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피딩 라인(1)
(30/203)
30화 피딩 라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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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피딩 라인(1)
2021.10.31.
“그래, 그래서 내 이야기 말인데…… 지금껏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었지. 앞으로도 네가 날 따라올 생각이라면, 너에겐 알 권리가 있어.”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지금껏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아티팩트의 힘으로 부활할 수 있다던가, 메멘토 모템의 안에는 또다른 의식이 깃들어져 있다든가 하는 부분은 적당히 빼놓고 이야기를 각색하여, 저주로 고통받다가 간신히 도망쳤다는 식으로 바꾸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스테치는 제라드에게 복수하겠다는 자신의 목표와, 현재 그가 수배 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엘레나에게 밝혔다.
제 3자인 엘레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언제까지고 숨기는 것 또한 불가능했기에 스테치는 이 참에 속시원하게 밝혀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녀는 기본적으로 인간과는 닿을 연이 없는 엘프기도 했고.
“…… 그래서 여기까지 온거야. 혹시 지금이라도 숲에 돌아갈 마음이 들었다면, 난 말리지 않겠어. 애초에 너한테 날 따라다닐 의무는 없으니까…”
“은혜 갚기라고 했잖아요, 은혜 갚기.”
엘레나는 한숨을 푹 쉬며 스테치의 말을 잘랐다.
“게다가, 저는 딱히 그 복수심에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은 없는데요?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그 말은 이런 의미였군요.”
“무슨 말?”
“‘나 자신의 분노나 증오조차 억누를 자신이 없는 놈’…… 이라고 스스로를 말했던 거요.”
그 말에 스테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숨겨왔던 자신이 우스워질 만큼, 엘레나가 시원스레 스테치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이라니, 일의 스케일이 커지는군요. 뭐 아텔리어씨와 그 아티팩트라면 아주 불가능 할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엘레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스를 들이켰다.
“그 이야기 들었어?”
빵과 감자를 먹으며 새로 서빙된 과일 주스를 마시던 스테치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시끄러운 술집 안에서도 유독 잘 들리는 목소리로 대화하는 남자 둘. 장소와 옷차림을 고려해보자면 직업은 행상인이나 되려나?
“여기서부터 내륙으로 가는 길에 병사들이 쫙 깔렸다는데, 혹시 봤나?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도중에 하도 많이 당해서 그래. 물건만 털어가는 걸 보면 최소한 사람이 한 짓은 맞는 것 같은데…그 방식이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상품들이 전부 거덜 나있다더라고. 그래도 이제 병사들이 와줬으니 조금은 편해지겠지.”
항상 돈 될 거리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상인은 일반인들에게 있어 외지의 새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방금 스테치가 들은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선 그닥 좋을 일이 없는 소식이었다.
‘왜 하필 지금…….’
대화 내용을 엿듣던 스테치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내륙으로 향하는 가도가 병사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은, 수배범인 그에게 있어서는 최악이었다.
멍청하게 마을을 떠나 큰길을 따라갔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들었어?”
스테치가 고개를 흘끗 돌리며 묻자, 치즈를 먹던 엘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이네요. 아텔리어씨의 현재 상황을 고려해보자면 병사들을 피해 그 옆의 숲으로 우회하는 것이 옳겠지만…….”
숲에는 행상인들을 습격했다는 정체불명의 괴한이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스테치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묵묵히 빵을 씹었다.
* * *
“빨리빨리 움직여! 산적이든 몬스터든 어느 놈의 짓인지 신속하게 색출해야한다!”
다음 날, 뜬금없이 나타난 병사들에 의해 시사이드 마을은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베네지아 남동쪽 내륙으로 들어가는 기다란 포장도로, 일명 피딩 라인(Feeding line).
내륙에 있는 상인 길드들이 항구도시 버든베어까지 수출입 상품들을 운송하는, 말 그대로 남부연합과 베네지아에게는 젖줄과도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워낙 무장 수준이 높은 상단이 많이 다니는지라, 가도는 별다른 병사들의 관리 없이도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장소에서 감히 상단을 위협하는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됐다면?
버든베어부터 피딩 라인을 따라 내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무역 루트 덕택에 이익을 톡톡히 보는 베네지아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피딩 라인으로 이동할 계획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이시오!”
숙소까지 들어온 병사 하나가 난데없이 그런 말을 꺼내자, 막 출발준비를 하며 짐을 꾸리던 행상인이나 상단 사람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마을에 머무르던 사람들 모두가 마을 한켠에 모이자, 병사들 무리로부터 부대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성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모두들 알다시피, 현재 피딩 라인에서 몇몇 불온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천만다행으로 사상자나 실종자는 없지만, 상단이나 사람들이 정체 모를 집단 또는 개인에게 습격당하고 소지품을 몽땅 빼앗긴다든지 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지.”
그 말에 사람들이 불만스런운 항변을 터뜨리려 들자, 지휘자는 손바닥을 내밀어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선 말을 이었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피딩 라인을 보호할 경비 인력이 버든베어와 그리드록, 양 도시로부터 차례로 파견되는 중이다. 그렇지만 병력들이 완전 배치될 때까진 시간이 필요하다.”
지휘자의 손짓에 고개를 끄덕인 병사 하나가,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나무 기둥 하나에 작은 망치와 못으로 공문 하나를 걸어놓았다.
“그전까진, 모두 이 지시를 지켜주기 바란다.”
스테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아가 공문을 읽어보았다.
공문에는 무장 호위병들을 대동중인 상단이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행상인들을 함께 짝을 지어 이동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지휘자는 설명했다.
“범인이 누구건 간에, 이것은 베네지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피해를 줄이고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뭉쳐 다니고, 도로 위를 절대 벗어나지 마라. 이건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다.”
몇몇 상단주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스테치는 안심했다.
현재 병사들의 관심은 수배범 색출보다는 사람들의 호위에 집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누가봐도 이 실종 사건은 외부에서의 소행. 신원이 보증된 상단 무리와 함께 섞여 이동하게 된다면 시선을 덜 받으며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 되도록이면 일정이 비슷한 이들끼리 그룹을 만들도록.”
스테치는 해산하는 사람들 중 짐마차들을 향해 걸어가던 남자 하나를 붙잡았다.
“저기요, 실례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시나요?”
“음? 어어. 길을 따라가다 중간에 젤디아 왕국으로 쭉 갈 생각인데. 너도 그쪽으로 가니?”
엘프 마을을 떠나기 전 스테치는 케인과 올리비아, 그리고 다른 마법에 능통한 엘프들에게 부탁하여 새로 생성된 던전의 위치를 핀포인트로 집어줄 것을 부탁했다.
덕분에 스테치는 젤디아 왕국 국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생성된 새로운 던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 혹시 동행해도 될까요?”
그러자 남자는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상관없다만, 나보다는 저 쪽에게 물어보렴.”
스테치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손가락 끝에는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모피로 장식된 붉은빛 로브를 입은 한 남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거 되게 고집스러 보이네…….’
“이름은 뭐니?”
“브라이언 고슬링입니다.”
“음. 내 이름은 토마스 램든이야. 저 병사들 보이지?”
토마스가 말하는 남성의 주변엔 험악스런 인상의 경호원들이 적어도 20명은 있었다. 한 사람이 데리고 다니기엔 너무 과다한 수의 호위 아닌가? 스테치가 그렇게 생각하자, 때마침 토마스가 말했다.
“‘대상인 파콰드 필치‘라고, 나름 유명한 상인이야. 크로마토스까지 직접 배를 타고 가서 큰 거래를 성사시켰다더라고.”
과연. 스테치는 납득했다.
그 정도 장사 수완이 있는 남자라면 저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 데리고 다닐 것이다.
토마스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마 이 마을에 머무는 상인들 중 경호원 수가 제일 많을걸. 난 운이 좋았지.”
“이봐, 토마스!”
파콰드의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에 토마스는 군소리 없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시종일관 불만스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파콰드는 헉헉대는 토마스에게 물었다.
“5분 전까지 출발 준비를 마치겠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아직도 여기 멍청하게 서 있는거지?”
“죄, 죄송합니다 필치 씨. 새로 합류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뭐?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일행은 자네 하나만 데리고 가겠다고!”
토마스를 짜증스럽게 내려다보던 파콰드의 눈은 곧 토마스가 언급한 일행, 스테치와 엘레나에게로 향했다.
“너희 둘! 이리로 와봐.”
다가오는 스테치와 엘레나를 잠시 살펴보던 파콰드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검과 활에 시선을 집중했다.
“모험가인가?”
“네, 일단은…….”
스테치의 대답에 파콰드는 아주 잠깐 고민하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적어도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알겠군. 가는 도중 내 방해는 하지 말아라.”
“…….”
호위 대상이 많아질 수록, 경호원들이 임무 도중에 추가 경비를 요구해올 빌미가 생긴다.
보아하니 파콰드는 공문으로 내려온 지침을 어기지 않으면서 실속도 함께 챙기기 위해, 일부러 토마스 한 명만을 그룹으로 받아들인 듯 했다.
스테치는 마차에 타기 전, 엘레나를 불러세우곤 말했다.
“엘레나. 우리중에서 가장 위험을 먼저 캐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너야. 첫날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주변 경계를 부탁해도 될까?”
“맡겨두세요.”
그 사이 토마스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짐 몇몇을 자기 마차에 실은 뒤 말했다.
“가자. 내 마차에 태워줄게.”
잠시 후, 파콰드의 마차 두 대를 선두로 한 그룹이 시사이드 마을을 나섰다. 잘 포장된 길이라 그런지, 마차는 그 흔한 돌부리 하나 걸리는 일 없이 순탄하게 굴러갔다.
“젊은 친구들은 직업이 뭔가?”
“던전 탐험가입니다. 던전을 돌면서 전리품들을 캐내 팔곤 하죠.”
“이야, 대단하구나. 나도 모험가나 탐험가가 하고 싶었는데…옛날에 상품을 운송하다가, 맞닥뜨린 고블린 무리들이 쏜 화살이 무릎에 맞는 바람에 그만…….”
스테치는 토마스와 대충 잡담에 어울려주는 척 하며, 엘레나 뿐 아니라 자신도 주변을 살폈다.
지휘관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전부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눈 깜짝할 사이‘라니 그게 결국 무슨 뜻이지? 그리고 정말로 단순한 사람의 힘으로 그런 일이 가능이나 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빠르게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자 모두들 이동을 멈춘 뒤 노숙할 준비를 시작했다.
“태워다주신 보답으로 불침번은 저희가 서겠습니다. 램든씨는 편하게 주무세요.”
“그래? 하긴, 마지막으로 푹 쉬어본 지가 꽤 되서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파콰드와 토마스는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팍 곯아떨어졌다.
호위 인력의 수가 많다보니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스테치는 엘레나의 반대편에 앉아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파콰드 쪽의 다른 모닥불 방향을 흘끗 바라보았다.
오직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고용된 20명 이상의 건장한 경호원들이, 한 곳에 우글우글 모여있는 광경은 꽤나 압권이었다.
“마차를 얻어탈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군요. 덕분에 일정을 앞당길 수 있겠어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다 부디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스테치가 있었던 어둠의 숲으로부터 목표로 한 신생 던전까지는, 사실상 베네지아 왕국을 횡단하는 격인지라 엄청난 이동 거리를 자랑했다.
그 먼 거리를 단순 도보로 이동한다면 발이 퉁퉁 붓도록 걸어도 모자랄 것이다.
스테치가 주머니에서 꺼낸 육포를 하나 꺼내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묵직한 것이 풀 위로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
들려온 방향은 파콰드 일행의 모닥불 쪽.
모닥불 옆에 서 있던 경호원 하나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다른 이들마저 차례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슨…….”
자리에 앉아있다 당황하며 일어선 경호원들도 순서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언제부터였을까? 공기중에 안개처럼 희미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촘촘하게 퍼진 마력 입자들을 본 엘레나는 망설임 없이 스테치를 잡아 끌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뭐가 어떻게 된-“
엘레나는 갑자기 무거워진 손끝을 되돌아보았고, 거의 매달린 듯 늘어진 스테치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는 물론이고 자신마저 당하고 만다.
‘젠장!’
엘레나는 스테치를 내려놓은 뒤 마력이 닿는 범위 밖 수풀속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