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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8) (19/203)


19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8)
2021.10.20.


딸깍딸깍.

위협적으로 턱을 움직이며 개미굴 통로를 지나가는 자이언트 앤트 한 마리.

무언가 이상이라도 감지한 듯 잠시 멈춰 서서 더듬이를 까딱이는 틈을 타, 위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녀석의 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써컹!

시원스런 절삭음과 함께 자이언트 앤트의 머리통이 떨어져 나가자, 남은 몸뚱이는 마치 자신이 죽었다는 현실을 부정하듯 다릿마디들을 부들부들 떨다가 털썩 쓰러졌다.

스테치가 얼굴에 튄 검은 체액을 닦아 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자, 메멘토 모템이 그를 다그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시작해!』

‘알았어, 알았다고.’

스테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쓰러져 있던 자이언트 앤트의 꽁무니를 검으로 갈라내자, 끈적한 녹색과 누런빛이 뒤섞인 내장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벌써 이놈까지 다섯 마리째다.

‘웩.’

스테치와 엘레나가 스몰빙 던전에 들어왔을 때 몬스터들이 몰려왔던 것은, 처음 그들을 발견한 자이언트 앤트가 ‘경계 페로몬’을 마구 흩뿌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이 하려는 행동은 단순히 개미를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닌, 혼란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숨어, 얼른!』

이후 검에 아무런 향취가 나지 않도록 흙을 펴 바른 스테치는 마지막으로 자이언트 앤트의 사체를 스킬로 소각한 뒤, 엘레나와 함께 적당히 숨어 있을 벽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엘레나는 자리를 잡은 스테치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뒤 망토로 전신을 덮고 스킬을 사용했다.

“《카모플라쥬 클록》.”

질척한 기름이 벽면에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엘레나의 망토는 개미굴 내벽과 동화되어 갔다. 그리고 그렇게 모습을 숨긴 지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자이언트 앤트들이 우르르 좁은 통로로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공기 중에 대량으로 섞여 있는 온갖 진한 페로몬과 정작 도착해 보니 아무것도 없는 현장의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며 두리번거렸다.

사체를 해체한 것과 소각해 없앤 것은 이를 위함이었다.

“지금이다.”

스테치의 말과 함께 엘레나는 곧장 망토를 걷어낸 뒤 바닥을 기어 자이언트 앤트들의 몸뚱이 아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이언트 앤트들의 무리를 빠져나온 스테치들은 여전히 더듬이를 까딱이며 멈춰 서 있는 놈들을 뒤로 한 채 엘레나와 함께 전속력으로 통로를 내달렸고, 개미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스테치, 다시 한번 《애니멀 인스팅트》다!』

소수의 자이언트 앤트들은 자신들의 유생체와 여왕의 곁을 벗어나지 않고 지키며, 다른 작업은 그 외의 개미들이 끊임없이 통로를 돌아다니며 전부 해결한다.

그렇다면 만약 스테치가 개미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유인해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개미들이 포착된다면? 바로 그곳이 번데기나 여왕이 있는 방이리라.

때문에 개미굴 던전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며 땅속 깊숙이까지 있을 개미들을 모두 끌어 모으기 위해, 스테치와 엘레나는 미리 여러 마리의 자이언트 앤트들을 죽여 두었던 것이었다.

캉!

강하게 땅을 두들기자,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바짝 굳은 채 주변을 살피는 뒤쪽의 무수한 개미들, 그리고 스테치 일행보다 더 아래쪽에서 여전히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소수의 다른 개미들이 감지되었다.

“이쪽이야!”

스테치가 외치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구조가 복잡하긴 했지만, 통로들을 따라 움직이는 개미들이 전부 없어진 덕분에 탐지가 전혀 불가능했던 이전보단 훨씬 나았다.

번데기 방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자이언트 앤트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스테치는 페로몬을 남기는 것을 막기 위해 놈들을 보는 즉시 화염으로 태워 버렸다.

“《파이어볼》!”

화르륵!

번데기들이 바람 빠진 주머니처럼 오그라들며 녹아내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스테치는 빠르게 똑같은 방식을 이용하여 애벌레 방을 찾아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방을 돌보던 보모 역의 자이언트 앤트까지 확실히 불태운 스테치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휴, 거의 끝까지 온 것 같…… 아?”

스테치로부터 등을 돌리고 선 엘레나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꿈틀거리는 애벌레의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옆에 대충 흩어져 굴러다니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건…….”

엘레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팔찌나 반지 등의 패물을 주워 올렸다가 마치 감전이라도 당한 마냥, 화들짝 놀라며 그것들을 놓쳐 떨어뜨리고 말았다. 뒤따라온 스테치가 보니 멀쩡해 보이던 장신구들에서는 보랏빛의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레나는 사기에 민감한 엘프. 반지와 팔찌에 스며든 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으리라. 그녀는 이를 앙다물며 말했다.

“저건 우리 엘프들의 수공예품입니다. 아마 희생자들의 시신이 애벌레들의 먹이로 쓰이면서 남겨진 물건들이겠죠. 하지만…… 저래선 회수해서 유족들에게 돌려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더니 엘레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을 단검으로 베고 찔러대며 분풀이를 해댔다. 그 사이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어차피 아무도 써먹을 수 없는 물건이라면 우리가 회수하자. 《커스 아우라》를 사용하기 위해선 저것들이 꼭 필요해.』

‘…….’

《커스 아우라》처럼 강력한 어빌리티를 쓰려면 저주받은 아이템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과연 엘레나가 외부인이 종족의 공예품을 멋대로 가져가도록 놔둘지는 모를 일이었다.

“엘레나, 어차피 아무도 사용하지 못할 물건이라면 내가 가져도 될까?”

“그게 무슨…… 제정신인가요? 재수 없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엘레나에게, 스테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티팩트의 보호가 있으니 난 걱정할 필요 없어.”

엘레나는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스테치의 행동은 단순히 이상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숲의 던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자가, 어째서 자이언트 앤트의 생리에 이리도 해박한 것일까? 그리고 던전 키퍼와의 전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굳이 저주받은 아이템까지 착용해 스스로의 리스크를 끌어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가 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지만,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문제도 없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신구들을 회수한 뒤 발걸음을 옮겼고, 엘레나는 앞장서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좋아, 들어가 볼까?”

스테치가 애벌레 방 바로 옆에 위치한 대공동 입구를 보며 물었다. 슬쩍 보이는 대공동 안에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사이즈의 여왕개미, 퀸 앤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꽁무니 끝에서는 쉴 새 없이 새로운 알이 나오는 중이었으며, 옆으로는 두 마리의 수호 개미가, 그리고 대공동 바닥에는 수많은 알들이 가득 놓여져 있었다.

“선제공격을 가하겠습니다!”

엘레나는 대공동의 내리막길을 슬라이딩해 내려가며 활을 쏴 여왕개미의 부드러운 몸뚱이를 쏴 맞췄다.

“키에엑!”

첫 번째 화살이 퀸 앤트에게 적중하자마자, 여왕의 괴성과 함께 옆에 있던 자이언트 앤트 두 마리가 이어서 발사된 화살들을 외갑으로 튕겨 내며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직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엘레나, 알이!”

“!”

여왕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자마자, 대공동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알들이 일제히 터지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라났다.

애벌레에서부터 번데기로, 그리고 완전한 개미가 되기까지 5~6초도 채 걸리지 않는 폭발적인 기세였다. 여왕이 무언가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차, 넋을 너무 놓고 있었더니!’

“《파이어볼》!”

최고 화력으로 뻗어 나간 화염 구체가 퀸 앤트에게 닿기 직전, 완전 성장한 자이언트 앤트들이 머리의 단단한 외갑으로 불길을 막아섰다.

당연히 그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리는 없었지만, 여왕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에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뒤에서도 적이…….”

“《에어 버스트》!”

콰광!

엘레나의 경고에 스테치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뻗어 스킬을 시전하자, 바람의 구체가 대공동 입구를 무너뜨렸다.

그 탓에 뒤늦게 사태 파악이 되어 여왕의 방으로 복귀하려던 다른 개미들은 모두 바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공동 안에 남은 자이언트 앤트들은 스테치가 제압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스테치는 고민했다.

지금은 남은 마력량이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라면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에어 버스트》보다 확실하게 상대를 끝장낼 수 있는 스킬인 《파이어볼》을 사용해도, 자이언트 앤트의 몸을 사리지 않는 육탄방어를 뛰어넘기엔 한계가 뚜렷했다.

심지어 여왕은 스테치가 생각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알을 낳아 대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포기하고 물러서야 할 판국이었다.

생각보다 타이밍이 빨리 오긴 했지만, 방법은 이것뿐이다.

"커스 아우라!"

그 순간, 스테치의 몸에서부터 응축된 검은 파동이 대공동을 휩쓸며 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전신을 강제로 이완시켜 노곤하게 만드는 듯한 감각에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스테치가 고개를 들자 자이언트 앤트들은 스스로의 체중을 다리로 지탱하지 못한 나머지, 부들부들 떨며 차례로 바닥에 널부러지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여왕개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말했잖아, 도움이 될 거라고. 빨리 저 엘프한테 마무리 지으라 해.』

“큭…… 엘레나!”

“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라 화살을 활대에 채워 둔 채 머뭇거리던 엘레나가 반응하자, 스테치는 그녀에게 말했다.

“여왕의 숨통을 끊어! 오랫동안 붙잡진 못해…….”

그 말에 엘레나는 두 눈을 번뜩이며 화살을 한꺼번에 4개씩이나 뽑아 쥐고는, 전부 한 시위 안에 걸어두며 목표인 퀸 앤트를 노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엘레나에게 있어 자이언트 앤트들의 발이 묶인 지금은 차분히 상대를 조준할 수 있으니 여왕을 끝장내는 건 너무나도 간단했다.

“[빌어먹을 개미 새끼들…… 동족의 시신을 먹이로 삼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거라.]”

분노를 담아 중얼거린 엘레나는 화살을 쏴 날렸다.

날아간 화살들이 차례로 퀸 앤트의 몸에 박히며 부드러운 몸뚱이를 낡은 가죽 자루처럼 찢고 터뜨렸다.

“키에에엑!”

방패역인 부하들의 도움이 없는 한 퀸 앤트의 방어능력은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될 수준.

그치지 않고 쏟아지는 화살비에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버린 퀸 앤트가 내장과 피를 쏟으며 절명할 지경에 이르자, 스테치는 퀸 앤트를 향해 손을 뻗어 마력을 빨아들였다.

“커스 이팅!”

발동되어 있던 커스 아우라가 사라짐과 동시에, 거대한 퀸 앤트의 신체가 통째로 마력화하여 반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메멘토 모템은 어빌리티 사용을 중단했는지, 물에 푹 적셔진 종이마냥 무겁던 스테치의 몸은 다시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당신같이 무모하면서, 또 괴상한 인간은 처음 봤어요.”

퀸 앤트가 그대로 반지에 삼켜져 없어진 탓에 온 사방에 그대로 널부러져 있던 화살들을 회수하며 엘레나가 말하자, 스테치는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거기에 대해선 뭐라 변명할 방도가 없네…… 자, 그럼 가볼까.”

스테치는 엘레나의 부축을 받으며 아티펙트가 보관된 방으로 들어갔다.

꿈틀- 꿈틀-.

“저거야.”

마치 누군가의 몸에 아직도 붙어 있는 것처럼 맥동하는 심장 형태의 아티팩트가, 마치 메멘토 모템을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공중에 부유 중인 상태로 스테치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름도 용도도 모르는 아티팩트였지만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며 스테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붙잡았고, ‘심장’은 피처럼 붉은 액체가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듯하다가 퀸 앤트처럼 반지로 흡수되었다.

찌이익-!

“이스케이프!”

아티팩트의 처리가 확인되자마자, 스테치는 곧장 스크롤을 입으로 찢으며 무너져 내리는 개미굴 던전을 엘레나와 함께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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