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3) (24/203)


24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3)
2021.10.25.


엘프들이 넋을 잃은 사이, 장로들은 한 번 마음을 정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 이름이 뭐지?]”

이를 바득바득 갈던 에이바는 벨라도라의 시선을 느끼자 화들짝 놀라며 뒤늦게 말을 통역했다.

스테치는 턱까지 타고 내려온 땀방울을 닦아 내며 말했다.

“……스테치 아텔리어.”

“[아텔리어. 그대는 우리들이 요구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능력을 증명해보였다.]”

벨라도라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먼저 묻겠다. 애초에 그대가 엘레나로부터 유물을 가져간 이유는 뭐였지?]”

“전 애초에 그게 유물인지 아닌지조차 몰랐습니다. 당연히 그걸 차지하려는 생각도 없었고요.”

스테치는 자신이 유물을 빌미로 엘레나에게 요구한 바와 그 의도를 장로들 앞에서 그대로 밝혔다. 그러자 벨라도라가 물었다.

“[우리가 그대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유물을 포기하겠는가?]”

“그렇겠죠.”

스테치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벨라도라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과 엘프, 양측에게 있어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능력의 한계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스테치가 굳이 숲에 해악을 끼칠 생각이 없다면, 엘프들의 입장에서도 사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스테치가 어둠의 숲과 엘프들에게 유물 건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한몫했다.

“[모두들 똑똑히 들었겠지?]”

벨라도라가 장내의 엘프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곧장 레드트리 던전이 어둠의 숲과 엘프들에게 현재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그리고 방금 전에 드러난 스테치의 능력이 얼마나 유용하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강조하여 설명한 뒤 폐정을 명했다.

인간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듯한 구도에 불만을 가진 엘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장로들의 방침을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따랐다. 그만큼 스테치가 보여준 능력은 진짜였고, 레드트리 던전에 희생된 이들이 많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스트라이더들은 스테치 아텔리어를 접견실로 안내해라.]”

올리비아의 지시에 에이바와 제스터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스테치의 곁으로 내려갔다. 방금 전까지 죽이려던 상대를 이제는 모셔 가자니, 복잡한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자.”

스테치는 볼장 다 봤다는 듯 바닥에 침을 한 번 탁 뱉은 뒤 제스터와 에이바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다섯 장로들과 두 스트라이더, 그리고 엘레나와 스테치는 몇 분 뒤 전용 접견실에 모이게 되었다.

말없이 손짓으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는 벨라도라에게 스테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의자에 앉았다.

생각보다 푹신한 쿠션감에 스테치가 무심코 감탄하는 사이, 올리비아가 그에게 말했다.

“[이미 그대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던전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우리들의 숲에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확연히 달라진 장로들의 태도에 통역하던 에이바는 뜨악 하는 얼굴이 되어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는 일 없이 스테치에게로 곧게 향해 있었다.

만약 다른 엘프들이 이런 장로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뒤집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드트리 던전 파괴를 위한 그대의 의지가 진짜라면, 이쪽으로서도 방해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대를 지원해 주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마을에서 차출 가능한 전투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던전의 성장세를 억제하는 데에 급급한 데다, 당장 장로들이 명령한다고 그들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고 인간을 도와줄 리도 없다는 것.

말하자면 아직 그럴 마음까지 들진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벨라도라가 말했다.

“[단,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적 자원에 한정된 이야기. 기본적인 물자라면 그쪽이 필요한 만큼 지원해 주겠다.]”

고문받고 심문받던 상황과 비교해 보자면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 아닌가. 더 이상 엘프들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다는 점도 좋았다.

그러자 엘레나가 손을 들었다.

“[제가 그와 함께 가겠습니다.]”

“[안 돼!]”

당연하다는 듯 나선 엘레나에게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올리비아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겉만 봐선 알 수 없었으나, 단순한 걱정 이상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에이바는 혀를 찼고, 벨라도라는 말했다.

“[……보다시피, 엘레나는 지금 자네를 도울 수 없네. ‘종족의 이익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독단 행위는 분명 잘못인 데다, 유물 수호 실패의 문책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든. 그녀의 지위를 고려해 보면, 더더욱 부족의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져야만 하네.]”

벨라도라는 엘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레드트리 던전의 위험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아텔리어 씨가 간다고 해도, 누구의 동행도 없이 한 사람만 보낸다는 건……!]”

엘레나가 올리비아와 벨라도라에게 항변했다.

대화를 듣던 스테치가 가만히 생각에 잠기자, 메멘토 모템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제 식구 감싸기인가?』

‘어쩌면. 하지만 아주 이해 못 할 이야기도 아니야.’

엘레나가 답답하다는 듯 한창 올리비아와 말다툼을 하고 있자, 스테치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그냥 여기 있어.”

“뭐라고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스테치를 바라보는 엘레나. 스테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벌써 잊었어? 내 아티팩트는 던전을 한 번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매번, 네가 처음 본 모습 이상의 수준으로 강해지고 있다고.”

머뭇거리는 엘레나에게 그는 못을 박는 것처럼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난 생각만큼 약하지 않으니까.”

스테치가 벨라도라에게 시선을 돌린 뒤 고개를 끄덕이자, 벨라도라는 제스터에게 말했다.

“[그의 물품을 돌려주어라.]”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비운 지 몇 분 후, 제스터는 압수해 두었던 스테치의 짐들을 모두 가져왔다.

페네트레이터, 가죽 베스트와 유틸리티 벨트에 부츠까지 모두 멀쩡했다.

장로들과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후딱 모든 것을 걸친 스테치는 벨라도라에게 말했다.

“……가기 전에, 포션이 있다면 몇 병 부탁합니다.”

“[마을에 남아 있는 재고에서 가져오도록 시키겠네. 또 필요한 것은?]”

“그것 이외엔 없습니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죠.”

자리를 털고 일어선 스테치. 드디어 숲의 마지막 던전에 들어갈 때가 온 것이다.

* * *

“[이 장벽 뒤로 넘어가게 놔둬선 안 돼! 막아!]”

나지르가 악을 쓰며 외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사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드라이룻 마냥 거대한 나무뿌리 아래쪽에 입구를 튼 던전, 레드트리.

그 이명에 어울리게 나무는 뿌리 끝부터 나뭇가지의 잎사귀 하나까지 피처럼 붉은빛으로 물들어져 있었으며, 입구에선 가시 돋힌 넝쿨이나 가지가 촉수처럼 뻗어져 나와 던전의 입구를 막아선 나무 장벽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불화살을 쓸 수도 있었지만, 촉수에 불을 붙였다가 나무 장벽에 옮겨 붙은 경험 때문에 나지르와 사수들은 함부로 불화살을 쓰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피융- 팍!

분명 식물일 텐데 통각이 있는 동물처럼, 화살을 맞은 넝쿨들은 한층 더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 엘프는 활을 내려놓고선 바로 장벽 아래까지 접근한 촉수들에게 펄펄 끓는 물을 쏟아붓거나, 아니면 아예 돌덩이를 마구 던져댔지만 역시 충분치 않았다.

“[지원은 아직인가!?]”

“[10분 전에 요청을 전달했습니다!]”

사방에서 퍼지는 고함과 비명의 틈바구니에서 큰 소리로 묻는 나지르에게, 사수 하나가 소리 질러 답했다.

지원 요청을 보내긴 했지만, 지원이 오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지원이 온다고 해서 이 촉수들을 무사히 격퇴시킬 수 있을까?

나지르는 엘프 동료를 붙잡으려던 촉수를 나이프로 내리찍으며 걱정했다.

던전이 스스로 입구 밖으로 나서서 크기를 확장하려 드는 것 자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공격적인 광경은 수십 년간 입구를 지켜온 나지르에게조차 처음이었다.

“[조심하세요, 대장!]”

“[어? 으아아아!]”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과 함께 촉수에 의해 허공으로 던져진 나지르는, 제대로 된 낙법조차 취하지 못하고 장벽과 던전 입구 사이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나지르 대장님!]”

부하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너무 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답답함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나지르는 격통으로 신음했다.

알싸한 느낌과 함께 뜨끈한 것이 정강이 근처에서부터 퍼지는 게, 아무래도 어디 한군데 부러진 모양이었다.

“[……이런]”

나지르가 다가오는 촉수 두 개를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보던 차에, 갑자기 섬광 하나가 그의 시야를 가로질렀다.

퍼어억!

마치 고깃덩어리를 망치질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넝쿨 촉수를 하나로 엮어 꿰뚫은 굵직한 화살 하나가 땅바닥에 깊숙이 박혔다.

나지르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복잡했지만, 딱 하나 분명하게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살았다!]’

자기가 아는 한 저 정도 굵기의 화살을, 이 정도 위력으로 쏴 날리는 자는 숲에서 딱 한 사람뿐이었다.

“[스트라이더 에이…….]”

에이바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려던 나지르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고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활짝 열린 장벽의 문 너머에는 자신들이 기다려 마지않던 에이바와 제스터가 서 있었지만, 그곳엔 또한 생각지도 못한 제삼자가 있었다. 엘프와는 분명히 다른 복식, 그리고 둥근 귀.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탁.

사슴의 등에서 내린 인간은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제스터와 함께 장벽 문을 넘어 나지르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에이바는 자기 체구에 비해 거대한 활과 화살을 늘어뜨리며 ‘칫’하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사격 중지! 뒤로 물러서라!]”

에이바의 지시에 허둥지둥 장벽에서 물러나는 사수들. 이윽고 나지르가 있는 위치까지 도달한 제스터는 곧장 그를 부축하여 뒤돌아섰고, 인간은 양손을 펼쳤다.

화르륵-

뜨거운 열기에 뒤를 돌아본 나지르는, 난생 처음 보는 불덩이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인간의 양 손바닥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개의 화염 구체. 인간은 말없이 팔을 쭉 뒤로 당긴 후 힘껏 휘둘러 구체를 던졌다.

어찌나 뜨거운지 땅바닥에 불꽃의 궤적을 남기며 날아간 화염구는, 사선상의 모든 넝쿨을 잿가루로 태워 버리며 던전의 입구 근처에 내리꽂혔다.

“흡!”

콰광!

그렇게 남은 하나까지 던전을 향해 던져, 딱 두 방으로 모든 촉수들을 정리한 인간. 그 광경에 일단 환호하던 사수들 모두, 뒤늦게서야 술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뭔……?]”

나지르만 어리둥절한 건 아니었는지라, 사수 중에는 무심코 활시위를 당겨 인간의 등을 조준하는 이도 있었다.

에이바는 얼굴을 찌푸리며 재차 외쳤다.

“[경고한다, 그 인간에게 손을 대지 마라!]”

알 수 없는 상황에 나지르는 자신을 부축해 주던 제스터에게 물었다.

“[어찌된 겁니까? 왜 인간이 어둠의 숲에 있는 거죠? 그리고 저 마법은…….]”

“[몰라요, 나도 몰라.]”

제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만 푹 쉬었다.

“[장로님 왈, 저 자식이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랍니다.]”

선뜻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지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벽 뒤로 무사히 넘어온 그가 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던전 입구 안으로 막 들어가는 인간의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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