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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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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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어둠의 숲과 엘프들(15)
2021.10.27.
말라비틀어져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체가, 몸을 오그린 채 주머니 안에 담겨있었다.
“윽……!”
너무나도 처참한 몰골에 스테치는 두 눈을 꾹 감으며 주머니를 밀어냈다.
이 주머니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지하수로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에 들어있던 시체의 외형 자체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쩡했다.
아이의 뾰족한 귀를 본 스테치는 그제야 그 시체가 엘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분이 죄다 빨려나간 탓인가. 부패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군.』
메멘토 모템이 조용히 말했다.
스테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런 식의 말은 그만둬.”
스테치는 주머니를 이루고 있던 나뭇잎과 넝쿨을 당겨 벌려놓았던 것을 다시 봉한 뒤, 나머지 주머니들을 차례대로 전부 뜯어보았다.
청년, 노인, 아이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일부는 동물도 들어있었지만, 하나같이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이었다.
‘이 구멍…….’
시체를 살피던 스테치는 모든 시체들의 쇄골 쪽에 난 구멍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상처를 통해 체액이 모조리 빨려 나간 듯했다.
“지성이 있는 몬스터의 짓인가?”
『이것만 봐선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위로 더 나아가자.』
스테치는 그 말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이며 수로의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걷기 시작한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하수로는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쭉 뻗어있었지만, 《패스파인딩》의 궤적을 좇던 스테치는 표시선이 갑작스레 위를 향하는 것을 보고선 따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약 4~5m 정도 높이의 천장에, 성인 남성이 너끈하게 통과 가능한 사이즈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배낭을 뒤적인 스테치는 로프를 꺼낸 뒤, 빙빙 돌리다가 있는 힘껏 구멍을 향해 로프 끝에 부착된 후크를 던졌다.
걸리는 게 없었는지 다시 떨어졌지만, 스테치는 끈덕지게 재차 시도하여 결국은 후크를 구멍 안으로 던져넣고는 단단히 고정시켰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가며 밧줄을 타고 구멍 위의 방까지 올라온 스테치는,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반지의 빛을 더 강하게 조사했다.
“세상에.”
넋을 잃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스테치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일지도 모른다.
수로에서 발견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의 주머니가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경에, 스테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주머니들을 감싼 잎사귀와 넝쿨 틈새로는 불그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며, 마치 심장이나 장기처럼 안에 있던 무언가가 이따금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슈르르륵.
갑자기, 어딘가에서부터 내려온 넝쿨 촉수 하나가 빛이 꺼져있던 주머니를 하나 집어 올렸다.
잠시 이리저리 살펴보듯 주머니를 든 채 흔들거리던 넝쿨은, 이윽고 그것을 스테치가 기어 올라온 구멍으로 떨어뜨렸다.
비록 안의 내용물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치빠른 스테치는 그게 무슨 행위인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폐기 처분.
『스테치, 멍하니 있지 마!』
메멘토 모템의 날카로운 지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스테치는, 이를 갈며 페네트레이터를 거칠게 뽑아재끼고선 주머니들의 외피를 전부 베어 갈랐다.
촤아아악!
털썩-, 털썩-.
찢어진 주머니 속에 가득 차있던 액체가 콸콸 쏟아져나오더니, 이윽고 커다란 덩어리들도 함께 토해냈다.
한창 주머니를 베어나가던 스테치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반지로 비춰보이자, 분홍빛 액체에 흠뻑 젖어 기절한 엘프 꼬마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 주머니들 안에 든 것도 전부 사람……!’
스테치가 검으로 베며 지나가면 주머니에 갖혀있던 엘프들이 차례차례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볼 생각은 없는지,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넝쿨 하나가 그의 사각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뻗어져 왔다.
《패시브 스킬 : 오토매틱 리플렉스(lv 1).
낮은 확률로 적이 가해오는 공격의 순간, 일시적으로 반사신경이 상승합니다. 숙련도가 높을수록 스킬의 발동 확률 및 효과 지속 시간, 스텟 상승율이 증가합니다.》
자동으로 발동된 스킬의 효과로 슬로모션 상태에 돌입한 스테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등 바로 뒤에서부터 자신을 찌를 듯이 겨누고 있는 촉수끝을 본 스테치는 기겁하며 몸을 비틀었다.
팍!
허망하게 스테치의 흉판을 스치고 땅에 박힌 촉수. 하지만 연달아서 새로운 촉수들이 천장을 뚫고나와 공격을 시도해왔다.
“바빠 죽겠는데……!”
섣불리 《파이어볼》로 불을 붙였다간 주변의 주머니들로 불이 옮겨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스테치는 날아오는 촉수를 옆으로 회전하며 피함과 동시에, 힘을 실어 검으로 베어냈다.
써컹!
“~~!”
입이 있었다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만 같은 기세로, 말단부가 잘려나간 촉수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잘 드는 검을 만들어준 클라이드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한 스테치는 수차례 검을 휘둘렀고, 잘려나간 채로 몇 번 허공을 휘적이던 촉수들은 뚫고 나온 천장으로 되돌아갔다.
‘지금이다!’
혹시라도 되돌아올 넝쿨줄기를 경계하며, 스테치는 기어이 모든 주머니를 찢어냈다.
몇몇은 가망이 없었는지 말라비틀어진 시체만 담겨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았다.
최초로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던 엘프들이 차례로 정신을 차리자, 스테치는 검을 내려놓고선 그들 중 한 명에게 달려갔다.
“어이, 정신이 들어? 여기가 어딘지는 알겠어?”
멍하던 청년의 얼굴이 스테치의 질문을 듣고서 공포로 물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자신이 던전 안으로 끌려 들어가 주머니에 갇히게 된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레, 레드트리 던전……!”
패닉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스테치는 다짜고짜 청년의 뺨을 때렸다.
찰싹!
“정신 똑바로 차려! 아직 죽어본 적도 없는 주제에 겁먹기는!”
스테치는 배낭을 옆 홀더에 꽂혀 있던 스크롤을 꺼내 청년에게 쥐여주자, 그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탈출 스크롤이야. 사람들이 깨어나거든 이걸로 함께 탈출해.”
“…… 구해주러 온 거야? 네가?”
“그럼 내가 여기까지 춤추고 놀려고 왔겠어? 빨리 사람들을 모아!”
그러자 청년은 일어서려는 스테치를 붙잡았고, 제 갈 길 가려던 그는 성대하게 앞으로 넘어졌다.
쿠당탕!
“억!”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인가? 열받은 스테치가 짜증스레 청년을 노려보았으나, 그의 얼굴에 더 이상의 겁먹은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구해야 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이미 사람들은 전부 꺼내줬잖…….”
청년의 외침에 스테치가 대꾸하자, 청년은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니야! 그 사람이…… 우리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건 다 그분 덕택이라고! 지금 여기서 우리랑 함께 탈출하시지 않으면 안 돼!”
“…엉?”
스테치가 이건 또 뭔 소리인가 하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자, 청년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케인 드레이노어 말이야!”
* * *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
건조함으로 말라붙은 입술은 흰 가루가 묻어나올 지경이 되었고, 눈은 도대체가 제 기능을 하고는 있는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빛을 잃어버린 상태.
그만큼 사내는 지쳐있었다.
꿈틀-.
전신의 살가죽을 파고들은 촉수들이 움직이자, 이제는 익숙해진 격통이 다시금 전신을 내달렸다.
이 이상 빨아먹을 마력도 없는데 이 빌어먹을 던전은 사람을 언제까지 붙잡아놓을 생각인 것인지.
‘지긋지긋하구만…….’
사내가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짜내자, 피부밑에서 움직이던 촉수가 다시 잠잠해졌다.
자신이라는 훌륭한 도시락이 있는데도 이 던전은 항상 보란 듯이 사람들을 더 잡아 오는 데다, 이따금 이런식으로 재촉까지 해온다.
쿠르릉-.
지축을 울려오는 희미한 진동음과 소음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있는 장소는 지상으로부터 최소 30m는 들어와야 하는 곳. 소음은 둘째치고 들리는 소리라곤 촉수들이 벽을 기는 소리밖에 없는데?
콰광!!
순간, 벽을 부수고 난데없이 쏟아지는 녹색 빛에 사내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고통으로 신음했다.
두 눈 모두 꾹 감은 와중에 젊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꼴-“
“드레이노어님!”
사내를 필두로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남자가 있던 공간은 케인을 부르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케인이 괴로움으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자, 처음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가 곧이어 말했다.
“다들 비켜!”
빛나는 반지를 낀 남자, 스테치가 케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촉수를 본 그는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마을에 치료 마법이 가능한 사람은 있나?”
“벨라도라 장로님이라면 가능할 거야. 어둠의 숲 전체를 대표하는 마법사시니까.”
다른 누군가가 대꾸하자 스테치는 케인의 피하로 깊숙히 파고든 넝쿨 촉수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잘 들어, 이 사람을 데려가거든 회복 포션은 절대 사용하지 마! 오직 마법만 써서 회복해야 해!”
스테치가 그렇게 지시한 이유는 회복 포션이 가진 효과는 무조건적으로 상처나 스테미나를 회복시켜주는 것이 아닌, 그저 사용자의 자연 치유력을 부스트 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케인처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에겐 포션을 썼다간 오히려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푸슉!
스테치가 케인의 양팔에 박혀있던 촉수를 강제로 뽑자, 그는 메마른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스테치의 뒤에서 지켜보던 엘프들은 그런 케인의 비참한 몰골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받아들었고, 스테치는 바로 옆에 서 있던 엘프 청년에게 말했다.
“가!”
“이스케이프!”
청년이 스크롤을 찢자, 케인과 더불어 옹기종기 모여있던 엘프들 모두가 밝은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마침내 다시 혼자가 된 스테치가 주변을 둘러보자, 케인을 구속하던 촉수가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이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저쪽이 스테치의 목적지일 터.
“드레이노어라면…… 역시 그 사람이겠지?”
『아마도.』
엘프들이 모두 모인 장소에서 딱 한 번 들었던 그 이름.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좁게 굽이치는 길을 낑낑대며 나아갔으나, 마주친 건 또 다른 막다른 길이었다.
하지만 패스파인딩의 궤적은 벽 뒤를 향하고 있었고, 스테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뒤에, 놈이 있다.
“…… 작작 좀 하라고!”
짜증이 난 스테치가 손을 뻗자, 메멘토 모템이 발동한 《에어 버스트》의 구체가 흙으로 된 벽을 드릴처럼 갈아 뚫어냈다.
콰광!
흙모래와 바위 조각을 튀기며 벽 뒤의 공간으로 튀어나온 스테치는, 갑작스런 내리막길에 발을 헛디디고 굴러내렸다.
“우와아- 푸흡! 어푸-“
액체에 그대로 전신이 푹 빠져버린 스테치에게 처음 든 생각은 하나였다.
여긴 또 왠 물이? 그러나 곧 악취에 가깝게 밀려오는 비린내와 끈적한 느낌에 스테치는 정신없이 입과 코안에 가득 찬 액체를 뱉어냈다.
피?
거대한 대공동의 한가운데에, 천장부터 지면까지 이어진 굵직한 나무 기둥이 하나 있었다.
밑으로는 스테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넝쿨 촉수들이 잔뿌리처럼 퍼져, 대공동 밑바닥에 가득 고인 피에 반쯤 잠겨있었다.
피를 양분으로 한 버섯과 각종 식물들, 그리고 거기로부터 피어나온 꽃들.
레드트리는 말 그대로 근본까지 ‘레드’였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흘러내려오는 핏방울과, 코를 극한까지 자극하는 피비린내에 스테치는 멍해졌다.
정말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을 창조했을 그는 얼마나 악취미란 말인가.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감각에 스테치가 반지의 빛으로 나무 기둥을 비추자, 기둥의 한가운데에서 풀과 잎사귀로 만들어진 여성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잠시간의 침묵 후, 얼굴은 눈과 입 구멍으로부터 피를 흘리더니 입을 쩍 벌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
“덤벼라!”
질세라 외친 스테치는 검을 뽑아 들며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