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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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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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4)
2021.10.26.
올리비아는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한숨만 푹푹 쉬었다.
“[휴우…….]”
수십 년지기 친구가 혼자 고민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일까? 신뢰하는 스트라이더들과 나머지 장로들이 벨라도라에 의해 쫓겨나듯 내보내졌고, 이제 접견실에 남은 것은 그녀와 올리비아, 그리고 손녀인 엘레나까지 셋뿐이었다.
한창 침묵을 고수하던 엘레나가 곧 입을 열더니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왜 절 막으셨죠?]”
그녀의 목소리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
“[레드트리가 위험한 장소인건, 할머니나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가…….]”
그러자 올리비아는 홱 고개를 돌려 엘레나를 노려보았고, 그녀는 난생 처음 보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깜짝 놀라 하던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내가? 널 레드트리로?]”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올리비아의 톤에 엘레나는 당황했고, 그런 그녀를 본 올리비아는 속에 쌓인 것들을 토해 내듯 엘레나를 다그쳤다.
“[딸 같던 며느리는 몬스터에게, 아들은 레드트리에 잃고 내게 남은 건 뭐였을까? 바로 너, 손녀인 너 하나뿐이란 말이다.
그런데 날더러 미쳤다고 널 레드트리로 보내라고? 어림도 없지.]”
그 말에는 엘레나도 일부 납득하는 바가 있었기에 잠깐은 머뭇거렸으나, 그녀는 곧 다시 올리비아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동족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지금 던전 앞에서 밤낮이고 경비를 서고 있는 이들마저 뚫린다면, 엘프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숲 전체가 던전으로 뒤바뀔 겁니다. 스테치 아텔리어란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지원을 더 보내는 게 맞지 않나요?]”
“[그래서, 그 지원역의 적임자가 너라고?]”
올리비아는 코웃음 쳤다.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그만 두거라, 엘레나. 정말로 네가 인간을 돕고 싶어 던전에 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잘 생각해 보렴.]”
마치 속을 꿰뚫는 듯한 말에 엘레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집착? 내가? 그녀는 자문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 행동의 어느 부분에, 엘프들을 구원하려는 의도 이외에 그런 사심이 섞여 있었단 말인가.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집착이라고요?]”
그러자 올리비아는 손짓하며 말했다.
“[모르는 척은 관두어라.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인간을 던전에 보냈으면 엘프 하나가 가든 둘이 가든 유의미한 차이가 있진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따라가려하는 네 모습이 바로 집착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이냐.]”
올리비아의 말에 엘레나는 항변하려던 것을 그만두고 입을 꽉 다물었다. 납득이 안 가서가 아닌, 더 이상의 변명거리가 없었기에.
“[케인은 죽었다, 엘레나. 지금 네가 레드트리에 가도 네 아비가 살아 돌아오진 않아!]”
엘레나가 그 말에 이를 악문 순간, 벨라도라가 외쳤다.
“[그만!]”
점차 극으로 치닫는 대화에 벨라도라는 결국 엘레나와 올리비아를 멈춰 세웠다. 이대로 놔두다간 감정의 골이 돌이키지 못할 수준까지 깊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서로 말다툼 할 때가 아닙니다. 엘레나가 레드트리에 대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든지 간에 못 가는 건 기정사실이에요.]”
엘레나는 그 말에
“[우리는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한 인간을 보냈다곤 하지만, 그가 실패하면 위험해지는 것은 매한가지. 차선책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선책이라고요? 설마 또…….]”
올리비아가 벨라도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제가 가겠습니다. 케인만큼은 아니더라도, 한동안은 엘프들에게 평온을 가져다주겠지요.]”
* * *
슈르륵-.
사방에서 끈적한 무언가가 벽을 타고 기어가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테치가 던진 불덩이에 의해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지 모를 일이었다.
“역겹구먼.”
통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스테치를 반겨준 것은 공기 중을 가득 메우는 쇠 냄새. 이 코를 쥐어짜는 듯한 악취는 틀림없는 피비린내였다.
또한, 언제 죽었는지 짐작조차 안 가는 시체들과 백골들이 던전 입구 쪽에서부터 함께 쌓여 바닥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번 던전은 초입부터 강렬한데.』
발끝에 걸리적거리는 갈비뼈를 떨쳐 낸 스테치는 뼈 무더기로 뒤덮인 내리막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반지로 길을 밝혔다.
혈관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촘촘하게 자란 뿌리들이 위에서부터 통로 내벽을 타고 내려와 바닥 밑까지 파고들은 상태. 밖에서 본 던전 위의 나무가 크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뿌리를 이렇게나 넓고 깊게 내릴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스테치는 《패스파인딩》을 사용했다. 복잡한 구조의 던전인 스몰빙을 경험해 본 덕택에 조건을 만족한 모양인지, 스킬은 정상적으로 발동되었다.
덕분에 스테치는 별다른 고생 없이 갈림길이 나오자마자 표시되는 길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누가 파놓은 굴 마냥 비좁은 통로 안. 허리를 잔뜩 숙이고 걸어가던 스테치는 자그마한 방 하나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반대편 통로까지의 길은 난생 처음 보는 식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뭔…….”
푸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바로 옆 식물에 매달린 커다란 주머니가 쪼그라들었다. 무언가를 흡입한 스테치의 머릿속으로 핑하고 울리는 이명과 함께, 그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털썩!
실수했다기보단 반응할 틈이 없었다.
한 손으론 입과 코를 틀어막고, 반대쪽 손으론 가까스로 땅을 짚으며 넘어진 스테치는 두 눈을 빠르게 껌뻑였다. 반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과 그리고 거기에 비친 주변 사물들.
모든 것의 경계가 녹아내리며 물감처럼 섞이기 시작했다.
“읍…… 우웨에에엑!”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기괴한 감각에 속을 거하게 비워 낸 스테치.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필사적으로 기어 방 밖으로 나온 그는 수통을 꺼내 콧구멍과 입으로 물을 콸콸 들이부어 헹궈 냈다.
『괜찮냐?』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그가 흡입한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식물의 씨앗인지, 아니면 일종의 가스인지. 탐험가로서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옳긴 해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응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젠장,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죽는 줄 알았어.”
『방금 것은 나도 알지 못하는 버섯이야. 아마 던전 중에서도 레드트리 안에서만 자라는 고유종이겠지.』
스테치는 여전히 입과 비강에 남아 있는 찝찝함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크로스 윈드》나 《에어 버스트》로 발생되는 바람을 사용하면 저 방 안의 공기들을 죄다 밀어내고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 둘도 결국은 주변 공기를 순환시키는 스킬들이라, 지금처럼 밀폐되고 좁은 공간에선 써먹을 게 못 돼.』
“《파이어볼》은?”
『스테치, 우린 이 식물들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 함부로 자극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단 말씀이야. 다른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선 일단 뒤로 빠지자고.』
《파이어볼》을 사용하여 깡그리 다 태워 버릴 수도 있겠지만, 저 버섯들은 던전 안에서 나고 자란 돌연변이 개체이다. 무슨 기상천외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식물들을 상대로 괜한 자극을 줘선 안 된다는 것이 메멘토 모템의 의견이었다.
스테치는 잠시 고민한 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패스파인딩》 스킬이 목표 지점까지의 최단 루트를 가리켜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최선의 길을 가리켜주진 않는 법.
스테치는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아까 전에 지나쳤던 갈림길의 다른 쪽 길로 나아갔다.
‘여기는 그나마 낫네.’
굴 통로 천장에서부터 촘촘하게 내려와 길을 막은 뿌리들을 본 스테치는, 말없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페네트레이터를 뽑아 들어 휘둘렀다.
공기 순환도 바깥에 비하면 잘 안 되는 탓에, 뿌리를 쳐 넘기며 길을 뚫던 스테치의 전신은 금방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헉, 헉…… 뭐야?”
뿌리들을 모조리 쳐내자 드러난 길. 하지만 들인 노력이 무색하게 그 끝은 어디로도 향하는 일 없이 막혀 있었다. 메멘토 모템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이건 뭔…… 결국 전부 헛수고였던 거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스테치는 고개를 저었다.
“꼭…… 헉…… 그렇진 않아…… 헉…… 《애니멀 인스팅트》.”
뜬금없이 스킬을 사용하는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물었다.
『무슨 말이야? 이제 우리한테 남은 길은 그 버섯투성이 방 하나뿐인데.』
“굳이 그 길로 갈 필요 없어.”
그러나 그런 질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꾸한 스테치는, 반지의 빛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너, 이 숲에 들어오고 나서 제대로 된 식수원을 본 적 있어?”
뜬금없는 스테치의 질문에 메멘토 모템은 일순 어리둥절했다. 그러고 보니 그와 본 장소를 전부 통틀어 봐도 제대로 된 식수원이라곤, 어둠의 숲 외곽 쪽에 흐르던 강과 노예 상단주 패터슨을 구했던 그 작은 연못뿐이었다.
스테치는 페네트레이터의 검 끝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탁!
“네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은 숲 바깥에 있으니 논외고, 그렇다면 남은 물은 연못에 고인 정도가 끝인데 이 숲의 모든 동식물들이 살아가기엔 양이 터무니없이 적어. 게다가 요 며칠간 숲속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거지만 이 지역은 비도 잘 오지 않아. 그렇다면 대체 이곳 생물들은 어디서 물을 얻는 걸까? 답은 하나뿐이지.”
『……지하수를 말하는 건가?』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숲 전체를 관통할 정도로 거대한 지하수로가 흐르고 있겠지. 마침 엘프들의 마을에 들렀을 때 우물이 있던 것도 봤고, 이 던전 안의 뿌리들이 필요 이상으로 깊이 뻗어 나온 걸 봤을 때 확신했어.”
스테치는 말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통로 천장으로부터 뚫고 나와 벽을 타고 내려가는 뿌리들의 방향을 눈으로 쫓아갔다.
“던전 탐험을 하다 보면 말야, 땅에 대한 지식이 제법 쌓이거든. 이렇게 오래된 숲 밑으로, 긴 시간동안 지하수가 흐르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뭐가 생기는 줄 알아?”
뿌리들은 전부 천장과 벽, 그리고 지면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스테치는 페네트레이터의 장전쇠를 당기고, 체임버에 실린더를 끼워 넣은 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쏴아아아-.
대량의 물이 흐르는 소리.
던전의 뿌리들은 스테치가 서 있던 땅의 바로 아래에 흐르던 물을 찾아 뻗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들은 스테치는 마침내 확신한 듯 미소를 지었다.
“바로 싱크홀이야.”
콰과광!
스위치를 누르자 페네트레이터에 의해 꿰뚫린 얇은 지면이 큰 소리를 일으키며 푹 꺼졌다.
몇 미터 이상의 낙차 정도는 예상했기에, 스테치는 미리 낙법을 취하며 함께 떨어진 바윗덩이 따위를 피해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후우.”
흐르는 지하수에 의해 깎여 나간 공간이 커지다가, 결국엔 지반 붕괴의 원인이 된다.
이것은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허구한 날 지하로 생성된 던전을 돌아다니는 탐험가로선 자주 보게 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스테치가 위치한 지하수로의 구조는, 마치 그가 처음 메멘토 모템을 얻은 후 기절에서 깨어난 그 장소와 매우 흡사했다.
스테치가 바로 옆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길을 보며 《패스파인딩》을 사용하자, 그의 눈에만 보이는 빛의 궤적이 수로 변을 따라 뻗어 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됐다. 다시 길이 이어졌지.”
『…….』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의 길 찾는 방식에 말없이 감탄했다.
길이 없으니까 만들어낸다니, 탐험가들 중 과연 몇이나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뭔가가 있다.’
때마침 스테치는 저 멀리 반지의 빛에 비춰진 검은 형체를 보고는, 페네트레이터를 앞으로 내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적인가?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몬스터도 뭣도 아니었다.
“엥?”
커다란 잎사귀였다.
아니, 최소한 식물에 가까운 무언가인 것은 확실했다. 식물성으로 된 거대한 주머니가 수십 개 이상, 수로를 따라서 쭉 늘어져 있었다. 마치 지하수를 따라 수로 변까지 떠밀려온 것처럼.
‘윽, 무슨 냄새야.’
스테치는 주머니 안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에 코를 틀어막았다.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투덜대는 그의 머릿속에선 마침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왠지 낯설지는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스테치는 주머니를 감싸고 있던 잎과 넝쿨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위험한 무언가를 괜히 건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주머니를 풀어 헤칠수록 그런 걱정은 점점 줄어들었다.
스르륵.
주머니를 깐 스테치는 천천히 반지를 내밀어 안의 것을 비춰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