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10) (21/203)


21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 (10)
2021.10.22.


쿠당탕!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에 엎어진 스테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사실 화살을 쏘아 보낸 장력과 비행거리를 생각해 보면 팔이나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 나가면서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이었지만, 스테치의 경우엔 그냥 기절하는 정도로 끝났다.

“아텔리어 씨!”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며 엘레나가 엄청난 피를 땅에 흩뿌린 채 널브러진 스테치에게 다가가자, 두 번째 화살이 그녀의 발치에 꽂혔다.

콱!

“윽…….”

당연하겠지만 이건 일부러 빗맞힌 것이었다. 다음은 그녀의 머리통에 박힐지도 모르는 일. 엘레나가 손을 거둬들이자 불과 몇 초 뒤, 두 개의 인영이 거대 나무 기둥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안녕, 엘레나.]”

바닥에 착지한 두 엘프 중 하나가 눈을 찡긋하며 엘레나에게 아는 체 하자, 엘레나는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남성에게 대꾸했다.

“[대체 이게 뭐하자는 짓이지?]”

“[지금 본인이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날카롭게 쏘아 붙이자, 엘레나는 입을 콱 다물고선 애꿎은 땅바닥만 흘겼다.

“[감히 우리들의 순찰 코스에서 인간이랑 얼쩡거리다니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엘레나.]”

여성은 새 화살 하나를 통에서 꺼낸 다음 손안에서 위협적으로 빙글빙글 돌려 보이며 천천히, 엘레나에게로 다가감과 동시에 한 마디씩 차례로 내뱉었다.

“[처음 봤을 땐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네가 인간이랑 있을 때 보인 태도는 암만 봐도 정상이 아니더라고.]”

천천히 접근해오는 여성으로부터 뒷걸음질 친 엘레나는 바닥에 쓰러진 스테치의 앞을 가로막아 섰고, 그 모습을 본 여성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는 거야?]”

엘레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힘겹게 말했다.

“[넌…… 아니,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제아무리 엘레나라 할지라도 스트라이더를 둘씩이나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항복할 수는 없었기에, 엘레나는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스테치를 보호하고자 나섰다.

“[이 사람은 레드트리까지 가야만 해. 가서, 함께 해 줘야만 하는 일이 있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엘레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남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자자, 거기까지. 그래도 같은 스트라이더 출신이었는데 너무 삭막하게 굴지 말자고.]”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여성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친 남성은, 노려보는 여성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엘레나를 가볍게 지나치고 스테치에게 접근했다.

“[물러…….]”

“[엘레나, 너도 마찬가지야. 한 때 같은 소속이었던 엘프들끼리 싸우고 싶진 않다.]”

흥얼거리듯 말하는 제스터의 말 속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기를 감지한 엘레나는,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쓰러진 스테치의 품을 뒤적인 제스터가 꺼내 든 것은, 언젠가 스테치가 못생겼다고 평한 타원형 장식의 펜던트. 엘레나가 그토록 원했던 문제의 유물이었다.

“[이것 봐. 더러운 인간 놈이 유물 수호자에게서 유물을 뺏고 협박한 모양이야.]”

그 모습을 본 순간, 엘레나는 절망했다.

자신이 굳이 혼자서 유물을 되찾으려고 한 이유, 그리고 그것을 위해 쌓아온 모든 노력이 지금, 이 순간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유물을 쳐다보던 여성은, 홱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 다시 엘레나를 쳐다본 후 경고하듯 말했다.

“[……저 유물 문제에 대한 변명은 대회의에서 듣도록 하지.]”

남성은 그 말에 여성이 내민 손바닥 위에 싱글벙글 웃으며 유물을 살포시 올려놓고, 쓰러진 스테치의 몸뚱이를 어깨에 들쳐 멨다.

“[으쌰.]”

“[제스터, 지금 뭐하자는 건데? 시체는 그냥 여기서 썩게 내버려 둬.]”

“[무슨 말이야? 이 자식 아직 살아 있다고.]”

“[뭐?]”

여성은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 정도의 화살을 맞고도 살아남다니, 단순히 몸이 단단하다는 수준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생존력이다.

운이 좋았던 건가? 어느 쪽이건 저 상태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여성이 말없이 고민하고 있자, 제스터가 말했다.

“[애초에 아무런 생각 없이 활부터 쏘면 안 된다고 말한 건 나였어. 인간 놈이 동료를 끌고 왔거나, 뭐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지 물어볼 수 있게 처음부터 생포할 생각을 했어야지.]”

“[……어차피 이 정도로 숲 깊숙이까지 홀로 들어올 정도면 동료고 나발이고 있을 리가 없잖아. 네놈의 그 저열한 취미에 맞춰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여성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래, 뭐 좋다 이거야. 신문이든 뭐든 원한다면 데려가라고. 어차피 곧 뒈질 테니까.]”

* * *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일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 높이 나무 위 집에 있던 이들의 힐끔거리는 시선까지 전부 마을에 들어서던 제스터 일행에게로 꽂혔다.

처음엔 마을의 주민들 모두 인간의 모습에 바싹 굳어 있었으나, 곧 사냥감을 챙겨서 돌아오는 사냥꾼처럼 당당하게 정문을 들어서는 스트라이더를 보곤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엘레나는 눈에 띄게 어두워진 표정이 되어, 죄인처럼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뭐해, 엘레나. 웃어야지?]”

짜증 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제스터를 보자 엘레나는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어깨에는 여전히 피를 뚝뚝 흘리는 스테치가 축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꺼져.]”

엘레나는 제스터에게 씹어뱉듯이 말하는 한편, 스테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훔쳐보았다.

사실 그녀로선 스테치를 염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해 버리기엔 스테치가 던전을 파괴해 온 업적과 공이 너무나도 컸다.

인간성이야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실제로 한 일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제스터는 엘레나가 스테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곤 중얼거렸다.

“[희안하네. 그렇게 피를 흘렸는데도 죽질 않아.]”

갑자기 여성이 뒤에서부터 걸어오더니 스테치와 엘레나 사이를 가로막고는 말했다.

“[저 남자가 걱정되나, 엘레나?]”

“[어떻게 해서든 나한테 동족의 배신자 딱지를 붙이고 싶은 모양인데, 소용없어.]”

엘레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저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지금이라도 이런 대우는 그만두게 될걸.]”

“[무슨 헛소리를…… 장로들, 아니 네 할머니 앞에서도 그딴 식으로 떠들어 보시지.]”

“…….”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으로 엘레나가 발걸음을 빨리 하여 앞서가자, 여성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나 있는 거대한 수백 년 지기 고목.

그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원형의 나선 계단을 한참 동안 오르자, 엘레나와 나머지들은 꼭대기에 위치한 돔 형태의 구조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자 그럼…….]”

털썩!

스테치를 대충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은 제스터는 화살통에서 특이한 형태의 화살을 꺼냈다. 일반적인 화살과는 달리 그것의 화살촉은 매의 머리 형상을 띄고 있었다.

대충 무언가를 휘갈겨 넣은 쪽지를 화살촉의 부리 부분에 물려놓은 제스터는, 화살을 신중하게 활시위에 걸어놓은 뒤 발사했다.

“[미테레 넌티어스!]”

피융-.

멀찍이 날아간 화살 주변을 푸른 불꽃이 감싸더니, 이윽고 거대한 새의 형상을 이루고선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갔다.

“[보냈느냐?]”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묻자 제스터는 뒤를 돌아보았고, 한창 엘레나의 속을 긁던 여성은 황급히 부복하며 말했다.

“[예, 방금 막.]”

새가 품고 날아간 메세지는 다름아닌 각 부족장들에 대한 집결 요청과 상황 설명.

백발의 여인은 엘레나와 제스터를 포함해 다른 젊은이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했다.]”

백발 여인은 무릎을 꿇은 엘프 여성에게 말했다.

“[스트라이더 에이다. 그리고 스트라이더 제스터, 모두 수고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장로님.]”

에이다는 황송하다는 듯 공손히 대답했다. 여인은 에이다의 옆에 있던 엘레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이구나, 유물 수호자 엘레나.]”

“[벨라도라 장로님.]”

엘레나가 고개를 한층 더 숙이자, 장로 벨라도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제스터가 던져놓은 스테치를 보며 물었다.

“[그 인간은 뭐지?]”

“[무려 그 유물 수호자에게서 유물을 강탈한 것도 모자라, 협박까지 한 인간입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잡아왔습죠.]”

제스터가 열정적으로 나서서 나불나불 설명하자, 엘레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벨라도라는 스테치에게 향했던 눈길을 엘레나에게로 돌리며 물었다.

“[사실이냐?]”

“[……제가 그에게 유물을 빼앗겼습니다.]”

짤막하게 답하는 엘레나. 추궁당하는 입장에서 답을 안 할 수도, 거짓을 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의 그녀로선 이 짧은 한마디가 최선이었다. 벨라도라는 이 어색한 답변으로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제스터에게 물었다.

“[그런 인간을 자네는 어째서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

“[저, 그게…… 신문이 필요할까 해서요.]”

평소와는 달리 제스터는 우물쭈물 말을 아꼈고, 벨라도라는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둠의 숲에서 최심부에 위치한 마을. 그런 마을의 ‘근처’까지 인간이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있어 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사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를 흘렸는데도 심장은 계속 뛰더라고요.]”

제스터의 말에 벨라도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테치의 신문을 위한 감금과 치료를 지시했고, 제스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스테치를 다시 번쩍 들어올렸다.

“[엘레나는 따라오렴.]”

“[……예.]”

엘레나는 벨라도라를 따라 돔 형태의 구조물로 들어갔다.

복층 구조로 되어 있는 이 건축물은 1층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인 데에 반해, 2층에 있는 이들이 자리에 앉으면 1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스타디움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다.

엘레나가 아는 한 이 건물은 어둠의 숲 엘프들의 사회에서 중대사를 결정하는 대회의장, 혹은 죄인을 심판하는 장소로서 쓰여 왔다. 그런데 굳이 이런 장소로 불러낸 것은 자신을 죄인으로서 대하겠다는 의미인가.

엘레나가 속으로 생각하던 차에, 벨라도라가 말했다.

“[레드트리 던전은 이제 억제하기 힘든 단계에 이르렀다. 나도, 우리 마을도 이제는 한계야.]”

“[예?]”

뜬금없는 말에 잠깐 어리둥절한 엘레나였으나, 곧 그 의미를 알아듣고 놀라서 물었다.

“[대체 얼마나 커진 겁니까?]”

“[이제는 그 사기가 던전 입구 밖으로 직접 노출될 지경이다. 불과 며칠 전에는 마을 주민들까지 던전이 직접 낚아채갔지.]”

“[그런…….]”

엘레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벨라도라가 장로로 있는 이 마을은, 레드트리 던전을 억제하는 구속구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숲에서 가장 오래된 던전인 레드트리는 생물체처럼 틈만 나면 영역을 넓히려 드는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벨라도라는 스트라이더들과 소수의 사병으로 이를 억제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엘레나의 앞에서 공식적으로 던전 억제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갑자기 목소리 톤이 싹 바뀌더니, 벨라도라는 엘레나를 힐난하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마을이 이렇게 힘든 상황에 처한 판국에, 너는 인간에게 유물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길안내까지 해 주었단 말이냐.]”

“[저는……!]”

“[나를 포함한 나머지 장로들은 이 사건을 그냥 좌시하고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올리비아 장로도 동의할 테지.]”

벨라도라의 가시 돋힌 선언이 비수처럼 날아가 엘레나에게 꽂히는 듯했다.

* * *

『……어나.』

“으윽…….”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스테치는 몸을 뒤척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감히 나의 단잠을 방해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스테치는 마치 새우라도 된 마냥 몸을 움츠렸다.

『일어나!!』

“으헥!”

깜짝 놀란 스테치는 벌떡 일어나며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그는 온갖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선명해진 야유 소리에 압도되어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죽여라!]”

“[더러운 인간에게 피의 심판을!]”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지르는 수백 명의 엘프들에게 내려다보이며, 스테치는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놓인 케이지에 갇혀 있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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