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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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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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1)
2021.10.23.
『드디어 일어났구나. 난 치료까진 해 줘도 기절한 놈을 깨우는 건 못하거든.』
메멘토 모템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함성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 수많은 엘프들.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환호.
자신을 가두고 있는 나무 케이지.
잠깐 잠들어 있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아니, 자신은 애초에 어쩌다가 잠들었던 것인지? 온갖 의문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그동안 심심했는지 힘차게 말했다.
『자 짧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라. 엘프 놈들한테 화살 맞고 훅 가려던 걸 내가 간신히 붙잡아 살려놓았고, 너는 기절한 지 꼬박 사흘 뒤에야 일어난 거야. 그리고 지금 여기는 어디냐면, 인간 스테치의 심판대 겸 신문소 겸 공개 처형장이야.』
‘???’
하나만 들어도 충격 받을 일들을 한꺼번에 들은 스테치는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조용!]”
엄숙한 소리가 돔에 울려 퍼지자 아우성에 가깝게 외치던 좌중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케이지 안에서 양손이 포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스테치는, 고개를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곧,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물들 중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고 앞쪽에 앉아 있던 다섯의 백발 남녀 엘프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 어둠의 숲에 침입한 인간의 신문을 진행한다. 당사자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사를 세워둘 것이며, 신문의 진행은 벨라도라 멜리스가 맡겠다.]”
쿠르릉-, 쿵-!
백발 엘프 여성의 말에 맞춰서 리듬감 있게 발을 구르는 방청자들.
‘사실 번역 같은 것도 필요 없는데…….’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스테치는 벨라도라의 옆에 선 통역 역할의 젊은 엘프 여성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식물성 종이를 눈으로 훑으며 스테치에게 물었다.
“[인간에게 묻겠다. 그대는 숲에 들어와서 유물 수호자 엘레나 드레이노어가 지키고 있던 유물을 강탈했다. 맞는가?]”
순간 스테치를 지켜보던 엘프들 모두가 긴장과 경악으로 헛숨을 들이켰고, 스테치는 통역인의 번역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는 어떻게 된 거지? 빠르게 눈알을 굴린 그는, 곧 다섯 엘프들 중 맨 오른쪽 엘프 여인의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스테치를 바라보는 엘레나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같은 엘프라서 그런가, 나 같은 취급은 안 받는 모양이군.’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던데…….』
메멘토 모템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는 한편, 스테치는 말했다.
“예, 맞습니다.”
반응은 엄청났다.
스테치가 잡힌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저런 놈도 다 있냐는 듯한 경멸의 시선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다.
유물이 엘프들에게 이만큼이나 중요한 물건인지 알 턱이 없었던 스테치로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엘레나한테만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어?’
사람들의 분위기가 끓어오르려는 것을 진정시킨 벨라도라는, 이어서 물었다.
“[그 후 유물을 빌미로 유물 수호자 엘레나를 겁박해서 어둠의 숲 길안내를 시켰다는데, 그것 또한 맞는가?]”
“……예.”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기에, 스테치는 하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렇게 불과 몇 분 만에 찢어 죽여도 모자를 놈이 되어 버린 스테치에게, 벨라도라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 숲으로 굳이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지? 노예로 쓸 동포들의 납치가 목적이냐?]”
그런 일이 상당히 자주 있었던 모양인지, 몇몇 엘프들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스테치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아닙니다, 제 목적은…… 제 목적은 숲속에 있는 던전을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예상외였던 모양인지, 대부분의 엘프들은 방금 전까지 화내던 것도 잊은 채 어리둥절해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벨라도라의 옆으로 통역을 담당하던 에이바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소곤거렸다.
“[장로님, 근 1~2주일 사이에 드라이룻과 스몰빙 던전이 원인불명의 이유로 붕괴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시기상으로는 엘레나가 저 인간을 목격했던 타이밍과 일치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벨라도라가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던전의 아티팩트 확보를 위해 참여한 병력의 수, 그리고 그들이 현재 대기 중인 위치를 말해 보아라.]”
“네?”
스테치가 멍청히 되묻자, 벨라도라는 답답한지 그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탐사대의 물자 보급 계획은? 병력의 수준은 어떻지?]”
그 말에 스테치랑 메멘토 모템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툭 내뱉었다.
“그런 거 없는데요.”
『그런 거 없는데.』
이 전혀 엉뚱한 대답에 침묵으로 휩싸이는 엘프 군중들. 스테치가 흘끗 바라보자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고 있는 엘레나가 보였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겠는가? 자기 혼자서 전부 해치우는 판국에 무슨 ‘병력’이 필요하단 소리인지. 그러나 상식적으로 당연히 저런 대답에 납득할 리 만무한 엘프들은 조금씩 성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그럼 던전을 혼자서 무너뜨렸다 이 소리인가?]”
“[역시 인간은 저렇다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투성이라고!]”
벨라도라도 이런 식의 답은 기대하지 않았는지, 평온하던 표정을 싹 지우며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남성 엘프 한 명이 스테치가 있던 1층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
“[제스터, 시작해라.]”
“[예입.]”
벨라도라의 지시에 제스터는 시원스레 대답하고선 나무 케이지를 열고 스테치에게 다가갔다.
무슨 꿍꿍이지? 미심쩍은 눈초리로 스테치가 무릎을 꿇은 채 제스터를 바라보자, 그는 싱긋 웃더니 스테치를 일으켜 세우고선 다짜고짜 보디 블로우를 날렸다.
퍼억!
“~~?!”
느리지만 확실히 복부를 죄어오듯 퍼져 나가는 격통에 스테치가 바람 새는 듯한 소리를 흘리자, 제스터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킬킬거리며 신나게 주먹질을 시작했다.
엘프들은 돔 바닥에 흩뿌려지는 피와 울려 퍼지는 둔탁한 타격음에 만족스러워했고, 그러는 중에 벨라도라의 목소리가 스테치의 귀로 어렴풋이 들려왔다.
“[제대로 된 진실을 말하기 전까지 고문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 이제…….]”
벨라도라는 시선을 엘레나에게로 돌렸다.
“[‘공범자’인 엘레나 드레이노어의 발언을 허가함과 동시에 신문을 시작한다.]”
온몸이 다진 고기처럼 떡이 되어 가던 스테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납득 했다. 어째서 엘레나가 스테치에 대해서 일체의 변호 없이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그녀의 행위 또한 엘프들에게 그 진의를 의심받고 있었던 탓에 지금껏 발언권이 제한되었던 것이었다.
“[먼저, 왜 유물을 빼앗긴 직후 부족에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지? 왜 저 인간의 협박을 고분고분 따랐느냔 말이다.]”
엘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처음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첫째로는 유물 수호자인 자신이 유물을 빼앗겼다고 통보하는 순간, 자신이 속한 부족 전체가 책임을 묻게 될 수 있었다.
심하면 그녀의 친족과 측근들은 사태 종료 후 사형될 가능성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며, 부족 전체가 와해되는 건 사실상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둘째는 스테치가 악인이었을 경우, 괜히 그를 자극했다가는 엘프들 전체가 몰살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스테치가 보인 능력과 행동들은, 최소한 엘레나 스스로가 ‘희망’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엘레나는 말했다.
“[저 자가 행하는 던전 파괴 행위가 엘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허풍이건 뭐건 간에 저 인간이 드라이룻과 스몰빙을 차례로 무너뜨린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녀의 발언을 들은 벨라도라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엘레나 드레이노어, 우리 모두 던전 격파를 위해선 최소한 군대급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는 저 인간이 해온 모든 행위들을 봐왔다는 것일 테지. 그렇다면 그가 준비한 병력과 물자는 얼마나 되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숨겨놓은 병력도, 물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저기 인간과 저, 단 둘이서 한 행동입니다.]”
“[엘레나!]”
벨라도라가 아닌, 그녀의 맨 왼쪽에 앉아 있던 여성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다그치듯 소리쳤다.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통 모르겠구나. 무엇이 아쉬워서 저 인간을 감싼단 말이냐?]”
“[올리비아 장로님,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엘레나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그의 무엇을 보고 이렇게까지 그의 행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인지를.]”
“[저 인간의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는 거냐?]”
“[저 자는……?]”
막 입을 떼려던 엘레나는 물론이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다섯 장로들은, 방청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선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저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그런 목소리들 사이로 제스터의 웃음기 섞인, 그러나 이번엔 상당히 당황하고 난처해하는 듯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 어라…… 이상하네~.]”
돔 1층에 놓인 케이지를 중심으로 피가 온갖 곳에 튀어 있었다.
장로들이 엘레나에게 질문하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스테치는 제스터에 의해 자그마한 나이프로 복부를 쑤셔지고, 뼈가 부러지며 안와가 내려앉을 정도의 기세로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처음엔 시시덕거리던 제스터와 다른 관중들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피만 요란하게 튀었을 뿐 스테치의 상태는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피부가 찢어지고 피는 흘러내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말끔해져 있었다.
“웃기지 마, 새끼야.”
제스터가 저려 오는 손을 흔들고 있자, 스테치의 목소리가 제스터의 귀로 확실히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테치는 제스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딱히 저항하는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게나 곤죽이 되었는데도 기세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패시브 스킬 : 리액티브 스킨(lv 1).
낮은 확률로 충격에 대한 데미지를 일부 감소시켜 줍니다. 숙련도가 높을수록 스킬의 발동 확률 및 데미지 감소율이 증가합니다.》
고통이 없진 않았다. 사람인지라 두들겨 맞으면 아프고, 베이고 찔리면 괴롭다. 하지만 메멘토 모템의 도움과 신규 패시브 스킬인 《리액티브 스킨》 덕분에 스테치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스테치는 씨익 웃어 보이며 바로 근처의 제스터에게만 들릴 정도의 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딱 이틀 정도만 이렇게 쉬지 않고 해 보자. 네 주먹뼈가 먼저 부러질지 내가 아작 날지 한 번 보게. 응?”
“하하, 그건 봐주라아.”
흡사 광기와도 같은 모습에 질려 버린 제스터.
위에 있던 장로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제스터에게 일단 그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엘레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장로님이 말씀하셨죠, 이제 한계라고.]”
벨라도라가 그 말에 눈을 껌뻑이자, 엘레나는 손가락으로 여전히 기세등등한 스테치를 가리켰다.
“[그 해결책이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몬스터의 마력과, 던전의 사기를 빨아들일 수 있는 자를 제가 데려왔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바로 이해할 수도 없었다. 벨라도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올리비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니, 엘레나? 넌 지금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물리법칙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거라고.]”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마력을 뽑아낸다는 것은 한번 물에 탄 차의 성분을 다시 분리해낸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장로들이 납득에 앞서 이해조차 못 하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자, 쭉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이바가 말했다.
“[몬스터를 내보내십시오.]”
“[음?]”
장로들이 일제히 에이바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죽거리며 다시 말했다.
“[처형용으로 준비해둔 몬스터가 있지 않습니까? 직접 이 자리에서 실험해 보면 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