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7) (18/203)


18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7)
2021.10.19.


생각보다 낙차가 꽤 크긴 했지만, 평생을 개고생하며 굴러온 스테치에겐 떨어져 볼 만한 높이였다. 자연스럽게 낙법으로 구르고 일어난 스테치는 곧바로 검을 뽑아 눈앞으로 뛰어드는 몬스터를 향해 회전베기를 걸었다.

“괜찮아?!”

거대 개미 형태의 몬스터는 스테치의 검에 끈적한 체액을 남긴 채 바닥에 떨어졌고, 고개를 돌려 엘레나를 찾은 스테치가 묻자 엘레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해요, 자이언트 앤트입니다!”

엘레나는 거대한 턱을 딸깍거리며 목을 물어뜯으려는 개미를 활대로 한 번 크게 밀어 낸 뒤 걷어차며 잽싸게 일어났다.

한편, 던전의 동굴 더 깊은 안쪽에서는 반지의 빛을 받아 구슬같이 반짝이며 다가오는 개미들의 눈알들이 보이고 있었다.

“하앗!”

큰 호를 그리며 날아든 스테치의 발끝이 엘레나의 옆에서 다가오던 개미의 각진 머리통에 꽂히자, 녀석은 비명과 함께 날아가 저 멀리 통로 안쪽에서부터 기어오던 다른 몬스터들과 부딪히고 굴러갔다.

엘레나는 갈고리 모양의 특이한 단검을 하나 꺼내더니, 두껍고 뾰족한 머리통을 코뿔소처럼 들이밀며 달려드는 자이언트 앤트 위에 올라타 몸마디 사이에 박아 넣었다.

써컹!

가볍게 분리된 머리통과 몸마디에 달려 있던 다리들은 아주 잠깐 죽은 듯이 멈춰 있더니, 여전히 온전한 상태인 마냥 퍼덕였다.

심지어 머리통은 마치 겁을 주듯 이전보다도 맹렬한 기세로 턱을 딸깍거렸다.

“끝이 없습니다!”

스테치가 검으로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개미 한 마리를 몰아내는 사이, 엘레나는 단검은 집어넣고 화살을 뽑아 날리며 소리쳤다.

여유롭게 활 쏘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화살 하나로 다리 마디를 정확히 절단 내어 개미들의 움직임을 봉하는 엘레나. 꽤나 선전하고는 있지만, 몰려오는 물량을 상대로는 답이 없었다.

“뒤에 붙어 있어!”

자그마한 불씨가 손바닥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직후 곧장 사람 몸집만큼이나 거대해진 화구가 숨도 쉬기 힘들만큼의 열기를 발산하자, 스테치의 옆에 서 있던 엘레나는 물론이고 그걸 마주한 개미들마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파이어볼》!”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은 불길이 던전의 입구에서부터 통로 안쪽으로 뻗어 나가며 자이언트 앤트들을 휩쓸자, 키틴질의 껍질들이 바싹 타들어 가며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화염이 직접 닿지 않았어도 자이언트 앤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불을 옮겨 붙인 탓에, 저 멀리 던전 안쪽에서는 한바탕 불바다 지옥이 펼쳐졌다.

“후읍, 냄새 한 번 끝내주는데?”

대량으로 올라오는 연기와 냄새에 손사래를 치며 스테치가 고개를 돌리는 반면, 엘레나는 눈앞의 광경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까지 스테치가 엘레나 일행과 싸웠을 때 이미 밑천을 다 내보였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티팩트에 대한 혐오감보단 놀라움이 더 큰 모양이었다.

“대, 대체 그 아티팩트 하나로 얼마나 많은 스킬을 쓸 수 있는 거죠?”

“세 본 적 없어. 몰라도 열 개는 될걸?”

만약 저런 스킬을 단 한 번이라도 자신과 동료들에게 사용했다면…… 그제서야 그녀는 스테치가 자신과 싸울 때마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얕본 것일까? 아니면…… 어느 쪽이건 안도감과 찝찝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통로 안쪽에서 밝은 빛을 뿜어내며 자이언트 앤트들을 태워 먹던 불길이 사그라질 때쯤, 스테치와 엘레나는 코와 입을 팔로 막은 채 천천히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 스테치의 예상과는 달리, 자이언트 앤트들의 강력한 턱과 그 머리통의 껍질들은 멀쩡히 남아 있었다.

“와, 이것 좀 봐.”

스테치가 엘레나를 부르며 눈앞의 것을 가리켜 보였다.

자이언트 앤트들은 던전 안쪽의 개미집까지 불길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타들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던전의 통로를 몸으로 막고 있었다.

마치 불에 튀긴 옥수수알 마냥 타고 남은 자이언트 앤트들의 머리와 몸통 껍질들이 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 스테치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발길질을 한 번 날렸다.

퍼석.

와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껍질의 벽. 엘레나는 그제서야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스테치를 보며 말했다.

“이 던전의 이름은 스몰빙입니다. 설명하는 것이 늦었지만, 이 던전에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보다시피…… 곤충이죠. 특히 개미요.”

“그래 보이는군.”

“정말 일부 종을 빼놓고는 대부분이 단단한 외갑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칼은 들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아티팩트가 있으니 딱히 문제될 거리는 없겠죠.”

『엣헴.』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메멘토 모템을 가볍게 무시하며, 스테치는 개미 껍질과 남은 잔해들을 향해 반지를 내밀었다.

“커스 이팅!”

딱딱한 개미의 껍질과 머리통들이 순수한 마력으로 변환됨과 동시에 반지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것을 본 엘레나가 물었다.

“아티팩트들은 전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나요?”

“아마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반지에서 엘레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스테치는, 그녀가 마치 괴물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당황하여 되물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인가?”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을 뽑아낸다는 것은 단순히 체액을 뽑아내는 것이 아닌, 영혼같이 좀 더 근본적인 정수를 추출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엘레나가 메멘토 모템을 이상하게 보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설명을 들은 스테치는 이대로 놔두다간 무슨 악마 취급이라도 받겠다 싶어, 다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이 아티팩트가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건 몬스터, 그중에서도 죽은 시체뿐이야. 사람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다고.”

그 말에 엘레나는 별로 납득하지 못한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불에 그을린 자국만 남은 통로를 스테치보다 앞질러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

『왜, 너도 저 여자랑 똑같은 생각 하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메멘토 모템의 물음에 스테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티팩트나 마력과 같은 요소에 대해 스테치는 관련 지식이 전무하였다.

그 탓에 엘레나가 지금처럼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 메멘토 모템이 얼마나 이질적인지 모르고 지내왔다. 새삼스럽게도 스테치는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널 믿어도 되는 거냐?’

『어차피 지금 너한테 선택지가 있기는 하고?』

시큰둥한 되물음에 스테치는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황급히 발길을 재촉하여 통로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다음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려봐, 내가 해 볼게.”

여전히 《패스파인딩》은 먹통이었지만, 스테치는 저번처럼 《애니멀 인스팅트》를 사용한 뒤 음파를 이용한 던전의 구조 파악에 나설 생각이었다. 자신만만하게 페네트레이터를 뽑은 그는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캉-!

“어?!”

스테치는 눈을 감은 채 귀에 온 집중을 다 하던 와중에 당황하여 외쳤다.

음파로 감지한 던전, 그러니까 자이언트 앤트의 굴은 지금껏 스테치가 탐험해 온 그 어떤 던전보다도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많은 통로들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개미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자이언트 앤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일으키는 소음 때문에 길 찾기는 힘들어 보였다.

“움직이는 대상이 너무 많아. 이래선 구조 파악은 불가능해.”

스테치가 당황해하자, 엘레나가 말했다.

“스몰빙 던전은 엘프들이 초기에 발견했을 당시부터 끝까지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였습니다. 방금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론 던전 키퍼가 있는 위치까지 추적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스테치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자,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운 엘레나가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스테치도 엘레나가 미처 뭐라고 하기 전, 바닥을 울리며 무언가가 다가오는 진동을 느끼고선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가 오고 있다.

“숨으세요!”

“여긴 숨을 곳이 없는데…… 으악!”

엘레나는 스테치를 벽으로 끌어당긴 뒤, 자기 망토를 크게 펼쳐 스스로와 스테치를 덮어씌우고선 스킬을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 카모플라쥬 클록(lv 5).
사용자의 외견을 주위의 지형지물과 동화시켜 모습을 감춥니다. 발동 후 움직이거나 최대 3분의 시간이 지나면 풀리며, 해제 시 30분의 쿨타임이 있습니다.》

두두두-.

다가오던 자이언트 앤트들의 움직임이 스테치와 엘레나가 기대고 선 벽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엘레나의 망토는 면적이 그닥 넓지 않은 탓에 스테치는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야만 했고, 엘레나는 스테치에게 밀착한 채 그를 노려보며 조그맣게 윽박질렀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요!”

“좁아 죽겠단 말야, 젠장!”

엘레나가 망토 끝을 살짝 걷어 보니, 화염의 열기를 감지한 다른 개미들이 살펴보러 나온 듯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자이언트 앤트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스테치는, 문득 몇몇 놈들이 주둥이에 하얀 무언가를 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크기가 너무 커서 처음엔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스테치는 나중에서야 그것이 개미의 번데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저걸로 추적하면 되겠네. 화재 흔적을 보고 번데기를 옮겨야 되나 확인하러 나온 모양이군.』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잘 생각해 봐, 멍청아. 뭐가 변해서 번데기가 되지?』

‘그야…… 애벌레겠지.’

『그리고 애벌레는 여왕개미로부터 나오겠지? 여기가 던전이라면 경계가 제일 삼엄한 곳에 있을 여왕개미나, 혹은 여왕개미 근처에 있는 다른 놈이 던전 키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어?』

확실히 그럴싸한 말이었다.

설령 저 말이 틀렸다고 해도, 던전 키퍼는 주로 던전의 최하층ㆍ최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현재 스테치가 가진 수단으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이에 대해 메멘토 모템은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했다.

『여왕개미는 일단 자리를 잡으면 거의 쉬지 않고 알을 낳아. 번데기, 애벌레, 알을 옮겨 다니는 개미들의 방향을 역추적해 보면 결국엔 여왕개미의 산실까지 직통으로 도달할 수 있겠지.』

‘좋은 생각이야.’

스테치는 감탄하며 방금 들은 말을 엘레나에게 전해주었다. 엘레나는 그 말을 듣고선 놀라워하는 한편, 반신반의하는 듯 말했다.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긴 하지만…… 이 던전이 생긴 게 하루 이틀 전도 아닌데 그런 방법이 있는 걸 다른 어르신들이나 장로들이 지금껏 몰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 방법이 옳다면 이 던전은 진작 엘프들 손에 무너져 내렸어야 맞지 않나요?”

『말이야 쉽지. 던전 키퍼가 있는 장소까지 가는 길목은 자이언트 앤트들로 꽉 차있을 텐데 그걸 엘프들 몇 십 명 정도로 어떻게 뚫고 지나갈 수 있었겠어?』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말이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는 것조차 까먹고, 마치 반지와 엘레나가 직접 대화하는 듯한 착각이 들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해? 빨리 내 말 전해.』

“어? 어어, 그래.”

“?”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엘레나에게 애써 얼버무리며, 스테치는 메멘토 모템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하지만 엘프들의 경우하곤 다르게, 너희들은 운이 좋아. 이번엔 내가 있거든.』

메멘토 모템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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