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피딩 라인(4)
(33/203)
33화 피딩 라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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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피딩 라인(4)
2021.11.03.
가렛이 기절한 셰일을 붙잡아 멀찌감치에 있는 수풀까지 끌어다 놓을 때쯤, 그는 헐떡이며 의식을 되찾았다.
“괜찮나?”
“뭐, 뭐가 어떻게 된거죠?”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 거기에 병장기가 맞부딪히면서 발생하는 금속음. 대체 자신이 정신을 잃은 동안 무슨 난장판이 벌어졌단 말인가.
셰일의 의문에 답해주듯 가렛이 빠른 속도로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위치가 병사들에게 탄로 났다. 아마도 버든베어랑 그리드록에서 피딩 라인으로 지원 온 병사들이겠지.”
“우와아악!”
부하 하나가 희미한 비명을 남기며 날아가는 모습에 가렛과 셰일은 눈을 돌리자, 2m는 넘는 거한의 병사 하나가 마침 투포환을 하듯 산적들의 멱살을 붙잡아 집어던지고 있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플레이트 아머와 페이스 가드에 의해 칼이고 둔기고 통하질 않으니, 산적들은 그저 녀석으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제압할 수 있겠나?”
“해보겠습니다.”
막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집중하기에 최적의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같이 긴급한 상황에서라면…… 셰일은 거구의 뒤통수를 향해 손바닥을 겨누고 스킬을 사용했다.
《액티브 스킬 : 드래그(lv 3).
지정된 대상의 모든 움직임을 30% 느리게 만듭니다. 대상의 능력에 따라 실패할 확률이 있습니다.》
노란빛의 마력이 채찍처럼 셰일로부터 뻗어져 나가 병사의 플레이트 아머에 닿은 순간, 투명한 벽에라도 가로막힌 듯 비산했다.
“항마력 코팅……!”
셰일이 당황하여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항마력 코팅은 마력분산의 효과를 지닌 광물, 디스펠륨을 갈아 갑옷이나 무기등에 바르거나 섞는 것이었다.
순수한 디스펠륨 덩어리가 아닌 이상 100%의 효과를 기대할 순 없는데다 일개 병사들이 사용하기엔 매우 귀중한 물질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소탕 작전에 대비해 저 방어구를 특별히 마련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어지간히 아니꼽게 보인 모양이군. 저런 고급 장비까지 지급하다니…….’
가렛이 셰일에게 말했다.
“코팅이 된 장비를 입은 건 저 녀석뿐인 것 같다. 셰일, 너는 이곳에서 마법으로 나머지 부하들을 지원해. 난 저 덩치를 처리하지!”
“예?! 잠깐만요, 보스!”
가렛은 양손에 단검을 쥔 뒤 아스트랄 도메인으로 은신하고선, 거구의 병사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양다리로 병사의 목을 뒤에서부터 조르며 올라탄 뒤, 페이스가드를 벗겨내기 위해 역수로 쥔 단검날을 슬릿으로 쑤셔 넣었다.
지렛대처럼 단검을 이리저리 구부려보았으나, 굳게 닫힌 페이스가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가각!
“짜증날 정도로 빡빡하네!”
가렛이 투덜거리며 허벅지와 정강이에에 힘을 주었으나, 바윗덩이처럼 단단하게 발달된 승모근을 조이기엔 무리였다.
“비켜!”
갑자기, 한창 싸우고 있던 산적들의 틈바구니에서 스테치와 엘레나가 튀어나오더니 빠른 속도로 가렛과 병사에게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파이어볼》!”
가렛이 병사의 등을 걷어차고 뛰어내리며 거리를 벌리자마자, 거대한 화구가 정면으로 병사의 갑옷을 두들겼다.
푸확!
어설픈 항마력 코팅 정도로 스테치가 시전한 정도의 《파이어볼》을 완전 상쇄하기는 무리였는지, 거구의 병사는 열기에 의한 고통으로 신음했다.
그는 등에 매고 있던 대검을 뽑아 앞으로 내리쳤으나, 스테치는 검이 자신에게 닿기도 전에 슬라이딩으로 병사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그의 뒤로 넘어갔다.
쾅!
대검의 날 끝이 바닥에 꽂히자, 스테치는 병사의 뒤에서부터 정강이 윗부분을 부츠굽으로 밀어내듯 걷어차 강제로 무릎 꿇혔다.
그와 동시에 엘레나는 대검을 밟고 뛰어올라 병사에게 헤드락을 건 뒤, 한바퀴 회전하며 그의 안면을 땅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푸욱!
슬릿에 박혀있던 단검들이 지면에 부딪힌 충격으로 페이스가드를 우그러뜨리고 들어가며 부드러운 안구에 박히자, 병사는 소리지를 틈도 없이 절명해버렸다.
“히익!”
“볼그가 당했어!”
볼그의 신체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피웅덩이에 병사들은 겁에 질려 외쳤다.
한편 엘레나와 스테치의 콤비네이션에 의해 끝장난 병사의 꼴을 넋놓고 지켜보던 가렛은, 스테치가 내민 손을 보더니 입 끝을 삐죽이며 말했다.
“뭐야, 튕길땐 언제고?”
“너네 때문에 한통속 취급받은데다, 마음놓고 도망도 못치게 생겼잖아.”
스테치는 그렇게 대꾸하며 반지 낀 왼손을 나머지 병사들을 향해 내밀었다.
“안 그래도 베네지아 왕가라면 지긋지긋 했는데, 너네 도와서 걔네 엿먹이는 거면 차라리 양반이지! 《아크》!”
파지직!
“그아아악!”
병사들 무리를 한바탕 휘저으며 퍼져나가는 전류.
바싹 구워진 채 쓰러지는 동료들의 모습에, 최후방에 서 있던 지휘관과 나머지 병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일그러졌다. 마법의 위력도 그렇고, 일개 산적들한테 이 정도 무력이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찬스를 놓치지 마라! 단 한 놈도 남김없이 여기서 격멸시켜야한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사기가 오른 산적단은 저마다의 무기를 휘두르며 돌진했고, 그에 앞장서는 스테치의 왼손에서는 번개와 불꽃, 폭풍이 터져 나왔다.
* * *
“생포가 3, 사망이 28 입니다.”
“이쪽의 피해는?”
“로이가 당했습니다.”
“……젠장.”
가렛이 탄식했다. 그나마 죽은 사람은 하나라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늦은 새벽, 산적단은 곳곳에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를 갈무리했다.
지휘관은 도망치려던 와중에 스테치의 광범위한 마법 공격에 휩쓸리는 바람에 전사했고, 파콰드는 언뜻 도망친듯 보였으나 발이 느린 탓에 엘레나의 추격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포박당한 그는 스테치와 엘레나의 얼굴을 뒤늦게 알아보고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 빌어먹을 모험가놈들! 산적단이랑 한 패거리였다니, 못배워먹은 족속답게 놀랄 일도 아니구만!”
스테치, 그리고 가렛을 포함한 산적단들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이 아저씨는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건가?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대상인이라는 별명이 왜 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체 우리들의 위치는 어떻게 추적한거지? 흔적은 모두 지웠을텐데.”
가렛의 물음에 파콰드가 콧방귀로 응수하자, 셰일은 고개를 갑자기 가렛에게로 돌렸다.
“?…… 설마.”
그 시선에 가렛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품안을 뒤적이더니, 곧 자그마한 목함을 하나 꺼냈다.
파콰드의 짐마차로부터 직접 가져온 것이었는데, 그것을 본 셰일은 목함을 탁 낚아채고 바닥을 뒤집어보였다.
“와, 이걸 진짜 쓰는 인간이 있네?”
바닥에 있던 것은 음각으로 새겨진 추적흔.
추적흔을 새겨넣은 물건이 주인으로 등록된 이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경우, 그의 시야에만 보이는 흔적이 남는다.
문제는 안전장치치고는 새기는 가격이 매우 비싼 대다가 지속 시간도 짧고, 한 번 발동되고 나면 사라지기까지 했다.
상단의 짐을 노리는 산적들은 대부분 격퇴되거나, 아니면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마차를 놓치기 일쑤라 추적흔이 발동될 일이 없다.
거기다 짐을 빼앗긴 경우엔 십중팔구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살아있을 확률도 낮아 추적흔 자체가 돈 낭비에 가까웠다.
“상인의 물건들은 마지막까지 저희가 수습하게 놔두시지 그러셨어요…… 직접 가져가시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죠!”
“난들 그 놈이 이정도로 히스테릭하게 구는 놈인줄 알았겠나? 어쨌거나 물건도 확보했고, 당사자도 제발로 찾아와줬으니 파콰드랑 나머지 사람들 처분은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셰일은 답답해 죽겠다는 투로 신음하며 생포자들을 심문하러 가버렸고, 가렛은 그 사이 부하들이 파콰드를 발로 쳐 기절시키는 것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스테치에게 수통을 건냈다.
“그쪽도 수고했어.”
“흠.”
수통을 받아들자마자 보란 듯 벌컥벌컥 들이키는 스테치를 쓴웃음 짓고 바라보는 가렛. 그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지긋지긋’하다고 했던가? 너도 적잖이 이 나라 왕가에 시달린 역사가 있던 모양인데.”
가렛의 물음에 물을 마시던 스테치는 잠시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이곤 말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너네 목적은 뭐, 왕가 타도인가?”
“그런 셈이지. 베네지아의 왕가는 너무 오랫동안 곪고 썩었거든. 크로마토스 제국의 견제와 북방 전선 유지를 핑계로 주변 연합국은 물론이고, 자국의 백성들까지 쥐어짜서 과도한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까. 나라 꼴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는 기절한 파콰드를 잠시 노려보았다.
“이번 타겟인 파콰드는 베네지아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로비스트야. 베네지아의 영역 내에서 관세를 내지 않는단 조건으로, 북부 전선에 전쟁 지원금을 보내던 상인들 중 하나지. 말했잖아? 아무 상인이나 터는 건 아니라고.”
“누굴 털어야 할진 어떻게 아는건데?”
“내 정보책은 우수해서 말이야. 설마 내가 긁어모은 사람들이 전부 도적질이나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한창 시체를 치우던 부하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고, 스테치는 가렛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북방 장군으로서 북부 경계선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베네지아의 왕자, 제라드 메서. 그런데 가렛의 목표가 그 북부 전선의 붕괴라고?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거기까지 생각이 흘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렛과 스테치의 목표는 처음부터 교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테치는 피식하며 가렛에게 말했다.
“역시 난 너희들 방식하곤 안 맞아. 치밀하고 정교하지만 목표 달성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단 말이지.”
“뭐?”
“아니, 이쪽 이야기니까 신경쓰지마.”
스테치는 어물쩍 이야기를 넘겼다. 가렛에게 굳이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을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이제 가봐도 되는거냐? 아니면 또 날 붙잡을 생각인가?”
사실 가렛의 부하들은 전부 싸움으로 지친데다, 스테치가 사용하는 스킬들을 본 이후인지라 감히 그에게 덤빌 수 있을리 만무했다. 하지만 굳이 짓궂게 물어봐 오는 스테치에게 가렛은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물었다.
“우리 이야기를 어디 발설할 생각이 있나?”
“그렇게 여유로워 보여? 이쪽은 너 아니어도 신경쓸 일이 산더미인데.”
“그렇다면 나도 더이상 널 붙잡아둘 생각은 없어. 왕국에 대항하는 사람은 모두 동지니까.”
가렛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셰일에게 소리쳤다.
“이제 이곳에서 활동하기엔 이제 글른 것 같다! 다른 아지트로 이동할테니, 한 시간 내로 짐을 꾸려라!”
“예!”
“아이고, 이번엔 좀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투덜거리는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가렛은 킬킬거리며 스테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럼, 또 보자…… 브라이언.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이쪽은 다시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인데 말이야. 스테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가렛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