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5) (16/203)


16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5)
2021.10.17.


스테치는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감탄했다.

“아, 이게 이거였어?”

기존에 스테치가 구했던 지도는 어둠의 숲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이가 제작한 탓에, 숲 안에서는 길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에게서 얻은 지도는 숲속의 온갖 크고 작은 랜드마크들이 전부 표시되어 있어서, 숲속에서도 방위와 현재 위치를 항상 확인할 수 있었다.

‘지도를 얻기 전에는 이 주변만 수십 번은 맴돌았던 것 같은데…….’

스테치가 몇 분 뒤 찾아 낸 던전은 어둠의 숲을 가득 채운 거대한 나무 중 하나의 뿌리 밑에 있었는데, 굵직하게 난 뿌리 중 두 개가 둥글게 뒤틀려서 그대로 입구의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 위를 나무껍질을 뒤덮고 있던 이끼나 덩굴 등이 길게 늘어져 덮고 있었던 탓에, 스테치가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넌 왜 또 아무 말도 없어? 이상하게.”

스테치가 덩굴을 걷어내고 던전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메멘토 모템은 엘레나와 그 동료들과 싸웠던 순간 이후로는 굉장히 조용해져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 이 쬐끄만 반지는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푹 빠져 있을 때 유독 말이 적어지곤 했다.

『아무것도 아냐.』

딱히 말하기 싫다는 건가?

스테치는 캐물으려던 것을 목구멍 너머에 그대로 남겨두고, 별말 없이 던전 안으로 들어섰다.

‘신기하다.’

안 그래도 어둡던 숲이었는데, 던전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자 입구마저 덩굴과 잔뿌리에 가려져 새까만 암흑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어두워져 있던 동굴이 무언가에 의해 은은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스테치가 봐왔던 횃불이나 야광석의 빛이 아닌, 버섯이나 식물들이 외부 자극을 통해 일으키는 빛이었다.

누군가가 방문한 적 없었던 던전에 스테치가 들어오며 일으킨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반응한 것이었다.

『너야말로 무슨 일인데? 이런 던전 처음 와 봐?』

“응. 이렇게 온통 식물로 뒤덮인 던전은 처음 와 봤어.”

어둠의 숲에서 생성된 던전은 그가 지금껏 봐온 바깥의 던전과는 달랐다.

숲에 던전이 생성될 경우 일반적이라면 사기와 마력의 영향으로 주변의 나무와 풀들이 제일 먼저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메멘토 모템을 얻었던 그 던전이 그랬다. 하지만 어둠의 숲 던전은 시작부터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통로 내벽은 지표면의 식물들이 내린 뿌리로 가득 찬 상태였다.

‘《패스파인딩》.’

던전에 들어온 스테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버릇처럼 길 찾기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달리 웬 경고가 스테치의 시야에 떠올랐다.

《경고, 자격조건 미달성에 의해 ‘액티브 스킬 : 패스파인딩’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아…….”

설마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렇게 자연 친화적 던전에 대한 탐험 경험이 전무한 탓에, 설정한 목표까지의 최단 루트를 표시해 주는 《패스파인딩》 스킬이 발동하질 않았다.

어둠의 숲에서 던전까지의 길을 찾아낼 때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스테치는 《애니멀 인스팅트》를 사용한 뒤, 페네트레이터를 뽑아서 땅바닥을 두들겼다.

캉-! 캉-!

검이 흙바닥을 때리자 불똥이 튐과 동시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애니멀 인스팅트》에 의해 극한까지 강화된 청각으로 인해 사실상 박쥐와 올빼미와도 같은 ‘소리의 시각화’ 능력을 가지게 된 스테치.

그런 그에게 페네트레이터에 의해 발생된 소음은 던전 통로의 벽을 타고 울려 퍼지며,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정밀한 음파의 입체 지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스테치의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한 메멘토 모템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며 물었다.

『머리 좋네. 너 대체 던전은 언제부터 돌기 시작 한 거야?』

“12살 때부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밥까지 빌어먹고 살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메멘토 모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스테치가 익혀 온 테크닉, 스킬들은 동년배 탐험가의 수준을 아득히 웃도는 것이었다.

어둠의 숲 던전에서는 고생 좀 하려나 싶었는데, 역시 평소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스테치는 단숨에 길을 찾을 방법을 떠올렸다.

“……희한하네,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안 보여.”

몇 번 더 검으로 땅을 두들기던 스테치가 갸웃거렸다. 보통은 이렇게 하면 길을 찾으면서 몬스터도 찾을 수 있었다.

보통은 반응이 저쪽에서부터 먼저 오거나 혹은 음파 탐지에 움직임이 걸려드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번엔 몬스터가 아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스테치는 더욱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굴 안을 향해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던전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니, 통로의 벽 속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고 박혀 있던 나무뿌리가 ‘몸’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저런 놈도 몬스터야?”

『루트맨이야. 되도록이면 접촉하지 않는 편이 좋을걸.』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처럼, 가지 같은 뿌리를 바들바들 떨며 걸어오는 그 존재에 대해 스테치는 기괴함을 느꼈다.

식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평소엔 움직일 일도 없고, 심장조차 없기에 탐지가 불가능했던 것이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식물치고는 색깔이 불그스름하다는 점이었다.

‘숲 하면 생각나는 몬스터는 그레이트 울프나 혼 보어 같은 동물계뿐이었는데, 이번 일로 지식이 좀 늘었군.’

스테치는 검을 겨누고선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까지 스킬을 사용하는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 그는, 통로를 가득 채운 루트맨들을 베어 넘기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파삭!

썩거나 힘없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루트맨들은 날카롭게 벼려진 검에 산산조각 나며 차례로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이쪽 몬스터들은 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

싱겁다는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며 전진하는 스테치, 하지만 루트맨의 물량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전방에서 오는 적에만 정신이 팔린 스테치는, 어느새 자신의 뒤에서 나타난 루트맨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어……?!”

뒤쪽에서부터 스테치에게 팔을 둘러 붙잡은 루트맨의 뿌리 끝이, 스테치의 피부 위를 기어오르듯 건드리는 순간.

콰드드득!

루트맨의 뿌리 끝은 엄청난 속도로 스테치의 피하로 파고들며 체액을 힘차게 빨아내기 시작했다. 식물의 이미지로선 상상도 못 할 공격 방식에 그는 기겁했다.

아마도 이 녀석들의 색이 붉은 이유는 던전에 찾아온 희생양들의 피를 물 대신 흡수하며 자라왔기 때문이리라.

『접촉하지 말랬잖아!』

“지금 그런 소리 할 때냐?!”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쳐 보지만, 스테치의 혈액을 빨아들인 루트맨의 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질겨지기 시작했다. 포박당한 스테치는 순식간에 통로로 몰려든 루트맨들에게 포위당했다.

“《크로스 윈드》!”

스테치와 그를 붙잡은 루트맨의 사이에서 거센 돌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꿋꿋이 버티던 루트맨은, 계속되는 몸부림과 자신을 밀어내는 바람에 못 버티고 스테치를 그만 놓아주고 말았다.

그러자 쑥-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팔에 박혀 있던 뿌리가 뽑히며, 피부에 난 구멍을 통해 핏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그거 그렇게 쓰는 스킬이 아닌데……?』

“잘만 먹혔으니 됐잖아!”

이를 악문 스테치는 벌떡 일어나서 덤벼오는 두 루트맨을 베어 넘긴 뒤, 활짝 핀 왼손을 루트맨 무리들에게 향하고선 새롭게 배웠던 스킬들 중 하나를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 파이어볼.
구 형태의 화염 투사체를 발사하며, 궤도상에 불꽃의 흔적을 남깁니다. 에너지를 축적하여 더 강하게 쏠 수도 있습니다.》

화르륵!

펼친 손바닥에 생성된 화염구가 루트맨을 포함하여 좁은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뿌리들을 쓸고 나갔다.

불꽃에 닿은 몬스터들은 들릴락 말락 한 비명을 흘리며 타들어 갔고, 불덩이는 스테치의 손을 떠나 통로를 밝히며 저 멀리 안쪽까지 계속 날아갔다.

잿더미만 남은 자리에 커스 이팅을 사용한 스테치는 바늘땀을 훔쳐 냈다.

‘방심하다 붙잡히면 위험한 건 맞지만, 여전히 그래 봤자 하급 던전 수준에서 벗어나진 않는군.’

이전에 맞붙었던 진의 던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테치는 땅바닥에 침을 한 번 뱉은 뒤 던전의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 * *

쿠르르릉-!

약 두 시간 뒤, 항상 침묵이 감돌던 어둠의 숲에서 갑작스런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 같던 거목 하나가 그 자리에서 폭삭 주저앉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다른 나무와 충돌했다.

파아앗-

환한 빛과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스테치는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무사히 두 번째 아티펙트를 메멘토 모템에게 먹인 스테치는 탈출 스크롤로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미처 끝내지 못한 업그레이드 프로세스를 마저 진행했다.

《아티팩트 『메멘토 모템』의 마력 한도가 150에서 250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액티브 스킬 : 리액티브 스킨을 포함한 신규 스킬 두 개가 해금되었습니다.》

《메멘토 모템의 추가 어빌리티 해제 프로세스가 진행 중입니다. 조건을 만족시키면 해금 가능합니다.》

《현재 흡수한 아티팩트의 갯수 : 1》

《현재 저장된 마력량 : 4564》

《잠금된 어빌리티의 목록 :

1 . 어빌리티 “커스 디바우러”

- 아티팩트 1, 마력 7000

2 . 어빌리티 “싱크로”

- 아티팩트 4, 마력 45000

3 . 어빌리티 “시져”

- 아티팩트 4, 마력 45000

4 . 어빌리티 “아바타”

- 아티팩트 9, 마력 90000

5 . 어빌리티 “???????”

- 아티팩트 ??, 마력 ??????

6 . 어빌리티 “????”

- 아티팩트 ??, 마력 ???????》

“뭐야, 마력량이 부족하네?”

스테치가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하긴, 어둠의 숲에 들어선 이후부턴 묘하게 몬스터 보기가 힘들어진 탓에 마력을 과충전할 기회가 지극히 적어졌다. 게다가 이전 업그레이드로 마력을 한 번 몽땅 사용한 탓도 있었다.

스테치는 일단 업그레이드를 중단하고 메멘토 모템을 일깨웠다.

“야, 일어…….”

탁.

그러던 차에 스테치는 자신의 뒤쪽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검을 뽑아 들어 번개같이 뒤로 돌아섰다.

“……또 너야?”

본 적이 있는, 검은빛의 긴 머리칼과 뾰족한 귀.

스테치는 검을 엘레나의 목젖에 겨눈 채 물으며 한숨을 쉬었다.

엘레나는 이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에 응한 스테치는 천천히 검을 집어넣은 뒤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정말, 또 싸우는 줄 알고 겁먹었잖아.”

“…….”

솔깃해하는 듯한 반응에 스테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부활이 가능하다곤 해도 죽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스테치가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뭣 땜에 온 거야? 지도? 그쪽은 볼 일이 다 끝나면 돌려준다고 했잖아.”

“지도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엘레나가 말했다. 뭐지? 인간 혐오증에 걸려도 모자랄 엘프에게서 왠 존댓말?

“지도는 가지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털썩!

무릎까지 꿇어 보이는 모습에 스테치는 멍한 표정이 되어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자신이 뭘 했길래, 뭘 바라기에 이 살벌한 여자가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스테치는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 뭔데?”

“펜던트입니다.”

펜던트? 그 순간, 스테치는 엘레나로부터 지도와 함께 얻었던 목걸이 장식품 하나를 떠올렸다. 유틸리티 벨트의 파우치를 뒤적인 스테치는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이걸 말하는 건가?”

“네, 맞…….”

“엘레나 님!”

갑자기 고함 소리가 숲속을 울리는가 싶더니, 두 엘프가 엘레나의 양옆에 착지했다.

“무사하셨군요.”

“혼자 가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정신없이 떠들던 두 엘프는 엘레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스테치에게로 향했다가, 그가 들고 있던 펜던트를 더니 두 눈을 휘둥그레하며 경악했다.

“저, 저거!”

“어째서 저게 저자의 손에…… 으윽?!”

퍽! 퍽!

갑자기 두 엘프 남성들의 복부에 꽂히는 엘보와 킥.

그것은 스테치의 것이 아닌 엘레나의 것이었다.

스테치는 그 모습에 놀라 입을 떡 벌렸고, 엘레나는 스스로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헉헉거리더니 스테치를 돌아보며 말했다.

“부탁입니다, 제발 돌려주십시오.”

『휴, 드디어 일어났…….』

그 순간, 프로세스에서 깨어난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가 스테치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스테치만큼이나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한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

“…….”

스테치는 답답하다는 듯 신음하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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