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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친위대 (34/203)


34화. 친위대
2021.11.04.


스테치는 함께 동행하던 행상인 토마스와 합류하지 않고, 곧장 피딩 라인을 따라 베네지아 남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행상인 습격 사건의 원인이 가렛과 그의 산적단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딱히 숲에 무엇이 있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걸려 도보로 이동한 끝에, 스테치와 엘레나는 베네지아의 동부의 국경선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남부 연합국간의 접경지역이라곤 하지만 그 광대한 영토를 왕국이 전부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의외로 경계는 허술했다.

베네지아와 젤디아를 구분 짓는 작은 강을 건넌 스테치는, 본격적으로 던전의 입구를 찾기 전에 마지막 캠핑을 하기로 하고 자리를 잡았다.

“과연, 근처까지 오고나니 저라도 확실히 알 수 있겠군요. 던전의 위치가 매우 가깝게 느껴집니다.”

엘레나가 랜턴의 유령불을 켜자 스테치가 말했다.

“수고많았어. 이번 던전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클리어가 그리 어렵진 않을거야.”

“부족한 물건은 없나요?”

“던전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기엔 충분하지만, 스크롤이 좀 아슬아슬해. 도시나 마을에서 보충하는 수밖에.”

포션과 먹을 것은 엘프 마을에서 챙겨온 것이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탈출 스크롤은 이제 가진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작 방식의 특성상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 한정된 탓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짐을 챙기고 일어나 엘레나의 감각을 믿고 숲을 뒤지던 스테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땅으로부터 솟아난 아치 형상의 관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 외견은 생성된 지 얼마 안 된 던전의 입구라곤 믿기 힘들 정도의 깔끔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좋아, 들어가자…… 《패스파인딩》.”

스테치와 엘레나는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원형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던전의 내부 구조는 마치 복잡하게 얽힌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의 통로로 길이 나뉘어 있었으나, 길을 찾는건 스테치에게 있어 어렵지 않았다.

“몬스터입니다.”

엘레나가 먼저 확인하고 가리킨 방향을 스테치가 쳐다보자, 메멘토 모템이 뿜어내는 빛에 의해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고블린 하나가 통로 안쪽 모퉁이 부근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스테치와 엘레나를 관찰하던 그 고블린은, 자신에게 집중되던 시선을 눈치챘는지 허겁지겁 더 깊은 어0으로 11모습을 감췄다.

“신생 던전에 어울리는 수준의 몬스터로군. 엘레나는 고블린이랑 싸워본 적 있어?”

“없진 않습니다. 가끔 숲으로 무리지은 고블린 때가 들이닥치곤 하거든요.”

엘레나는 어느 틈엔가 활통에서 뽑아 든 화살 하나를 손안에서 위협적으로 빙글빙글 돌려 보이며 말했다.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개활지에서 녀석들을 만난 적은 없지만, 아무리 상대가 고블린이더라도 장소가 던전 안이라면 조심해야 돼.”

스테치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내밀었던 발을 갑자기 뒤로 쫙 뺐다. 뒤따라오던 엘레나가 의아한 표정이 되어 쳐다보자, 그는 통로 양옆의 벽을 가리켰다.

스테치와 엘레나가 서 있는 통로의 양옆에는 나무를 십자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트랩도어에 흙모래로 뒤덮인 채 숨겨져 있었는데, 이 트랩도어에는 나무 조각들을 깎아 붙여놓은 날카로운 스파이크가 붙어있었다.

“와이어를 건드리면 양쪽의 트랩도어가 희생양의 앞뒤로 열리면서 샌드위치처럼 으깨버리는 함정이야. 한 번 작동시키고 나면 절대 피할 수 없으니, 함정 중에서도 악질에 속하지. 이런걸 누가 설치했다고 생각해?”

“고블린인가요?”

“그래. 고블린들은 보다시피 이런 쪽으로 잔머리는 아주 잘 굴리는 편이야. 하지만 함정에 원하는대로 걸려주지 않으면…….”

스테치가 와이어를 페네트레이터로 잘라 함정을 무력화 시키자, 통로의 앞과 뒤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보다시피 화를 내거든.”

고블린들의 분노에 찬 울부짖음과 발소리가, 통로를 가득 울리며 차츰 커져오기 시작했다.

“캬아악!”

지근거리까지 접근해온 고블린 하나가 조악한 솜씨로 만든 창으로 스테치의 목을 노려왔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발끝으로 창대를 밀어 빗나가게 만든 뒤, 페네트레이터의 칼등을 휘둘러 고블린의 뺨을 쳐 날렸다.

퍽!

녹색의 피와 쥐알만한 이빨 몇 개를 흩뿌리며 고블린이 바닥을 굴렀고, 엘레나는 단검을 휘두르는 다른 고블린의 눈을 화살촉으로 찍어낸 뒤 그대로 장전하여 쏴버렸다.

하지만 고블린의 가장 큰 강점은 인해전술.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 정도로 고블린 무리 전체를 상대하는건 무리였다.

스테치가 끼고 있는 반지의 청록빛이 붉게 화하며, 거대한 화구가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생성되더니 고블린들로 가득찬 통로를 벽처럼 가로막았다.

직접 몸에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태양처럼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의해 괴로워하는 고블린들. 그 순간, 무자비한 화마가 그들의 자그마한 몸뚱이를 유린했다.

“으갸아-“

《파이어볼》이 고블린 떼거리를 바싹 태우고도 모자라 저 멀리 통로 안쪽까지 날아가는 광경에, 스테치와 등을 맞대고 서 있던 엘레나 쪽의 고블린들은 질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면 지원을 불러올 겁니다!”

그 말에 스테치가 뻗었던 손을 반대편 방향으로 돌린 뒤 주먹을 쥐자, 보랏빛 섬광이 터지며 뻗어나간 한 줄기 스파크가 가장 가까운 고블린을 시작으로 그물망처럼 퍼져나갔다.

털썩-.

잠시 후.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고블린 형상의 숯 더미가, 다리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한 줌 먼지로 변해버렸다.

반지 낀 왼손을 몇 번 휘둘러 마력까지 회수했는데도, 곳곳에 쌓인 잿가루와 시체로 비좁아진 통로를 보며 스테치는 치를 떨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던전 치고는 쪽수가 상당하네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지금보다 일주일만 늦게 왔어도 이것보다 훨씬 많이 몰려왔을걸? 어쨌거나, 녀석들이 더 오기전에 서두르자.”

* * *

“에머릭. 저게 우리들의 목표가 맞나?”

“…… 맞아, 확실해. 아무 이유도 없이, 뜬금없는 장소에 세워진 구조물까지. 생긴건 영락없는 던전 입구로군.”

밀레의 질문에 에머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레이먼드는 졸린 눈을 비비더니 손을 살짝 들며 물었다.

“잠깐이라도 쉬어서 원기를 회복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여기까지 오는동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기억이 없는데…….”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왔음에도 베네지아 동부 국경선까지 오는 길은 멀었다.

게다가 그들이 맡은 임무는 극비 임무였기에, 최대한 사람의 시선을 피해 오느라 시간이 더더욱 지체된 탓도 있었다.

밀레는 잠깐 고민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발스톡님의 말 잊었나? 은밀함은 물론이고, 신속함 또한 중요하다고 하셨다. 막 생성된 던전일수록 몬스터의 수도 적고, 던전 키퍼의 수준도 낮을테니 아티팩트를 취하기엔 아주 좋은 타이밍이야.”

“그래, 그렇긴 하지만…….”

“잡담은 이제 그만! 진입한다.”

두 남자는 던전 입구를 향해 가던 여성의 뒤를 따르며 투덜거렸다.

“밀레 녀석, 간만에 발스톡님이 직접 맡기신 일이라고 너무 힘을 꽉 준 것 같은데.”

“형식상이라곤 해도 이번 임무에서 대장으로 지정된 건 저 녀석이니까…… 책임감이라도 느꼈나 보지.”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밀레와 레이먼드, 에머릭은 44 친위부대의 동년배 중에서도 던전 탐험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었다.

단순히 그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전투 능력도 부대 내에선 상위권에 속했기에, 밀레가 이번 일을 맡게 된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동료 둘을 선도하여 먼저 원형계단을 타고 내려간 밀레는 배낭을 뒤적여 랜턴, 그리고 자이로스코프 형태의 장식물이 달린 체인을 꺼냈다.

그녀가 장식물을 늘어뜨리고 체인을 살살 흔들자, 장식물의 가장 안쪽에 있는 자침이 빙빙 돌아가다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매번 쓰기 귀찮지도 않냐. 우리 부대 내에 《패스파인딩》 스킬을 쓸 줄 아는 녀석은 없던가?”

“그런 고급 스킬을 배우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고, 그냥 단순한 길잡이 역할밖에 못하는 놈은 이번 임무엔 필요없어.”

밀레가 그렇게 대꾸한 뒤 장식물은 주머니에 집어넣고, 랜턴에 불을 붙이고선 나아갔다.

그런데 모두가 침묵을 고수한 채 한참을 걸어가던 때에, 선두에 서 있던 밀레가 툭 내뱉었다.

“이상하군.”

“뭐가?”

“트랩이 해체되어있어.”

밀레가 가리킨 전방의 트랩은 바닥에서 쇠 창날이 튀어 오르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트리거가 되어야 할 와이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트랩이 이미 해체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했다.

“고블린이라던가, 지성있는 몬스터가 트랩 트리거를 제거한 거 아냐?”

에머릭이 말했다. 던전에 생기는 몬스터들 중 오크나 고블린같이 손재주가 있는 몇몇 종족은, 스스로 트랩을 만들거나 개조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밀레는 고개를 저었다.

“걔네들이었다면 함정을 몸으로 해체했으면 했지, 이렇게 테크니컬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거야.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잖아.”

밀레의 말에 제일 뒤에서 일행을 따라가던 레이먼드는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듣고보니 나도 조금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왠지 몬스터가 너무 안보이지 않아?”

하다못해 최약체 몬스터로 분류되는 슬라임마저 보이지 않는 던전이라니, 단순히 조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

갑작스레 밀러가 멈춰서자, 생각 없이 뒤를 따라가던 에머릭과 레이먼드는 차례로 부딪히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왜 갑자기 멈추고 난리야?”

“시체다.”

불과 밀러의 앞으로 2~3m 전방부터 저 통로의 안쪽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수의 고블린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와. 트롤이라도 왔다간건가?”

에머릭이 얼빠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트롤이 했다고 하기엔 고블린들의 시체가 훼손된 방식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누군가는 태워져서 바스러지기 일보직전에, 또 누군가는 갈아버린 고기마냥 으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러가 황급히 랜턴의 뚜껑을 열어 불을 꺼버리자, 어두워진 시야 확보를 위한 스킬이 자동 시전되었다.

《패시브 스킬 : 캣츠 아이.
빛 한줌 없는 공간에 진입할 때, 밝은 낯처럼 앞을 볼 수 있습니다.》

“에머릭, 레이먼드. 더 빨리 움직여야겠다. 아무래도 이 던전에 들어온 파티는 우리가 처음이 아닌 모양이야. 자칫 잘못하면 목표물도 뺏기겠어!”

밀러의 말에 에머릭은 고블린 시체 더미를 검으로 뒤적이며 말했다.

“이렇게나 많은 수의 고블린을 몰살하려면 최소한 B급 마법사나 1개 중대 쯤은 되는 수의 병사가 모여야 가능할텐데…… 일개 모험가 파티가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볼 일 다 보고 이미 나갔을 가능성은?”

레이먼드의 말에 에머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시체에서 탄 냄새가 풀풀 풍기잖아. 누구 소행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을거야.”

갈림길을 본 밀러는 다시 한번 장식물을 꺼내 길 찾기를 한 뒤, 발길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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