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피딩 라인(2)
(31/203)
31화 피딩 라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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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피딩 라인(2)
2021.11.01.
자욱하게 깔린 안개 너머로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많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럽게 마차와 모닥불 근처로 다가간 이들은 저마다 손에 커다란 자루들을 들고 주변을 살피며 연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것 봐라! 이쪽 아저씨는 두르고 있는 것 전부가 비싸게 팔리겠는데?”
파콰드는 딱 봐도 고급 염료를 쓴 옷을 입고, 보석이 달린 목걸이나 반지등의 장신구로 둘둘 말고 있던 탓에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남자들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전부 다 털어먹습니까?”
“아니.”
아쉬워하는 남자들 틈으로 비교적 젊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나타나더니 말했다.
짧은 흑발에, 한 손에는 빵 덩이 하나를 쥐고, 한쪽 팔을 가리는 망토를 어깨에 걸친 그는 느긋하지만, 분명히 지시했다.
“우리들의 목표는 오직 저 자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적당히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만 털어.”
“예.”
남자들의 동작은 덩치에 맞지 않게 매우 신속하고 은밀했다.
널부러진 이들의 장비나 무구를 살펴본 뒤, 주머니 하나까지 모두 뒤져 자루에 돈 될만한 물건들을 담아넣었다.
남자들이 일을 하는 동안 모닥불 옆에 앉아있던 사내는 이따금 명령을 내렸다.
“이미 몇 번이고 말했던 것 같지만 병구류는 무리를 해서라도 챙겨라! 단 하나도 그냥 흘러가게 둘 수 없으니까. 그리고 패물은 무조건 챙겨둬!”
“물론이죠.”
털컹.
잠금쇠를 빠르게 풀어헤치며, 장정들의 갑옷이 빠르게 벗겨져나갔다.
검과 방패, 전투도끼와 활. 옷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챙기고 나서, 마침내 그들의 눈은 반대편의 다른 모닥불로 향했다.
“딱 봐도 저쪽은 별 거 없어보이는데.”
“그게…… 어?”
쓰러져있던 사람은 가져갈 만한 물건이 거의 없는 행상인 한 명과 왠 젊은 청년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진작 마법으로 쓰러져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어야 할 그 청년이, 눈을 멀쩡하게 뜬 채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보스!”
남자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벌떡 일어난 스테치는, 상대의 복부에 냅다 킥을 꽂아넣었다.
“뭐야? 저 놈은 왜 움직이는건데?”
“막아!”
퍽!
페네트레이터의 뭉툭한 힐트가 남자의 턱을 후려갈기고, 그대로 원심력을 살려 회전한 뒤 부츠뒷굽으로 다른 남자에게 킥 한 방.
순식간에 셋이 쓰러지자, 물건들을 줍느라 쪼그려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 이거 정말 위험한데.』
메멘토 모템의 말대로, 스테치는 사실 멀쩡하지 않았다.
머리는 망치로 두들긴 듯 아프고, 몸은 사흘 동안 깨어 있었던 것 마냥 축 늘어지며, 시야는 뱅뱅 도는 것만 같았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레드트리를 클리어함과 동시에 얻었던 신규 스킬 덕분이었다.
《패시브 스킬 : 매직 레지스턴스(lv 1).
신체에 가해지는 모든 부정적 마법 효과의 위력이 절감됩니다. 현재 저항치 20%.》
스테치가 엘레나의 손에 이끌려가다 쓰러졌을 때, 뒤늦게 발동한 패시브 스킬로 그는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간신히 의식을 잃지 않았다.
지금은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 마법에 저항하여 간신히 움직이고 있을 뿐, 신체는 거의 한계에 이른 상태였다.
“으…….“
엘레나가 빠져나갔을 거라 생각되는 방향을 바라보자, 마침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던 엘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지금 끼어들어야하나?’
스테치의 시선을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인 엘레나가 뛰쳐나가려 하자, 그는 다가오는 산적들을 때려눕히며 거칠게 손을 내저었다.
안돼, 오지마.
퍽!
“아악, 내 턱!”
그 와중에 스테치에게 덤벼들던 한 남성은 턱을 얻어맞아 뒤로 넘어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스테치가 엘레나를 싸움에 개입시키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패시브 스킬인 《매직 레지스턴스》가, 지금 이 순간도 발동중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뜻은, 모두를 잠들게 만들었던 그 마법이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게 발동중이라는 것. 영향권 안에 엘레나가 들어온다면 그녀도 잡힐 것이 뻔하다.
“보스! 이 자식좀 어떻게 해줘요!”
부하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에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안쓰러지고 버티는 놈이 있다니, 지금껏 상상도 못한 일인데…… 이게 어떻게 된거지, 셰일?”
“제 마법 스킬에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저 놈이 특이한거라고요!”
후드를 뒤집어 써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남자가 당황한 듯 항변하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스테치의 예상대로, 푸른 빛으로 번쩍이는 그의 손바닥은 수면 마법이 여전히 발동 중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자 사내는 양팔을 보란듯 쫙 펼치며 말했다.
“뭐, 이유야 어찌되었건 이렇게 됐잖아. 더 열심히 해보라고.”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몇몇 부하들의 모습에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감탄함과 동시에, 자기 앞에 서 있는 부하들을 옆으로 슬며시 밀어내며 비틀거리는 스테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법에도 걸리지 않고, 대체 뭐하는 놈이지? 어쨌든 너 정말 잘못 생각한 거야. 우린 어차피 물건만 챙기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면 그럴 수가 없게 되잖아.”
그 말에 스테치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 물건 훔치려드는 도적이 눈 앞에 있는데…… 너 같으면 안 패고 그냥 넘어가겠냐……?”
“허, 틀린 말은 아니네. 그건 인정한다.”
킬킬대는 사내의 몸이 여름날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일순간 사라졌다.
『이건…….』
메멘토 모템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당황한 스테치의 뒤로 다시 나타난 사내는, 스테치의 다리 관절쪽을 발로 차 쓰러뜨렸다.
“윽!”
그리고 앞으로 고꾸라진 스테치의 안면에 킥.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던 그의 의식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완전히 뻗어버린 스테치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들어 올린 발을 내려놓으며 슬며시 주변을 둘러보자, 저마다 여기저기를 부여잡은 채 신음하는 부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굉장한 녀석이네. 셰일의 마법까지 견디면서 맨손으로 내 부하들을 전부 때려눕히다니. 보통 녀석이 아니잖아?”
“그런 말 하기 전에 먼저 나서주세요!”
자신들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사내에 하소연하는 부하들. 사내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더니 기절한 스테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녀석, 데리고 가자. 꽤 쓸만해보여.”
“네?”
“…… 보스, 그거 우리 아지트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꼴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부하들이 괴상한 거라도 보는 마냥 사내를 쳐다보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초대면인 사람을 본거지까지 끌어들이는 짓은 안한다고. 셰일이 적당한 장소를 마련해줄거야.”
사내는 스테치가 휘두르던 페네트레이터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자신의 소드 벨트에 걸어두고는 휙 돌아서서 쓰러진 파콰드에게로 향했다.
그의 마차를 뒤적이자, 제일 안쪽에 숨겨져 있던 화려한 목함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쨌건, 빨리 끝내고 전원 복귀하도록! 우리 마법사 기절하려는 거 안 보이나!?”
“알겠습니다!”
사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목함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가도 옆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고 있던 엘레나는 수풀 속에 웅크린 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게 진짜 일반적인 도적인가?”
뭣 모르는 얼간이 도적들이 어둠의 숲으로 들어온 경우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멍청이들에 비하면 이 집단은 움직임은 너무나도 세련됐다.
특히 보스라고 불린 이가 보인 능력은 고작 일개 산적 대장이 쓰기엔 꽤나 이질적이었다.
‘대체 왜 아텔리어씨를 데려간건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쫓아가는 수 밖에…….‘
각자 커다란 자루를 하나씩 들쳐매고 돌아갈 채비를 마친 산적 졸개들의 모습에, 엘레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 * *
『너 최근 너무 자주 쓰러진다?』
메멘토 모템의 핀잔과 함께 일어난 스테치는 찝찝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풀 내음이 나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숲 어딘가에 있는 것 같긴 한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강철 케이지의 천장이었다.
‘어쩌라고. 기습에 장사 있냐? 거기다 마법이 상대라면 누구라도 당할 수 밖에 없단 말이야.’
스테치는 그렇게 항변했다.
마법을 발현하는 역할은 주로 메멘토 모템이긴 하지만, 사용자인 스테치의 집중력도 거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까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게 분명했다.
『한동안 지켜봤는데, 넌 나와 함께 싸운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것 같아.』
‘그렇게 잘 알면 왜 정작 내가 싸울 때는 가만히 있었는데? 넌 얼마나 잘하는지 한 번 보자.’
시시각각 변하는 스테치의 얼굴 표정에, 그를 케이지 밖에서 지켜보던 산적 일당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이 일어나자마자 왜 저러지? 미쳤나?”
“잡소리 그만하고 깨어났으면 데려와! 보스가 녀석이랑 대화하고 싶어하니까.”
그 말에 스테치가 고개를 돌리자, 숲 치고는 넓직한 공터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는 왠 사내가 하나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손짓하는 그의 모습에 스테치가 몸서리를 치는 사이, 산적들은 케이지를 열어 스테치를 꺼내주었다.
“여긴 어디지?”
“…….”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산적들의 모습에, 스테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와 풀, 그리고 공터에 놓인 자리.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공터 전체에 둘러쳐진 막이었다.
보랏빛으로 반짝이며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이 투명한 막은, 딱 봐도 스테치가 탈출할 수 없게 만든 방벽임이 틀림없었다.
‘저게 뭐야?’
『주변의 지형 지물들을 핵으로 만들어서 치는 강력한 방벽이야. 술자를 처리하면 나가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아까부터 녀석이 보이질 않는군. 일단은 이야기를 듣는 척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끌어봐.』
스테치는 두 졸개의 에스코트를 받아 ‘보스’가 앉아있는 자그마한 탁자 앞까지 안내받았다.
말없이 자리를 권하는 그에 응하여, 스테치는 일부러 거만하게 다리를 쫙 펴고 반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저 버릇없기는!”
보스 뒤에 서 있던 부하가 질겁하자, 스테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이, 산적 주제에 상대가 예의차려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마! 내 눈엔 남의 물건 털어먹고 사는 거지들로밖엔 안보이니까.”
난데없는 스테치의 시비조에 나머지 부하들조차 분통을 터뜨렸고, 보스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킨 뒤 말했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잘 알았다. 하지만 내가 듣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것이 아냐.”
보스는 스테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지. 너, 내 동료가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