 엘레나.
얼핏 보면 방심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에 스테치는 물론이고, 그녀의 남은 두 동료마저 당황하여 서로만 쳐다보았다.
“……억!”
스테치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뒤로 슬금슬금 빠지려던 패터슨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었다.
“이거 놔, 그…… 힉!”
몸을 비틀며 항의하던 패터슨은 차게 식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스테치의 모습에 헛숨을 들이켰다.
‘역시 이건…….’
『아마 네 생각이 맞겠지.』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의 생각에 동의했고, 스테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뻣뻣하게 굳은 패터슨을 질질 끌고 엘레나와 두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 * *
엘레나의 발걸음이 멈춘 장소는, 바퀴가 박살 난 채 옆으로 쓰러진 마차의 앞이었다.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는 패터슨을 질질 끌고 오느라 지친 스테치가 잠시 헉헉대자, 엘레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저자가 말한 마차다. 인간이여, 너라면 이 장면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겠지?”
스테치는 그 말에 마차를 흘끗 쳐다본 뒤, 말하기 싫은 걸 억지로 토해 내듯 엘레나의 말에 답했다.
“……방향이 다르군.”
만약 패터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마차는 엘프들의 추격을 피해 어둠의 숲으로 도망쳤다고 했으니 바퀴 자국의 방향은 숲 외부에서 안쪽으로 나야한다.
하지만 스테치가 본 자국은 ‘숲 안쪽에서부터 바깥쪽을 향해’ 정반대로 남아 있었다.
“그게 첫 번째.”
엘레나는 뒤돌아서더니 또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스테치가 그 모습에 질려 버리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엘레나를 따르던 남자 둘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도와주지.”
패터슨의 양팔을 각각 붙잡고 끌고 가는 엘프들. 하지만 스테치는 그것에 대해 별말 하지 않고 엘레나를 쫓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엘레나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바로 패터슨이 묶여 있었던 그 연못이었다.
텀벙-! 텀벙-!
연못물에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가는 엘레나를 바라본 스테치는 기겁하여 말했다.
“어이, 그 안에 들어가면……!”
“문제없다.”
엘레나는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스테치의 말을 끊은 뒤, 남은 손으로 연못 속 주변 바닥을 헤집으며 무언가를 찾고 돌아다녔다.
몇 분 후 기다란 나무토막 같은 것을 꺼내어 스테치와 두 엘프 남성이 기다리고 있던 뭍으로 던진 그녀는, 다시 연못 밖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이게 두 번째. ‘그게’ 저 자의 동료라고 그랬지?”
스테치는 엘레나의 말에 던져진 물건을 자세히 바라보자, 그것이 곧 나무토막이 아닌 사람의 팔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스테치가 패터슨을 구하는 와중에 보았던 그 팔이었다.
하지만 고작 팔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스테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장갑을 끼운 채로 잘려 나간 팔에는, 손목에 웬 가죽끈이 묵주처럼 둘둘 묶여 있었다.
“이건…….”
스테치가 가죽끈의 매듭을 풀자, 금속으로 된 자그마한 패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패에 새겨진 문양은 스테치에게 있어 낯이 매우 익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 숲을 방문하는 인간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그것과 똑같은 패를 가지고 오더군. 알고 있다면 말해 보아라. 그것이 무엇인지.”
“……패터슨, 잘도 날 속였군.”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대답하지 않고 패터슨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패터슨의 얼굴은 고개를 숙인 탓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스테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있나? 이건 ‘노예 상인’들의 표식이잖아.”
이가 빠드득 갈리는 소리가 스테치의 입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베네지아 왕국을 포함한 남부연합국들은 전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노예제에 대해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혐오 정서가 극한에 달한 탓인지 지금도 일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비인간들을 가둬 놓고 노예처럼 쓰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암시장도 이용하는 스테치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았다.
다만 드워프인 클라이드나 다른 비인간들과도 태연하게 지내는 그에게 있어, 엘프들의 노예화는 역시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뿐.
“어쩌라는 거야아아!!”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패터슨은 숲이 떠나갈 듯이 악을 써댔다. 두 눈을 정신병자처럼 부릅뜬 그는 지금까지의 가식과 연기는 전부 때려치운 듯, 두 엘프에게 붙잡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가며 스테치에게 외쳤다.
“너는 인간이잖아! 넌 뭐길래 같은 인간 편을 안 들고 고작 뾰족귀 놈들 말에 귀를 기울이냐고오!”
쩍!
“브왁!”
스테치는 어느 틈엔가 뽑아 든 검의 폼멜로 패터슨의 뺨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패터슨은 입 안쪽이 터져서 피와 이빨 몇 개를 뿜어낼 지경이었다.
패터슨의 양팔을 붙잡은 엘프들이 무기를 꺼낸 스테치를 보고선 당황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스테치의 눈은 여전히 패터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 안 다물어?”
스테치는 휘두른 검을 어깨에 걸친 뒤 싸늘한 표정으로 패터슨에게 윽박질렀다.
“그렇게 잘났으면, 숨기지나 말던가. 스스로도 자신 없어서 떠벌리지 못한 짓거리를 뭐가 잘났다고 남이 편들어 주길 바래?”
워낙 그 한 방이 강렬했던 탓인지, 몇 시간씩이라도 떠들 것 같았던 패터슨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조용한 어둠의 숲은 패터슨이 고통에 흐느끼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이걸 보고는 무슨 생각이 드나?”
“…….”
스테치는 패터슨에게 다가간 뒤 엘프 남자 둘을 쳐다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엘레나를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엘프들로부터 패터슨을 넘겨받은 스테치는 잠시 시간을 들였다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어……?”
스테치와 엘레나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동시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만 벌리고 있자, 그중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패터슨이 헐레벌떡 비틀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스테치가 자신들을 엿 먹였다고 생각한 엘프 남자들의 얼굴이 험악해지는 순간, 그들의 뒤에서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
스테치가 말없이 옆으로 비켜서는 모습을 본 엘프들이 그대로 다시 뒤를 보니, 어느 틈엔가 꺼내 들은 활에 화살을 걸어둔 상태로 뺨 끝까지 시위를 당긴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피융-!
팍!
“끄흐아아아악-!”
어깨를 깊숙이 관통하는 화살. 그리고 비명.
패터슨은 화살에 맞은 충격으로 몸이 일순 크게 흔들렸지만, 기적적으로 중심을 잃지 않고 계속 이동했다.
피융- 팍! 피융- 팍!
멈추는 일 없이, 천천히 패터슨을 향해 걸어 나감과 동시에 연달아 새 화살들을 발사하는 엘레나. 스테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악랄하게도 즉사할 만한 부위는 전부 교묘하게 피해 맞은 패터슨은, 이어서 발사된 두 화살이 무릎을 뒤쪽에서부터 관통하면서 결국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사지가 망가진 채 땅바닥에서 움찔거리는 패터슨. 그 뒤에서 다가온 엘레나는, 화살 하나를 더 꺼내 겨냥한 뒤 패터슨의 뒤통수를 쐈다.
퍼걱.
사과나 수박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엘레나는 자신에게 튄 핏방울 하나를 엄지손가락으로 훔쳐 내며 패터슨의 신체에 박힌 화살들을 하나하나 회수했고, 스테치는 아무런 반응 없이 눈을 감고 서 있기만 했다.
“…….”
엘프 남자들이 혼란스러움에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엘레나는 그들과 스테치를 지나쳐서 피 묻은 화살을 연못물에 씻어 낸 다음, 다시 화살통에 수납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의외로군. 한순간이지만 나조차도 네가 저 남자를 지키려고 나서진 않을까 생각했다.”
스테치가 말했다.
“……아쉽게도 난 같은 동포니 인간이니 따지기 전에 나 자신의 분노나 증오조차 억누를 자신이 없는 놈이라서. 그런 주제에 내가 그쪽을 막아선다면 그건 정의로운 게 아니라 이기적인 거겠지.”
그런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는 빙긋 웃었다.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보던 엘프들은, 엘레나가 화살 하나를 뽑아 스테치에게 조준하는 것을 보았다.
스테치가 마침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엘레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러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겠지?”
그 물음에 스테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나 또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을 거야.”
피융!
엘레나는 당긴 활시위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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