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2) (23/203)


23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2)
2021.10.24.


에이바의 제안에 장로들은 다시 엘레나를 되돌아보았다. 엘레나는 아주 잠깐, 스테치의 목숨 대가로 괜한 저울질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주장하는 내용은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고, 무엇보다도 엘프들이 준비했다는 몬스터 정도에 스테치가 질 거란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좋습니다.]”

에이바가 아래쪽에서 지시를 기다리던 제스터에게 손짓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스테치의 주위에 둘러쳐진 케이지, 그리고 양손의 포박과 연결된 지면의 고정쇠를 치웠다.

여전히 손은 묶여 있었지만, 최소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스테치는 제스터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자는 건데?”

“뭐긴 뭐야, 네놈의 끝이 다가온 거지.”

제스터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피식거리며 훌쩍 뛰어올라 에이바와 벨라도라가 있는 위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돔의 사방에 배치된 나무 격벽 중 하나가 묵직한 소음과 함께 열렸다.

쿠르르릉-.

쿵-. 쿵-.

‘어?’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돔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곰.

곰 한 마리가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기며 스테치가 있는 방향으로 코를 들이밀며 뜨거운 입김을 뿜어냈다.

‘아머드 베어? 대체 저건 또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스테치는 어이없어하며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아머드 베어를 훑어보았다.

토양에 축적된 금속 성분을 흡수하여 체모와 가죽을 강화하는 아머드 베어는, 절대로 개인이 처치하거나 부릴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이런 곳까지 데려온 걸까?

스테치가 자세히 살펴보니 녀석의 모질은 형편없었고, 두 눈 주변은 아예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의 상처와 흉터들로 가득했다. 엘프들이 저 정도의 몬스터를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지 스테치로선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저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장로중 하나가 묻자, 에이바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엘레나의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부족하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누가 봐도 심술에 가까웠지만, 벨라도라를 포함한 장로들은 그 이상의 질문을 그만두고선 스테치에게 말했다.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라.]”

‘자기 방어가 허용된단 소리인가? 그나저나 저런 괴물을 상대로 무기고 뭐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니 야박하구먼.’

스테치에게 현재 남아 있는 건 입고 있는 바지와 아마도 엘프들이 장비들을 압류해가는 와중에 차마 가져갈 수 없어서 남겨놓았을 저주받은 팔찌와 반지뿐이었다. 양손을 쥐락펴락하던 스테치가 물었다.

‘엘프들이 왜 넌 안 뽑아갔냐?’

스테치가 묻자, 중지에 끼워진 반지가 피하에서부터 솟아오르듯 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게 속 편해서 숨어 있던 것뿐이야. 자, 이제…….』

스테치는 주변의 냄새를 맡는 아머드 베어를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 사실상 아머드 베어는 살아 움직이는 강철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그렇기에 엘프들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녀석의 눈을 노렸을 것이다.

‘한 번도 아머드 베어를 상대로 싸워 본 적은 없는데.’

일반적인 모험가들이 아머드 베어랑 마주치면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정령 진보다는 좀 더 상식적인 수준의 재해라고나 할까?

‘《파이어볼》!’

생물체를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스킬. 스테치가 발사한 화염구가 닿으려는 찰나, 아머드 베어는 괴성을 지르며 치켜 올린 앞발로 그것을 쳐 없애 버렸다.

워낙 강력해 보이는 외견 탓에 공격이 무력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크와아악!”

‘눈도 안 보이는데 제법 기민한걸.’

『오히려 그 탓에 감각이 예민해진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어때, 《에어 버스트》!’

제아무리 감각이 예민해도 저 덩치에 감지할 수도 없는 공기 덩어리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마치 물을 타듯 부드럽게 날아간 구체가 아머드 베어의 머리통에 닿자, 철판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소리와 동시에 거센 돌풍이 돔 전체로 퍼져 나갔다.

터어엉-!

“[우와아악!]”

“[갑자기 무슨…….]”

다섯 장로들을 포함해 스테치가 무얼 하나 지켜보던 엘프들은 갑작스레 2층까지 밀려오는 풍압에 밀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크욱?!”

나무를 통째로 박살 내고, 지면을 뒤엎는 위력의 《에어 버스트》를 맞고도 다시 자세를 되잡는 아머드 베어.

과연 맷집이 장난이 아니다. 계속해서 날아오는 공격에 감을 잡은 모양인지, 녀석은 스테치가 있는 방향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우옷!”

옆 구르기로 산사태를 방불케 하는 덮치기를 회피한 스테치. 이렇게 된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사용해 보는 수밖에는 없다.

‘《아크》!’

파지직!

보랏빛 전기 줄기가 목표의 몸에 닿자, 번쩍하는 섬광이 두어 번 터지며 아머드 베어의 전신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편 막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투를 지켜보는 엘프들, 심지어 엘레나와 스테치에 대해 코웃음을 쳤던 에이바나 의기양양해하던 제스터까지 모두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처음 스테치의 전투를 봤을 적 엘레나의 반응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기에, 그녀는 아주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반지는 뭐지, 제스터?]”

에이바가 제스터를 노려보며 물었다. 마법을 난사해대는 스테치의 손에서 저토록 밝게 빛나고 있는 반지를, 상식적으로 봉사가 아닌 이상에야 모르고 지나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제스터는 더듬거리며 항변했다.

“[나, 나도 몰라! 몸수색 할 때 저런 물건은 없었다고!]”

에이바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시선을 스테치에게로 돌렸다.

몸수색을 하고 그의 몸에 남겨진 물품은 저주받은 아이템인 팔찌 하나와 반지 하나. 그런데 그런 걸 장비하고도 어떻게 저리 재빠른 움직임을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한편 전투를 지켜보던 엘프들 모두 스테치를 마법사라고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진짜 마법사의 마법 스킬이 조각배에 가깝다면, 지금 스테치가 보여주는 것은 그 조각배를 덮치는 파도에 가까운 수준이었으니까.

‘쓰러져라 좀!’

스테치는 진땀을 흘렸다.

스킬들이 전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화살과 고문 등에 의해 상처 입은 몸을 치료하는 데에 소모된 마력량은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위험한 상황.

‘《아크》!’

다시금 난무하는 스파크 세례에 맞고 비틀거리는 아머드 베어. 《에어 버스트》나 《파이어볼》에 비해 전격계 스킬인 《아크》는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스킬이라 아머드 베어의 입장에선 상당히 성가시긴 했지만, 그래 봤자 딱 그 정도.

아머드 베어를 상대로 이 정도의 스킬은 몇십 번을 날려야 효과가 있겠지만, 지금 스테치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흐, 흐하하하!]”

에이바는 안도감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이지만 그녀조차 스테치의 강력한 기술에 놀랐으나, 아머드 베어를 상대론 역시 무리였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아머드 베어같은 괴물을 길들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고생이 결국 빛을 발하는구나!’

한편, 스테치는 에이바의 웃음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엘프들이 아머드 베어를 부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뭐였더라? 상처로 못 뜨는 눈을 본 스테치는 퍼뜩 떠올렸다.

강철 덩어리든 뭐든 간에 아머드 베어는 엄연한 생물. 엘프들이 녀석의 눈을 공략했다면, 자신도 공략법을 그에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멍청하긴!’

왜 이 생각을 지금 했을까. 스테치는 혀를 차며 빠른 속도로 태산같이 굳건히 서 있는 아머드 베어를 향해 돌진했고, 한창 그 모습을 비웃어대던 에이바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돌진이라고?]”

아머드 베어의 앞발은 살짝 휘두르기만 해도, 맞은 이의 뼈를 부수고 살갗을 찢어발기는 흉기 그 자체다. 그런데 그 안으로 파고들다니?

불과 몇 미터의 간극을 두고, 스테치는 손을 뻗었다.

‘《아크》!’

굵직한 스파크 줄기가 머리통에 명중하자, 아머드 베어는 입을 벌리며 몸을 뒤흔들었다. 머뭇거리는 일 없이, 스테치는 차례로 스킬을 시전했다.

쇼크로 입을 벌리게 된 아머드 베어의 뒷다리를 향해 《에어 버스트》.

앞다리를 휘두를 틈도 없이 균형을 잃고 넘어진 아머드 베어의 벌어진 주둥이에 손을 처박은 뒤 그대로 《파이어볼》.

푸화아악!

목구멍으로 넘실거리며 들어오는 뜨거운 불길에 아머드 베어는 전에 없이 미쳐 날뛰며 입을 덜컥 닫았지만, 스테치는 이미 손을 뺀 뒤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속이 절절 타들어 가는 와중에 언제까지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머드 베어가 괴로움에 제대로 일어설 생각도 미처 못 하고 버둥거리며 입을 다시 열자마자, 스테치는 기다렸다는 듯 목구멍에 《파이어볼》을 한 방 더 박아 넣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 공격.

‘《아크》!’

항상 때리던 몸과 다르게 이번에는 정확히 핀포인트로 눈을 찌르는 전격.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펄떡이던 아머드 베어는, 폐를 포함한 내부 장기가 완전히 타들어 가자 크게 몸을 한 번 비틀더니 축 늘어졌다.

“…….”

침묵에 휩싸인 장내. 온갖 스킬에 두들겨 맞아도 버티던 아머드 베어가,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 하더니 본격적인 스킬 콤보 몇 번 만에 죽어 버린 것이다.

스테치의 행동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는 손을 뻗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 아머드 베어를 흡수했다.

슈우우우-.

푸른 마력으로 화한 아머드 베어의 몸은 흔적도 없이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멈췄던 시간이 흐르듯 침묵을 지키던 엘프들은 봇물 터진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정신 나간 듯한 목소리로 장로 하나가 그 틈바구니에서 외쳤다.

“[이, 이건 이단…… 아니, 괴물이다!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짓이란 말이다!]”

“[페리스 장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호통에 남성은 입을 콱 다물었고, 목소리의 주인인 벨라도라는 그런 남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선택지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

“[더 이상의 기회를 놓치면 이 뒤부턴 정말 낭떠러지뿐이라는 걸, 왜 굳이 무시하시는 건가요? 현실을 직시하세요, 페리스!]”

페리스를 단박에 조용히 만든 벨라도라를 바라보며 올리비아가 엘레나에게 말했다.

“[……믿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엘레나가 앞서 생각했다시피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기 때문에, 엘레나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어쩌긴.]”

올리비아는 한숨을 푹 쉬며 1층에 서서 숨을 가다듬는 스테치를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그에게 전부 걸어보는 수밖에.]”
 

16564291165278.png

1656429116528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