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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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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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6)
2021.10.18.
“어…….”
스테치가 할 말을 잃고 머뭇거리자, 엘레나는 팬던트를 되돌려줄 것을 재차 요구해왔다.
“부탁합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돌려주세요.”
스테치는 또다시 기절한 채 널브러진 두 엘프들을 보며 혼란감을 느끼다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길래, 자기 동료들이 허튼짓 못하도록 직접 때려눕히기까지 하는 걸까?
“으음…….”
스테치는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더니 엘레나에게 말을 건넸다.
“있잖아, 질문이 있는데.”
“네.”
스테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너도 지금 이게 엄청나게 무모한 짓인 줄은 알지?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시킬 줄 알고 그러는 거야?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엘레나에게 말하는 스테치의 어투는 흡사 훈계하는 연장자의 것처럼 들렸다. 엘레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한테 그런 말을 해 주는 시점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만…….”
스테치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그런 스테치를 본 엘레나는 곧이어 말했다.
“게다가, 구해 준 같은 인간조차 악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죽도록 놔두었던 일까지 치면 더더욱 악인하곤 거리가 멀지 않을까요.”
“…….”
엘레나의 단언하는 듯한 모습에 스테치는 물었다.
“그래, 뭐 그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치자. 이 펜던트는 뭐지? 이게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
스테치는 손에 쥔 펜던트를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본 것은 방금이 처음이었지만, 보자마자 든 생각은 ‘못 생겼다.’는 것이었다. 손바닥 사이즈의 타원형이며 납작한 외형, 거기에 겉표면은 흑요석같이 차가운 묵빛을 띄우고 있었다. 막말로 강가의 자갈과도 같은 생김새였다.
스테치의 질문에 엘레나는 좀 전과는 달리 입을 꾹 다물었다.
“…….”
“뭐,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그렇게나 소중한 물건이라면 돌려주지.”
그 말에 엘레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스테치가 말했다.
“단, 조건부로.”
‘역시…….’
엘레나는 스테치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잠깐 실망의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유물을 돌려받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 목적은 이 숲에 있는 모든 던전을 파괴하는 거야.”
“……네?”
엘레나는 순간 스테치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테치가 던전 키퍼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가 가진 능력은 진짜였다.
게다가 그가 방금 밝힌 목적을 고려해 봤을 때 던전이 무너진 시점과 스테치가 그 타이밍에 던전 근처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온갖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미처 물어볼 틈도 없이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그걸 쉽게 해내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해. 일을 다 마치고 나면 펜던트를 돌려주지. 어때?”
“……마을에서 필요한 물품을 챙겨올 테니, 그 후에 바로 출발합시다.”
* * *
“으훼에엑!”
목구멍 사이에 고인 위액을 토해 낸 크레일이 몸을 굴려 힘겹게 일어났다. 물론 자기보다 먼저 일어난 동료 토루빔 또한 거하게 속을 게워 낸 뒤였다.
기절한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변에 엘레나와 인간 침입자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이미 무너져 내린 던전의 입구와 쓰러진 나무만 보였다.
서로 한참을 말없이 헐떡이며 수통의 물만 들이켜던 와중에, 먼저 일어났던 토루빔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우리한테 쪽지를 남겼어.”
“?”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동료가 건네주는 쪽지를 받아든 크레일은, 글씨체가 엘레나의 것임을 확인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나는 중요한 볼일 때문에 오늘부터 며칠간 자리를 비우겠다. 장로님께서 물어보시면 기분 전환 겸 먼 곳까지 순찰 갔다고 전해 줘. 추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 볼일이라는 것은 설마…….”
“아마 유물 때문이겠지.”
크레일과 토루빔은 너나 할 거 없이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쪽지에선 엘레나가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를 명확히 밝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추적할 수도 없다. 도대체 유물을 언제, 어쩌다가 빼앗긴 것일까?
‘우리 같은 정찰대가 며칠씩이나 마을을 떠나 있는 일이 드문 건 아니지만…….’
유물을 외부에서 온 인간한테 빼앗겼다는 것이 장로의 귀로 들어간다면, 제 아무리 엘레나가 무사히 유물을 가져오더라도 문책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 못해도 최소 추방행이었다.
게다가 엘프는 철저한 부족 사회.
유물 수호자로 지정되어 있던 엘레나가 웬 외부인에 의해 유물을 빼앗겼단 사실이 조금이라도 외부에 노출된다면, 부족 전체의 입지가 약화될 우려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만약 유물을 되찾아오는 데에 실패한다면…… 토루빔은 그런 끔찍한 상상마저 하고 싶지는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걸 어쩐다냐…….”
두 엘프가 고민하는 사이, 스테치와 엘레나는 첫 번째로 무너뜨린 숲의 던전으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뒤였다.
* * *
스테치가 엘레나에게 부탁한 것은 동행이었다.
스테치가 숲을 돌아 던전을 박살 내고 다닌다면 언젠가는 숲의 주민인 엘프들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스테치와 그들 간의 접촉도 많아질 것이다.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매번 치고 박고 싸워야 한다는 것은 스테치로서도 피곤한 일이었기에, 그는 펜던트를 돌려주는 대가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엘레나는 숲에서 나고 자란 엘프인 데다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정찰병 출신이니, 순찰 루트를 꿰고 있을 그녀에게 있어 스테치를 엘프들 몰래 던전까지 안내하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스테치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엘프들이 죽도록 혐오하는 던전의 파괴나 다름없었으니, 엘레나로선 스테치를 돕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적었다.
“만약 다른 엘프들이랑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도 좋아.”
스테치는 지도를 보고 걸어가면서, 앞장서던 엘레나에게 당부했다.
“내가 네 노예라던지, 포박된 범죄자를 심문하러 적당한 장소로 이송하는 중이라던지 아무거나 말하라고. 그걸로 싸움을 피하고 상대가 물러가 준다면 훨씬 이득이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예 마주치지 않는 편이 제일 나을 테니, 이동에는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엘레나가 말했다. 스테치는 사슴같이 가벼운 움직임으로 커다란 나무뿌리를 뛰어넘는 엘레나의 모습에 감탄하며 그녀를 쫓아갔다.
몇 시간이 지나, 안 그래도 어두웠던 숲은 밤이 되자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미리 엘레나의 지시에 따라 나무뿌리 사이에 쉼터를 마련한 스테치는, 자리에 주저앉아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는 엘레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켭니다.”
조용한 말과 함께 엘레나가 든 랜턴에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불빛은 스테치가 생각하는 것이 아닌, 차가운 느낌의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스테치는 탄성을 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유령불입니다. 기름으로 피우는 불과는 달리 차갑고, 실체가 없죠.”
엘레나가 랜턴의 커버를 벗기고 보란 듯 불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이자, 스테치는 어린 아이 마냥 재미있어 하며 그녀를 따라 불을 만져 보았다.
그 반응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엘레나가 말했다.
“한 번 피우면 일부러 끄려 들지 않는 한 꺼지지 않는 데다 다른 곳으로 번질 염려도 없어 편리합니다만, 마력이 없으면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게 유일한 단점입니다.”
그녀가 피운 불의 밝기는 너무 밝지 않고 잔잔해서, 엘레나가 미리 세워 둔 가림막까지 더해지면 아무도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다.
‘과연, 엘프들은 야영을 할 때 이런 방식을 쓰는군.’
스테치는 배낭에서 미리 훈연해 둔 생선 등을 꺼내 뜯기 시작했고, 엘레나는 말린 과일을 꺼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미묘한 긴장감과 어색함에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테치는 바늘방석에라도 앉은 듯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아, 분위기 왜 이러냐 진짜.’
『죽자 치고받던 종족끼리 한자리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친하게 이야기 나누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인간과 엘프가 다퉈 온 세월은 이미 반세기가 넘었다.
본격적인 인종청소 전쟁 이전부터 따지면 그보다도 더 긴데, 가해자인 인간으로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 하는 게 옳은 일일까? 스테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지.’
반면 엘레나는, 생각보다 인간 스테치에 대한 악감정이 그리 깊지 않았다. 사실, 호기심이 더 앞서는 중이었다.
그녀는 인종청소 이후에 태어난, 일명 신세대였다.
태어날 때부터 숲이 자신의 집이었고, 인간들에 대한 이미지라곤 전부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길러준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쌓인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실제로 숲에 들어오는 인간들 중 좋은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스테치는 처음으로 ‘악행’이외의 무언가를 보여준 인간이었다. 문제는 입을 열기 힘든 묘한 분위기 때문에 그녀 또한 선뜻 말을 걸지 못한단 점이었다.
“……그래, 물어보진 않았지만 내 이름은 스테치 아텔리어야. 네 이름은 엘레나라고 들었는데, 맞지?”
스테치가 억지로 말을 시작하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따라오게 만들어서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엘레나가 눈만 깜빡이자, 스테치가 머쓱해져서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필요하다고 널 협박해서 끌고 온 꼴이잖아.”
“뭐 그렇긴 하죠.”
칼 같은 대답에 스테치는 순식간에 풀죽은 얼굴이 되었고, 엘레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희한하네요. 살아가는 내내 인간에 대해선 증오심만 품고 살아갈 거라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당신을 보니…… 잘 모르겠어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사실 속으론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엘프와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저 정도면 꽤나 후한 평가 아닌가.
엘레나는 멍하니 유령불만 바라보는 스테치에게 덧붙이듯 말했다.
“…… 나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허?”
“오늘 던전을 파괴한 게 확실히 당신이 맞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스테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나는 말을 돌리지 않고 곧장 질문했다.
“던전을 파괴하는 이유는 뭐죠, 스테치?”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스테치는 다짜고짜 검부터 뽑아 드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엘프가 제안한 대화에 응했고, 보여주기식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노예상단주의 처단을 도왔으며,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환이 두렵지 않은지 엘레나와 그녀의 동료들을 처리하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이 스테치가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확신이 들지 않는 이유는, 스테치의 목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숲 바깥의 인간들이 던전으로 향하는 이유는 대충 알고 있어요. 돈, 자원, 혹은 아티팩트죠. 어떤 멍청이들은 그것때문에 굳이 이 숲에 있는 던전까지 찾아오곤 하니까요.”
엘레나가 짜증 난다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하지만 바깥에 수많은 던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굳이 이 숲의 던전을 찾아 나섰어요. 제가 아는 한 이미 상당한 힘을 지닌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말하려면 복잡해. 다른 누군가에게 꺼내도 될 내용인지도 모르겠고.”
스테치가 말을 아끼자, 엘레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엘레나가 말하길 거부한 탓에 유물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스테치가 말하기 싫은 내용이 있다면 굳이 캐물을 수는 없었다.
때마침 식사도 마친 엘레나는 지금으로선 이 이상 뭔가를 물어봐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뒤 랜턴을 들어 불을 껐다.
* * *
툭.
스테치가 던진 돌멩이가 수직 동굴의 벽에 한 번 부딪친 뒤 떨어졌지만, 바닥에 닿는 소리는 한참 뒤에나 들려왔다.
“못 들어갈 깊이는 아니지만, 괜히 들어가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네.”
“일단 내려가죠. 먼저 내려갈 테니 조금 있다가 따라오세요.”
바위틈에 강철 못을 단단히 박아 넣은 엘레나는 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던전 안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출발 당일 이후 첫 던전에 도달하기까지 4일이 지났다.
보통의 던전과 달리 수직 절벽 형태로 된 입구를 지닌 던전이었기에, 처음부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악마의 입 같은 형상이네.”
엘레나의 모습이 절벽 아래쪽에 깔린 어둠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스테치는 악마나 괴물의 주둥이 마냥 시커멓게 벌려진 구덩이의 안으로 엘레나를 따라 내려갔다.
하지만 한참이나 줄을 타고 내려가도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징그럽게 깊은 절벽이구먼.”
스테치가 질린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린 그 순간, 로프가 크게 튕김과 동시에 아래쪽에서부터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그리고 그것이 엘레나의 목소리임을 확인한 스테치는, 곧장 붙잡고 있던 줄에서 손을 떼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봐, 바닥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데 뭘 믿고 뛰어내리는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메멘토 모템에게, 스테치가 외쳤다.
“내가 다치면 곧바로 회복시킬 준비나 하라고!”
『결국, 믿는 구석은 나밖에 없구먼?』
메멘토 모템이 그리 투덜거릴 때, 마침내 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