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4) (15/203)


15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4)
2021.10.16.


《액티브 스킬 : 크로스 윈드.
몸의 중심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바람으로 투사체의 궤도를 꺾어 무력화시키며, 과도하게 큰 사이즈나 빠른 속도의 투사체에 대해선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사용 시간이 길수록 소모 마력도 높아집니다.》

반지로부터 빛이 번뜩였다.

휘익-!

근거리에서 쏜 탓인지, 스킬을 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거의 꺾이지 않은 상태로 스테치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가느다란 핏줄기 하나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자 스테치는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

당연히 스테치의 아티팩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던 세 엘프는, 화살이 발사된 후에도 멀쩡히 서 있는 그의 모습에 놀라 훌쩍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누구보다도 가장 당황한 건 스테치에게 직접 활을 쏜 엘레나 본인이었다.

‘방금 것은 마법…… 마법사였나? 하지만 몸놀림은 전혀…….’

곧이어 그녀의 눈은 청록빛을 발하는 스테치의 반지에게로 집중되었다.

“[저 반지…… 마도구인가!]”

마도구는 마력이 거의 없는 인간도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구. 편리하지만, 그 한계도 명확하다. 엘레나는 더더욱 거리를 벌리며 다른 두 엘프에게 말했다.

“[상대는 마법사가 아니다. 마도구도 얼마 써먹지 못하겠지! 쉬지 말고 공격해서 마력을 고갈시켜!]”

“[예!]”

엘프어로 지시가 끝나자, 동시에 백덤블링을 하며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세 엘프들은 시위에 재워 둔 화살을 발사했다.

《액티브 코옵(Co-op) 스킬 : 버스트 샷(lv 5).
2인 이상의 인원으로 타겟의 한 점에 대한 투사 계열 무기의 집중 사격을 가합니다. 투사체에 약간의 유도 성능이 더해집니다.》

스테치는 마치 팔굽혀펴기를 하듯 몸을 크게 낮추며 《터뷸런스》의 바람으로 화살들을 죄다 피한 뒤, 저 멀리 떨어진 엘프들을 향해 도발하듯 외쳤다.

“그나저나 궁금한데! 어차피 이렇게 될 예정이었다면 어째서 굳이 힘들여서 뒷 내막을 설명 해 준 거지?!”

“최소한 우리가 생각 없이 누굴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걸 죽기 전에나마 알려주기 위해서였지!”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발사되는 화살들. 스테치는 발동 중이던 스킬을 종료하고선, 페네트레이터를 꺼내 화살들을 전부 튕겨 냈다.

한 점만을 노리고 날아오는 탓에 오히려 막아 내기엔 편했다.

‘섣부른 접근전은 무리겠네.’

누가 엘프 아니랄까 봐 움직임이 매우 재빠르다. 공격한답시고 생각 없이 추격했다간 붙잡지도 못하고 화살에 바람구멍이 날 것이 뻔했다. 메멘토 모템이 외쳤다.

『마력 낭비하지 마라, 스테치! 저장 한도가 늘어나긴 했지만 이제 벌써 150중 125퍼센트야!』

‘나도 알아!’

마력을 회복할 수 없는 만큼 마력 소모는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스테치는 멀쩡한 사람을 대상으로 필요 없는 살상을 할 의도나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사용 가능한 스킬들이 죄다 일반인을 상대론 즉사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처음으로 한탄했다.

‘과연 내가 메멘토 모템의 스킬들을 봉인한 상태로 저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스테치는 빗발처럼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해 바닥을 구르며 생각했다.

이제 엘레나와 그 동료들은 제각기 다른 타이밍에 화살을 발사하며 스테치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상대는 널 죽이려고 달려드는 판국인데 넌 그걸 ‘제압’할 생각인 거야?』

메멘토 모템이 어이없어하며 묻자, 스테치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반지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며 스테치는 확실하게 맞서 싸울 각오를 다졌다.

제압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안이하게 나가서는 안 된다. 최소한 어딘가를 하나 부러뜨릴 생각을 하는 것이 맞다고 스테치는 생각했다.

‘《에어 버스트》!’

스테치가 지면을 향해 스킬을 시전하자, 바닥을 미끄러지듯 날아가며 발사된 투명한 구체가 위협적으로 윙- 하고 울리는 소리를 내며 땅에 닿았다.

콰과광!

그러자 마치 그 자리의 지면을 전부 날려 버릴 기세로, 돌멩이와 흙으로 된 파도가 치솟아 오르며 멀리에 서 있던 엘프들에게까지 덮쳐왔다.

이전에 던전에서 싸웠던 진의 전투 방식을 흉내 낸 공격이었다.

“!”

“[피해!]”

흙의 파도로 엘레나와 동료들의 시야가 잠시 가려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스테치는 전속력으로 엘프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한바탕 지면을 휩쓸고 지나가는 흙더미 위쪽으로 두 인영이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한 명은 피하는 것이 너무 늦었던 모양이었다.

“[엘레나 님, 조심-!]”

공중에서 착지하면서 경고하는 남자의 안면으로 별안간 스테치의 부츠 낀 발이 날아들었다.

퍼억!

“흐악……!”

스테치의 드롭킥이 직격으로 작렬하자,

코피를 뿜으며 바닥을 구르는 엘프 남성. 순식간에 두 명이나 제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빠르게 뒤로 빠지며 바닥에 떨어진 멀쩡한 화살들을 회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테치의 눈에는 여유롭게 비쳐지는 것과 달리, 사실 엘레나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한 마도구로 서로 다른 두 개의 마법을 사용한다고? 어떻게……!’

가능성은 두 가지다. 저것이 정말 뛰어난 마법사와 대장장이의 협력으로 제작된 고등급 마도구거나, 아니면…….

순간,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선 상태에서 스테치에게 물었다.

“설마, 그 반지는…… 아티팩트인가?”

“……? 아, 맞아. 어쩌다 보니 얻었지.”

스테치가 반지 낀 왼손을 휘휘 저어 보이자, 엘레나의 얼굴이 마치 패터슨을 대할 때처럼 분노로 물들었다.

아니, 그것은 분노보다는 마치 끔찍한 무언가를 보고 느끼는 혐오감에 더 가까웠다.

엘레나는 스테치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욕설을 퍼부었다.

“[저주받은 망자 놈 같으니! 지모신 데스트라시여, 어쩜 저리 끔찍할 수가!]”

“뭐?! 뭐라고?”

엘레나가 쏘는 화살을 검으로 튕기거나 굴러가며 요리조리 잘도 피하던 스테치가 소리치자, 엘레나의 언어를 알아들은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너보고 저주받고 역겨운 녀석이래.』

“엥? 아니 왜!…… 우왓!”

스테치는 억울한 감정이 들어, 지금이 전투 중이라는 사실도 잊어먹고 반문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 화살 하나가 스테치의 어깨에 날아와 깊숙이 박혔다.

“끄으으응……!”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그대로 마무리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한 발이었지만, 메멘토 모템이 《리쥬버네이션》을 발동하자. 푹 파여 들어간 상처로부터 새살이 돋아나면서 박힌 화살을 툭 밀어냈다.

엘레나는 난생 처음 보는 괴이한 광경에 기가 찬 듯 멈칫했지만, 그래도 화살을 쏘는 것까지 멈추진 않았다.

푹! 푹!

연달아 화살이 박히고 뽑혀 나가는 과정이 반복되다, 스테치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오른손으로 화살을 뽑아내며 반지를 내밀었다.

‘《에어 버스……》’

“!”

피융- 펑!

손바닥에 형성되려던 공기 구체가 엘레나의 활에서 발사된 화살에 맞고 소멸되자, 스테치는 물론이고 메멘토 모템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방금 뭐야?!”

『말도 안 돼……!』

《에어 버스트》같은 스킬은 구체 생성에 필요한 공기를 끌어당기기 위해, 캐스팅과 동시에 마력으로 구성된 핵을 먼저 만들어 낸다.

고로 스킬이 완성되기 전에 그 핵에 물리력을 가해 마력을 흐트러뜨리면, 스킬 자체를 파해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론상’으론. 하지만 무색의 바람덩어리 구체 중심에 위치한 보이지도 않는 티끌 만 한 핵을, 2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예비 동작만 보고 쏴 맞춘다니, 대체 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그녀, 엘레나는 그것을 해냈다. 그것도 한 번 본 스킬의 매커니즘을 이해하여 두 번째 만에 스킬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밑천을 보일수록 너만 불리해진다! 봐줄 생각은 그만두고 싸워!』

경고에도 불구하고 스테치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지금 봐주고 있는 걸로 보이나? 그러자 메멘토 모템이 재차 말했다.

『네가 못 싸우는 게 아니라 저 여자가 이상한 거야!』

물론 스테치가 손끝만 까딱해도 엘레나를 쓰러트릴 수 있는 스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식으로 이기는 것은 스테치 자신이 용납할 수가 없었다.

저 정도의 기예를 부릴 수 있는 상대의 허를 찌르려면 대체 무슨 수를 써야 할까?

그러던 와중에, 메멘토 모템이 했던 말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밑천을 보이면 보일수록…… 이라.’

자신이 지금까지 엘레나에게 단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것.

스테치는 엘레나를 향해 뛰어간 뒤 페네트레이터의 장전쇠를 당겨 검신을 수납했다.

몸을 낮춰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한 스테치는, 그대로 짧아진 검을 엘레나가 반응하기 전에 자갈밭 틈새로 비스듬히 박아 넣고선 스위치를 눌렀다.

콰르르륵- 펑!

실린더의 도움 없이 스프링과 와이어 장력의 힘으로 검신이 늘어나며 튕겨 보낸 대량의 자갈들이 산탄처럼 날아갔다.

지면에 《에어 버스트》를 발사하여 만들어낸 흙모래의 파도와는 달리 위력과 범위 모두 부족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위협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장치의 기능 때문에 스테치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몰랐던 엘레나는, 황급히 팔을 올려 돌멩이들을 맨몸으로 막아 냈다.

“~!”

팔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지르는 틈을 타, 스테치는 전속력으로 엘레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는 약 15m.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고, 엘레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화살을 뽑아 쏴 날렸다.

피융!

‘젠장!’

스테치는 고개를 꺾어 화살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좀 전의 공격으로 팔을 움직이기도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였다.

스테치가 손바닥을 펼쳐 겨누는 시늉을 해 보이자, 엘레나는 거리를 벌리는 것도 잊은 채 본능적으로 손 부위를 향해 화살을 뽑아 발사했다.

스킬 사용을 우려한 예측 샷. 칭찬해 줄 만하지만, 이번엔 그 예리한 감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크로스 윈드》!’

동작과는 전혀 다른 스킬을 시전.

전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한 공기의 흐름으로 화살이 꺾여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스테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곧장 엘레나의 발목 쪽을 향해 냅다 검을 집어던졌다.

휙!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검을 피해 뒤쪽으로 살짝 점프하여 피한 엘레나. 하지만 몸이 아무리 날렵해도 공중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이다!’

마지막 한 스텝을 강하게 딛고 뛰어들어 엘레나에게 보디 태클을 먹인 스테치는 마운트 포지션을 취한 채 엘레나의 머리에 다짜고짜 헤딩을 먹였다.

빡!

“크윽?!”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시야가 검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엘레나는 그대로 뻗고 말았다.

* * *

기절한 두 엘프 남자와 한 엘프 여자. 스테치는 그 틈을 타 땀을 뻘뻘 흘리며 사실상 흙모래 더미 아래로 생매장당한 엘프 남자를 파내고, 나머지 두 사람을 한곳에 모아 끈으로 꽉 묶어 놓았다.

“으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엘레나가 눈을 뜨고선 묶여 있는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스테치를 확인하고선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힘든 적은 어릴 적 검술 선생님 이후론 난생 처음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던 스테치에게 엘레나가 차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숲에 들어가려는 이유가 뭐지? 너도 결국 동포들을 해치려는 거냐?”

“난 이 숲의 엘프들하곤 아무런 볼 일도 없어.”

그렇게 말한 스테치는 지쳤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았다.

패배해서 밧줄에 포박당한 상태인데도 엘레나의 기세는 조금도 죽지 않은 걸 보니, 풀어준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안 봐도 뻔했다.

‘정말이지 징한 여자야.’

곧 무언가를 떠올린 스테치는 엘레나와 엘프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대뜸 주머니를 털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나름대로 저항한답시고 몸을 비틀었지만, 그래봤자 밧줄에 묶인 채로는 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었다.

자꾸만 질색하며 싫어하는 엘레나의 태도에 스테치는 눈살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 목숨을 노린 대가 치고는 이 정도면 엄청나게 많이 봐준 거거든? 게다가 난 그쪽하고 싸우면서 진짜 오늘 죽는 줄 알았다고.”

다른 두 엘프의 주머니에선 금화 몇 닢과 조그마한 반지 등을 찾아냈고, 엘레나의 주머니 속에서는 곱게 접힌 종이 하나와 목에 걸 수 있는 펜던트를 찾아냈다.

“앗……!”

스테치가 꺼내든 물건을 본 엘레나는 눈에 띄게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엘레나의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종이를 먼저 펼쳐서 확인해 보니 그것은 스테치가 기대했던 대로 어둠의 숲의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에 그려진 숲의 안쪽에는 세 개의 던전이 표시되어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숲에서 길을 잃지는 않겠지.”

스테치는 벨트의 포켓 중 하나에 지도와 펜던트를 집어넣으며 중얼거린 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이참에 말해두지만, 내 용건은 이 숲에 있는 던전뿐이야. 지도는 잘 쓰고 나서…… 뭐 다음에 또 마주치면 그때 돌려줄게.”

스테치는 태연히 말하며 바닥에 꽂힌 페네트레이터를 뽑아 소드벨트에 묶어 두었다.

“아 그리고, 당신이랑 동료가 가지고 있던 단검은 내가 전부 가져다가 이 근처에 숨겨 두었어. 셋이서 협력하면 언젠가는 찾아내서 밧줄을 끊을 수 있을 거야. 그럼, 힘내라고.”

스테치가 그렇게 말하며 당당히 숲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동안 어쩔 줄 몰라하던 엘레나는 아까 전과는 다르게 절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스테치를 불렀다.

“잠깐! 기다려라, 인간!”

하지만 세상 모르고 깊게 기절해 버린 두 엘프 동료가 눈을 뜨는 것은, 스테치가 사라진 지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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