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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어보미네이션 (27/203)


27화 어보미네이션
2021.10.28.


콰칵!

기세좋게 휘두른 것이 무색하게, 스테치의 검은 앞을 가로막은 넝쿨 촉수를 베어 넘기지 못하고 막혔다.

『확실히 이놈은 대가리가 돌아가는군.』

세 개, 네 개의 넝쿨 촉수가 하나로 뱅뱅 꼬여 스테치의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스테치는 촉수를 발로 걷어차 박혀있던 검을 뽑아내며 외쳤다.

“이 키퍼는 무슨 몬스터지?”

『세계수의 아종…혹은 이 던전 위에 자라난 거대 나무와 동종인가? 워낙 마력에 찌들어서 원본이 뭐였는지 짐착조차 안 가는데. 어느 쪽이건 내 눈엔 혐오스러움(Abomination) 그 자체일 뿐이야.』

“그럼 그게 이름이네!”

순식간에 어보미네이션으로 명명된 눈앞의 몬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어 버스트》!’

아무리 어둠의 숲의 튼튼한 나무라고 해도 고작 촉수 몇가닥 겹친 정도에 《에어 버스트》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사방으로 껍질과 줄기 파편을 흩뿌리며 갈려나가는 촉수들을 돌파하고, 발사된 공기 구체가 어보미네이션의 안면에 도달했다.

콰지직!

얼굴을 구성하던 식물 조직이 조금 찢어졌을뿐 여전히 건재한 어보미네이션. 스테치가 혀를 차며 뒤로 거리를 벌리는 순간, 바닥에 연못처럼 고인 핏물 아래에서부터 수많은 뿌리촉수들이 솟아올랐다.

“우옷!”

던전 트랩의 쇠창날 마냥 튀어오르는 뿌리촉수에 스테치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으로 피했다.

텀벙텀벙!

허벅지를 사선으로 스쳐 지나가는 촉수, 그리고 간간히 자동으로 발동되는 《리액티브 스킨》과 《오토매틱 리플렉스》. 평소라면 이런 스킬들의 보조 없이 너끈하게 피할 공격조차 진한 핏물에 가려 보이질 않는데다, 부츠에 아교처럼 피가 엉겨붙는 바람에 움직이는 데에도 힘이 더 들어갔다.

‘녀석의 홈그라운드에서만 놀아줄 수는 없지.’

아예 어보미네이션으로부터 최대한 먼 곳. 피의 연못 외곽의 뭍까지 촉수들을 피해 달려 나온 스테치가 수면 한가운데로 《아크》를 날리자, 빛의 줄기가 손바닥으로부터 튀어 나가 수면을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핏물 밑에서는 수십 번이 넘는 보랏빛 섬광이 번쩍이며 어보미네이션 주변의 식물과 뿌리들을 감전시켰다.

새하얀 김을 피워내며 부들거리는 촉수들. 스테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어보미네이션을 향해 《파이어볼》을 시전했다.

“뒈져랏!”

지금껏 쏜 화구중에서 제일 거대한 녀석이 날아가며, 경련을 일으키던 촉수들을 싸그리 불태움과 동시에 어보미네이션의 안면으로 향했다.

푸확!

감전으로 움직이지 못하던 뿌리들 사이에서 수십개의 뿌리가 새로 솟아오르며 핏물을 그대로 퍼올렸고, 순식간에 형성된 피의 벽에 《파이어볼》이 적중했다.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발생시키며 위력이 반감된 화염구는 어찌어찌 수류를 뚫고 어보미네이션에게 명중했지만, 녀석은 그 정도는 우습다는 듯 정면으로 받아냈다.

단순히 힘으로 뚫고 들어가기엔 상대가 이쪽에 대처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유연했다.

진과는 다른 형태로 터무니없는 방어능력에 힘이 빠진 스테치가 반지에 대고 하소연했다.

“……아니, 너무한 거 아니냐? 놈의 공격이 하나도 제대로 들어먹히는 게 없잖아. 베고 태우고 감전시키고, 할 거 다 했는데 어떻게 계속 재생하는 거냐고.”

그러자 메멘토 모템은 스테치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상할건 또 뭐야? 스테치, 네가 상대하는 건 이 숲에 최소 수 백년 동안 떵떵거리며 지내오던 괴물이란 말야. 그럼 넌 이게 쉬울 줄 알았어?』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는 것에 아랑곳 않고 스테치가 말없이 앞으로 구르며 날아오는 촉수들을 피하자, 메멘토 모템은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아까 케인을 봐. 그런 유능한 마법사를 붙잡아놓고 마력을 뽑아먹는 짓거리도 한 두번 해온게 아닐 텐데, 오히려 저 정도는 해줘야지.』

“…… 그 사람 마법사였어?”

스테치는 검으로 촉수들을 베어넘기며 물었다.

어쨌거나, 덕분에 단순히 때려 부수고 지지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이 이상 가능한게 뭐가 있지? 스테치가 고민하는 도중, 촉수가 위아래로 교차하며 찌르고 들어왔다.

푸욱-!

가차없이 스테치의 정강이와 어깨를 차례로 관통하는 촉수들. 마치 영양이 풍부한 지면에 자리 잡으려는 식물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피부 밑에 퍼져나가는 뿌리들을 본 스테치는 이를 악물며 억지로 촉수들을 잡아당겼다.

“!”

촉수가 뽑혀나가는 과정에서 마치 가죽과 근육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고통이 일자, 스테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딴 걸 몇년이고 당했을 케인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로선 상상도 가지 않은데다, 도리어 어보미네이션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촉수 정도는 스테치가 쉽게 뿌리칠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어보미네이션은 뿌리와 가지를 쉼 없이 놀리는 한편 주변의 식물들을 죄다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피융!

바람 빠지는 소리를 일으키며 커다란 무언가가 스테치의 주변으로 날아들더니 피 웅덩이에 빠져들었다.

정신없이 촉수 떼를 피해 몸을 날리고 검을 휘두르던 스테치가 잠시 시선을 돌리려던 차에, 메멘토 모템이 소리쳤다.

『독 포자다!』

그 말에 스테치는 즉시 후드가 달린 망토를 끌어당겨 머플러처럼 입 주변에 두른 뒤, 이어서 날아오는 버섯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저 포자를 흡입했을 때 어떻게 될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펑!

갓을 한껏 부풀린 버섯이 핏물 밑에서부터 떠오르더니, 폭발하며 더더욱 진한 포자를 퍼뜨렸다.

포자에 닿은 부츠 굽과 망토 끝이 타들어 가자, 그에 기겁한 스테치는 거리를 벌리려고 발을 옆으로 옮겼다.

콰직!

“…… 으아아, 젠장!”

정강이쪽을 내려다보니, 파리지옥의 주둥이에서 바늘처럼 뾰족하게 돋아난 돌기가 정강이를 곰덫 마냥 꽉 조여물고 있었다.

그냥 다리를 비틀어 뽑기엔 상처가 너무 깊은 탓에 스테치는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자 움직이지 못하는 스테치를 향해 사방에서 날아드는 버섯과 촉수들이 보였고, 그에 스테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썅-“

콰과과곽!

제 아무리 패시브 스킬의 보조를 받아도 이 정도의 동시공격을 방어한다는 것은 무리다.

반쯤 체념한 스테치는 온갖 방향으로부터 찔러져 오는 촉수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느끼며 위액을 토했다.

“우읍!”

한창동안 스테치를 유린하며 가지고 놀던 어보미네이션은 잠시 후, 촉수들을 스테치에게 박아넣은 채 그대로 들어올렸다.

고깃덩이 같은 몰골이 되어 힘없이 매달린 스테치는, 쓰레기를 버리는 듯한 촉수의 움직임에 휙 날아가 피의 연못에 풍덩 빠졌다.

“…….”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배낭의 포션을 꺼내 안의 내용물을 들이키는 스테치.

던전에 들어온 이후로 제대로 된 마력 흡수는 한 번도 못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쓸데없이 모든 상처를 회복 스킬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푸핫!”

쨍그랑!

스킬보단 느려도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신경질적으로 빈 약병을 던져 깨버리는 스테치의 모습에 어보미네이션은 진짜도 아닌 얼굴을 비틀어 조소를 지어 보였다.

그 행위에 스테치는 깨달았다.

메멘토 모템의 말처럼 이 녀석은 확실히 다르다.

본능에 충실하기만 한 일반 몬스터라면 남을 비웃는다는 감정표현 행위를 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열받는 점이 있었다.

“……건방진 새끼!”

핏물을 튀기며 일어선 스테치가 어보미네이션을 노려보고선 이를 갈았다.

던전이 희생자를 끌어들이고 세를 불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던전은 장소일 뿐 인격체가 아니니까,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던전 키퍼인 어보미네이션이 직접 행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스테치는 레드트리에 들어온 이후로 어보미네이션을 제외한 단 한 마리의 몬스터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던전 키퍼인 녀석이 제어하는 촉수와 식물 뿐.

즉 본래의 역할에서 벗어나 던전 밖까지 뻗어져 나오고, 필요 이상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것은 녀석의 순수한 의지이자 독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방금의 반응과 희생자를 저장해두었다가 섭취하는 등의 계획적인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이해된 스테치는 분노를 터뜨렸다.

이 녀석은 틀림없는 악이다.

“해 봐!”

스테치가 외치자, 어보미네이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와 보라고! 수십, 수 백번…… 몇 번이고 나는 다시 일어서 보일 테니까!”

쿠르릉!

그 말에 호응하는 것처럼, 대공동의 천장과 벽에서부터 수십 개의 넝쿨들이 뚫고 나와 위협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스테치가 아랑곳하지 않고 어보미네이션에게 검을 겨누자 그의 머리로 메멘토 모템의 경고가 울렸다.

『온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촉수들에 대응하여, 수십개의 공격을 감지한 스테치에게 《오토매틱 리플렉스》가 발동하였다.

현실의 1초가 5초처럼 늘어나는 듯한 감각과 더불어, 최적의 스킬 콤비네이션이 스테치의 머릿속에서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머드 베어를 쓰러뜨렸던 그때처럼.

언젠가 생각해보았지만 쓸 수 없었던 조합을,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라면 마음껏 사용해 볼 수 있었다.

‘《크로스 윈드》!’

일단 마음을 정하자마자 바로 스킬을 시전한 스테치. 몸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풍에 이리저리 꺾여나간 촉수들은 애꿎은 땅바닥이나 허공을 찔렀다. 하지만 스테치의 목적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써걱!

빗나간 촉수 몇을 베어 넘긴 스테치는 이어서 어보미네이션을 향해 《에어 버스트》를 쏴 날렸지만, 녀석은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스테치는 어보미네이션의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파이어볼》을 발사했다.

단, 《파이어볼》의 목표는 어보미네이션이 아니라 스테치가 미리 날려둔 《에어 버스트》였다.

《콤비네이션 스킬 : 블레이징 스톰.
화염의 폭풍으로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오브젝트 및 생물체를 일소시킵니다.》

콰과광!!

대량으로 압축된 산소와 바람이 화염 덩어리와 만나자, 거대한 화염 폭풍의 기둥이 치솟으며 대공동 전체를 휩쓸고 퍼져나갔다.

“으으윽!”

《크로스 윈드》로 생성된 바람 장벽은 밀려오는 불길을 막아냈으나, 열기는 여전히 스테치에게로 전해졌다. 그러나 살이 익어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스테치는 눈을 부릅뜨며 목표를 지켜보았다.

대공동의 벽ㆍ천장ㆍ바닥 등등 어디 하나 남김없이 핥아내듯 날름거리는 불길에, 피로 된 연못은 서서히 끓어오르고 식물과 버섯은 말라 비틀어 져갔다.

버섯들은 갓을 부풀어 올리다 터져 포자를 퍼뜨렸으나, 《블레이징 스톰》의 화염은 그 포자마저도 말끔하게 불살라버렸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본체인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이런 마구잡이식 화염이 아닌, 강력한 위력의 공격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 전부 때려 박아! 멈추지 말고!』

스테치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포자고 식물 트랩이고, 하나도 남김없이 무력화되는 바람에 홀몸이 된 어보미네이션은 처음으로 당황한 듯 보였다.

돌진해오는 스테치에게 뒤늦게 반응한 녀석은 그나마 멀쩡한 촉수를 휘둘렀다.

“《아크》!”

잠깐 주춤하긴 했지만 어보미네이션의 재생력은 발군.

일일이 피하느라 주저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스테치는 스파크를 쏴 촉수를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스테치는 간단히 그것들을 썰어버린 후 어보미네이션의 안면을 향해 뛰어들었다.

최소한 지금 이순간, 녀석을 지켜줄 수 있는 촉수나 식물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콱!

스테치가 쥐고 있던 페네트레이터가 어보미네이션의 얼굴 바로 옆에 박혀들어가자, 의아해하던 녀석은 무언가 눈치챈 듯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어보미네이션의 내피와 외피는 적어도 어둠의 숲속 거대 나무의 경도와 동등한 수준.

스테치가 지금까지 내보인 스킬 중에 녀석을 일격으로 파괴할 수단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부분.

철벽같은 어보미네이션에게조차 연약한 부분이 있었다.

“…… 그래, 실컷 웃어.”

스테치는 박아넣은 페네트레이터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어보미네이션의 얼굴로 왼손을 깊숙히 쑤셔넣었다.

푸욱!

“?!”

식물의 잎사귀와 풀로 만들어진 어보미네이션의 부드러운 얼굴은 스테치의 왼팔 전체를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전부 받아들였고, 스테치는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했다.

“도대체가 얼굴도 필요없는 녀석이 뭐하러 이런 기관을 만들어냈는지 원…… 바이바이다, 개새끼야.”

『커스 디바우러!』

스테치의 생각을 줄곧 읽고 있었던 메멘토 모템은, 최적의 타이밍을 위해 벼르고 있던 어빌리티를 사용했다.

커스 디바우러가 발동된 순간 스테치가 착용하고 있던 저주받은 팔찌와 반지의 검붉은 아우라가, 밝은 빛으로 뒤바뀌어 메멘토 모템으로 흘러 들어갔다.

《레인포스드 액티브 스킬 : 파이어볼 -> 인페르노.
초고온으로 작렬하는 화염을 방출시켜, 대상을 파괴 및 소각시킵니다.》

콰과광!!

저주받은 아이템의 모든 사기를 흡수하고 부스트 된 《파이어볼》의 위력, 거기에 어보미네이션 내부의 밀폐된 구조가 스킬의 폭발력을 극한까지 배가시켜준 덕분에, 거목같이 단단하던 녀석의 몸은 산산조각 났다.

쿠르릉-

던전의 일부가 무너져내리며 일으킨 소음이 땅을 울렸다.

어보미네이션은 수백 년의 시간에 걸쳐 던전 이곳저곳에 뿌리를 내렸다.

이젠 던전 구축의 기반과도 다름없는 상태의 녀석의 뿌리가 깡그리 없어졌으니, 던전 이곳저곳이 파괴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폭발과 동시에 날아간 스테치는 피 웅덩이위에 떨어지고도 한참을 굴러야 했다.

사방으로 불똥을 튀기며 떨어져 내리는 나무 파편과 어보미네이션의 체액. 그러나 사실상 왼팔을 희생시킨 대가로 기절한 스테치는 피 웅덩이에 빠진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이런 미친, 진짜로 해버리다니……!』

스테치를 직접 보조하여 어빌리티를 사용한 메멘토 모템은 기절한 그를 대신해 황급히 스킬을 시전했다.

아무리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해도, 멀쩡한 자기 팔을 터뜨리는 짓은 단순히 각오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걸레짝이 되다 못 해 시꺼멓게 타들어 간 스테치의 팔은 회복 스킬에 의해 시간을 역행하듯 회복되기 시작했다. 상해 자체는 완벽하게 치유되었지만, 기절한 스테치를 깨우진 못했다.

아주 잠깐 그 사실에 답답함을 느낀 메멘토 모템이었지만, 곧 깨우는 것을 포기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쯤은 푹 쉬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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