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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9) (20/203)


20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9)
2021.10.21.


어둠의 숲 두 번째 던전을 무사히 탈출한 스테치는, 자이언트 앤트들과 퀸 앤트를 쓸어버리며 모아 둔 마력 잔량을 확인할 겸 메멘토 모템을 업그레이드 프로세스로 이행시켰다.

《아티팩트 『메멘토 모템』의 마력 한도가 250에서 450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어빌리티 : 커스 이팅(lv 4 -> lv 5).
저주와 마의 근원, 혹은 그 편린을 먹어치울 수 있습니다. ‘마력 흡수 효율이 증가합니다.’》

《메멘토 모템의 추가 어빌리티 해제 프로세스가 진행 중입니다. 조건을 만족시키면 해금 가능합니다.》

《현재 흡수한 아티팩트의 갯수 : 2》

《현재 저장된 마력량 : 28932》

“오오.”

스테치는 무심코 감탄을 흘렸다. 자이언트 앤트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거의 무아지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마력을 뽑아내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축적되어 있을 줄이야.

비록 이번엔 추가 스킬까지 얻진 못했지만 새 어빌리티를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스테치는 신규 어빌리티로 ‘커스 디바우러’를 해금하였다.

《어빌리티 : 커스 디바우러(lv 1).
응축된 사기와 저주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순수한 힘으로 전환시킵니다.》

커스 아우라를 처음 습득했을 때와 같이, 어빌리티에 대한 지식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스테치는 머리를 살짝 흔든 뒤 엘레나와 함께 던전이 무너지는 광경을 구경했다.

쿠르릉!

자이언트 앤트들이 어찌나 깊고 복잡하게도 굴을 파내렸는지, 던전의 바로 위쪽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들은 물론이고 지면까지 10m 이상 수직으로 푹 꺼져 버렸다.

수백 년은 되었을 거목들이 마치 땅으로 기둥을 박아 넣듯 싱크홀로 빠지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자, 가자. 이제 하나 남았어.”

스테치가 말했다.

“다음 던전은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날 저녁. 갑작스러운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뜯어먹던 고기를 입에 물고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엘레나는 그런 스테치에게 말했다.

“마지막 남은 곳은 레드트리 던전입니다. 이 숲에서 가장 오래되고, 그만큼 가장 지독한 던전이죠.”

단순히 오래된 던전의 난이도가 높다는 식의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라면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스테치가 다시 사슴 고기를 뜯어 먹으며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아. 위험하다고? 근데 내가 누구게? 바로 나거든.”

『잘나셨네, 아주.』

평소의 자신보다 더 기고만장해하는 스테치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중얼거리는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에 이어, 끈기 있게 설명하는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프 말이에요.”

스테치는 그제서야 귀를 쫑긋 세웠다.

“응?”

“레드트리 던전은 엘프들이 가장 많이 거주 중인 영역 근처에 있어요. 지금까지처럼 단 한 명의 엘프도 마주치지 않고 몰래 들어가고 나간다는 건 힘들 겁니다. 그러니 최소한 지금부터는 제 말에 따라서 움직여 주셔야만 합니다.”

스테치는 군말 없이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엘프들과 접촉점을 만들어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마침 그 말을 한 다음날 아침, 캠핑 장소를 정리하고 이동하려던 스테치는 엘레나가 바짝 굳은 채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래?”

“오래된 옛 흔적이군요. 이게 뭔지 아시겠나요?”

엘레나는 말없이 바닥을 활대로 가리켜 보였다.

얼핏 보면 눈치채지 못할 만한 사이즈의 작은 흔적이, 나뭇잎들 사이로 드러난 진흙바닥 위에 남아 있었다.

스테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거의 희미해진 흔적을 손으로 살살 쓸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슴 발자국인가?”

스테치는 발자국 추적에는 별로 일가견이 없었던 탓에 살짝 자신 없어하며 엘레나에게 물었으나, 엘레나가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되려 놀라 버렸다.

“어, 맞췄어?”

“비슷하긴 하지만, 아닙니다. 이건 스트라이더가 신는 부츠 자국이에요.”

스트라이더.

어둠의 숲에서 활동하는 엘프 정찰대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엘리트가 부여받는 최고의 직위였다. 소수의 엘프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패시브 스킬, ‘스트라이드’가 바로 그 이름의 유래.

스트라이더로 인정받은 이들은 특유의 스킬 덕택에 추적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인간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들은 치를 떨 정도라고 한다.

스테치는 그 설명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물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스트라이더라는 명칭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대단하고 유명하다면 인간들 쪽에서도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냐?”

엘레나는 순진한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스테치를 응시하며 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죠.”

“엉?”

“스트라이더들은 어지간해선 누군가가 자신들의 존재를 살아서 전하게 놔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거든요.”

“…….”

뼈가 있는 말이란 이런 것인가. 스테치는 순간 자신이 최강의(아마도)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면 승부에서라면 그들이라 할지라도 아텔리어 씨에게 밀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만약 이들이 작정하고 저격해 온다면 어디에서 공격했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설명하는 엘레나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자부심이 살짝 엿보였다. 그녀는 다시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누군가를 추적하거나, 혹은 자신이 추적당할 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제작된 스트라이더 전용의 특수한 부츠가 남긴 흔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특유의 부츠 굽을 사슴 발자국으로 착각하곤 하죠.”

엘레나가 발자국이 이어진 궤적을 향해 손을 천천히 허공에 그어 보이자, 그것을 눈으로 좇던 스테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일반적인 인간의 보폭은 1m도 채 못 되는 길이인데 반해, 이 스트라이더라는 녀석의 발자국은 첫발부터 다음 발까지 무려 5m가 넘는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시겠나요? 우린 지금 이 시간부로 스트라이더들의 영역에 발을 딛은 거고, 일단 그들에게 추적당하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들킬 경우엔 차라리 그 자리에 서 계세요. 스트라이더에게 있어 도망치는 대상은 무조건 사살이니까요.”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처구니가 없어진 스테치가 엘레나에게 물었다.

“도망치는 게 안 된다고 그 자리에 있으라니, 그게 어째서 해결책이 되는 건데?”

“당신이 무슨 목적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도, 죽으면 그것도 다 의미 없잖아요?”

엘레나는 재차 강조한 뒤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내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스테치는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녀는 스테치에게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고 걷는 방법, 그리고 추적당할 때 상대를 따돌리는 방법 등을 이동하는 내내 교육 시켰다.

아무래도 정찰대 출신으로서 스테치의 발놀림이나 행동거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숲속을 거니는 중반부터는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저녁만 되면 온몸이 쑤실 지경인 데다, 오히려 그에 반비례하여 긴장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풀려갔다.

주의하라고 경고해 준 엘레나의 말과는 달리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도 한몫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건은 예상치 못한 때 터졌다.

* * *

“…….”

“왜 그래?”

점심으로 간단한 보존식을 먹고 일어난 스테치는 숲속 저편 어딘가를 바라보는 엘레나에게 물었다. 그녀가 쳐다보는 방향을 봐도, 어둠의 숲은 그 이름에 걸맞게 낮에도 어두운 탓에 별로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데…….”

“그게 그렇게나 이상한 거야? 어둠의 숲 동물들은 원래 조용하잖아.”

같은 사슴조차도 어둠의 숲에서 사는 개체는 유달리 소리를 죽이고 지내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스테치는 엘레나의 우려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이 고요함과 침묵이 유달리 평소와는 이질적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짐을 챙기죠, 슬슬 이동할 때입니다.”

스테치가 유령불을 끄고 가림막을 걷은 뒤 엘레나의 배낭에 넣어주는 사이, 엘레나는 마치 수상쩍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며 바닥의 흔적을 흙과 나뭇잎 등으로 덮어서 가려 버렸다.

두 번째 던전 스몰빙으로부터 레드트리로 향한 지 사흘째. 엘레나의 지도로 확인해 본 결과 던전까지는 무려 하루를 꼬박 새우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트라이더는 물론이고 그냥 엘프들조차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스테치가 여유롭게 구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스테치.”

“음?”

“분명, 청각과 촉각을 강화시키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죠.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오늘따라 제법 거동이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숲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엘레나다. 스테치는 말없이 스킬을 발동했다.

“《애니멀 인스팅트》.”

스킬을 사용한 스테치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가 왜 이토록 불안에 떠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 게 아니라 최소한 들려야 할 동물의 호흡, 또는 발자국 소리마저 없이 사방이 고요했다. 들리는 거라곤 자신과 엘레나의 숨소리뿐.

마치 주변 생물들이 죄다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건…….”

“이상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엘레나의 조용한 지시에 스테치는 입을 다물었다.

“근처의 뭔가가 저희를 노리고 있는 것 같군요. 위치를 파악해 봐야겠습니다.”

엘레나는 활을 점검하듯 시위를 몇 번 튕겨 보며 지나가듯 무심하게 말했고, 추적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그녀의 말에 스테치는 몸을 뻣뻣이 굳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해진 상태였다.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이쪽을 노리고 있는 주제에, 왜 접근할 생각은 또 안 하지?’

스테치가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엘레나는 조용히 스킬을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 디텍트 호스틸리티(lv 4).
‘적의’를 감지하게 됩니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적의를 발산하는 상대의 위치, 공격 타이밍 등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직선.

찌르는 듯한 적의가 가시화한 붉은 선이 엘레나의 시선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며, 스테치의 등에 직선으로 닿는 모습에 엘레나는 일순 넋을 잃었다.

어디서부터 뻗어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을 굴리자, 그 거리는 대략 300m.

통상적인 인식의 범위 밖에서부터 이 정도로 선명한 살기. 그리고 곧장 공격하지 않았던 이유. 모든 것이 퍼즐 조각처럼 빠르게 정리되며 맞아떨어지는 순간, 엘레나는 스테치에게 손을 뻗었다.

“위험-!”

퍼억-!

고깃덩이를 쳐 날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갯죽지를 굵직한 화살로 관통당한 스테치는 공중으로 붕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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