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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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조우
2021.11.05.
일단 몰려왔던 무리들을 정리하자, 고블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더이상 접근해오지 않았다.
스테치가 바로 근처까지 접근해오거나 뒤통수를 보여도, 구석에 숨어 벌벌 떨뿐 기습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한 번 실패했으니 겁을 먹은 걸까요?”
“…… 글쎄.”
스테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모퉁이 너머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고블린 하나를 노려보자, 눈이 마주친 녀석은 화들짝 놀라 바닥을 거의 구르다시피 하며 도망쳤다.
‘겁을 먹은건지, 아니면 확실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건지.’
의문을 뒤로 하고 《패스파인딩》의 지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이리저리 꺾이는 길을 지나 오목하고 넓은 형태의 공간에 도착했다.
아래쪽에는 대량의 물이 고여 던전치고는 제법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있었고, 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한 줄기 태양광이 호수 표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 여기가 던전이라는 사실이 정말 아쉽다고 느껴질 정도네요.”
“그렇게 감상적이 될 필요는 없어. 몬스터나 트랩같은 위험 요소가 있는 한 던전은 백날 지나봐야 던전에 불과하니까.”
스테치가 딱 잘라 말했다.
“《패스파인딩》에 의하면 던전 중심부까지 가는 길은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것 같아.”
스테치가 가리킨 방향에는 어디론가 이어지는 다른 통로가 있었다. 아쉽게도 호수와 이 공간의 구조상 직접 헤엄치는 것 이외에는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물에 들어가는 건 싫은데…….”
“이제와서 새삼 물이 무서우신거에요?”
키득대는 엘레나의 물음에 스테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예전에도 여기랑 비슷한 환경의 던전에 갔던 경험이 있거든. 호수물이라고 생각했던게 알고보니 물을 대량으로 흡수한 슬라임이었던 적이 있었어.”
그 말에 엘레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며 심각한 분위기가 되자, 스테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애초에 그런 경우 자체가 굉장히 희귀한 사례니까. 만약 조심해야한다면 그런 경우보다는 일반적인 수생 몬스터를 조심해야겠지.”
“그건 결국 위험하단 뜻 아닌가요…….”
불안해하는 엘레나의 모습에 스테치는 《패스파인딩》 스킬에 의해 보이는 빛의 궤적을 바라보았다.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이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루트. 재고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봐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 와서 다른 루트를 찾기엔 리스크가 크지 않을까. 되돌아가면 고블린들이 어느 순간부터 다시 공격해올수도 있고, 게다가 어쩌면 이 길이 목적지까지 향하는 최단 루트임과 동시에 유일한 루트일지도 모르니까.”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를 따라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호수 안으로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부츠속으로 물이 차오르고, 입고 있는 바지와 셔츠가 푹 젖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텀벙텀벙-
조용한 던전의 호수 주변으로 물장구치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역시 과민 반응이었나?’
의외로 호수의 중간 지점을 지나쳐갈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스테치는 안도의 기색을 내비치며 뒤에서 따라오던 엘레나에게 외쳤다.
“좋아, 이대로 조금만 더-”
『스테치, 아래를 봐라!』
메멘토 모템의 다급한 부름에 스테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물속으로 처박으며 눈을 부릅떴다.
반지의 빛이 환히 주변을 밝히자, 저 깊숙히 심연으로부터 꾸물거리며 솟아오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잘 안보이는데…… 뭐지?!’
『켈피다!』
메멘토 모템이 한층 더 강한 빛을 발산하자 물고기 하반신을 가진 말 형태의 몬스터, 켈피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리조차 내지 않고 수초같은 갈기를 하늘거리며 빠르게 물속을 유영해나가는 그 모습에, 스테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켈피가 정작 먼저 발견한 자신을 본체만체하며 지나치자, 의아해하던 스테치는 퍼뜩 엘레나를 떠올리고선 얼굴을 물 밖으로 꺼냈다.
“엘레나, 물 속에!”
조심하라고는 했지만, 호수 한가운데에서 대체 어떻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스테치 본인도 알지 못했다. 스테치에게서 5m 정도 떨어져있던 엘레나는 그의 외침을 듣자마자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와 단검을 뽑아들었지만, 발끝을 물고 잡아당기는 켈피에 의해 수면 아래로 쑥 들어갔다.
“!”
물속에 들어오자마자 엘레나가 정면으로 마주 본 것은 켈피의 불그스름한 눈.
녀석이 시선을 통해 발하는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엘레나의 눈에서는 빛이 사라지고, 이윽고 무기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막아야 해! 이대로 가다간 엘프가 저 놈 먹잇감이 되고 말겠어!』
‘나도 알아!’
스테치는 엘레나가 위치한 방향과 반대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어 버스트》!’
퍼어엉!
폭발을 연상시키는 소리와 함께, 대량의 물을 밀어내며 가속한 스테치가 켈피의 시야에서 엘레나를 낚아채고는 저 멀리로 이동했다.
먹잇감을 빼앗긴 것이 짜증 났는지, 입주변에 물거품을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는 켈피. 스테치는 켈피가 가해오는 정신공격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윽!’
눈을 마주친것도 아닌데 이정도의 효과라니……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손을 오른쪽으로 뻗어!』
켈피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눈을 감은 채 지시에 맞춰 손을 뻗자, 메멘토 모템은 그를 대신하여 스킬을 발동시켰다.
『《파이어볼》!』
수중에서 《파이어볼》이라고? 스테치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스테치의 손바닥에서는 화구 대신 펄펄 끓는 물이 발사되었다.
달궈진 물이 별안간 앞으로 뿜어져나오자, 직선으로 헤엄쳐오던 켈피는 꼼짝없이 명중당했다.
비늘과 살점이 하얗게 익어가자 녀석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번개처럼 스테치와 엘레나를 지나쳐, 저 깊은 호수 아래로 도망쳤다.
이제 끝났나? 하고 생각한 순간, 스테치는 켈피가 도망쳐 내려간 호수 밑바닥으로부터 더 큰 켈피 무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곤 동시에 눈치챘다. 고블린들은 스테치 일행을 유도했던 것이다.
‘고블린들이 우리들의 추격을 멈춘건 이녀석들이 두려워서였나!’
“어푸!”
수면 밖으로 머리를 꺼낸 스테치는 엘레나를 붙잡아 헤엄쳤다.
원래는 몬스터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헤엄쳐 지나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먼저 덤벼준다면야 그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에어 버스트》!”
물 속으로 손을 뻗으며 재차 스킬을 시전하자, 다시금 호수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스테치의 몸이 물보라와 함께 공중으로 치솟았다.
뒤를 따라오던 켈피 떼의 절반은 수압으로 밀려나고, 나머지는 스테치가 날아간 방향을 따라 뛰어올랐다.
켈피의 말 주둥이는 스테치와 엘레나를 놓친 채 허공을 깨물었고, 스테치는 넋을 잃은 엘레나를 품에 안은 채 목적지인 호수의 뭍으로 떨어졌다.
콰당탕!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벌떡 일어난 스테치가 호수의 수표면을 향해 《아크》를 시전하자, 보랏빛 전류가 수면을 때리고 들어가 그 안의 켈피들을 떼거지로 감전시켰다.
“~~!!”
번개가 내리치듯 물 밑으로 몇 번이고 섬광이 번뜩이더니, 잠시 후엔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켈피들의 몸뚱이가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퉷! X발…….”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쾌한 감각에 스테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엘레나를 등에 업고는, 빠르게 목적지였던 통로로 들어섰다.
차라리 던전 안쪽으로 들어가는 편이 이 망할 호수 옆에 있는 것보단 안전하리라.
* * *
밀러는 길찾기용 마도구, ‘헤러틱 다우저’를 완전히 봉인한 채 나머지 두 동료를 선도하여 길을 따라갔다.
도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앞질러간 일행이 화려한 흔적을 남겨두고 간 덕분에 엉뚱하게 헤맬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기분 나쁜 녀석들.”
휙!
어둠속에서부터 전신을 핥아내듯 쳐다보는 고블린들의 눈길에, 에머릭은 검을 위협적으로 휘둘러 보이며 투덜댔다.
고블린은 불빛도 없이 자신들을 정확히 포착해내는 에머릭 일행의 모습이 놀라웠던 모양인지, 몇 번의 시도 이후론 접근할 생각을 완전히 접은 모양이었다.
잠시 뒤, 밀러는 던전 안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호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드문드문 떠다니는 무언가를 발견한 에머릭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맙소사, 저거 전부 다 켈피잖아.”
켈피는 그 특유의 환각ㆍ최면등의 정신계 능력으로 베테랑 모험가조차 우습게 쓰러뜨리는 고위험도 몬스터였기 때문에, 밀러와 레이먼드가 말을 듣자마자 무기를 뽑아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머릭은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안심해, 어찌된 일인지 저 녀석들 모두 기절한 거 같아. 멀쩡한 상태였다면 저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지.”
눈을 까뒤집고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십 마리의 켈피들. 직감적으로 이것이 먼저 앞서나간 파티의 짓이라는 것을 눈치챈 밀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썩을,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행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잖아. 너희 둘, 어서 움직여!”
과감하게 물속을 발을 내딛는 밀러의 모습에, 남은 두 사내들도 황급히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수 한가운데를 요란한 물장구 소리와 함께 가로질러가는 동안, 밀러의 예상대로 선두에서 앞서나간 어느 일행 덕택에 몬스터의 기습은 오지 않았다.
“좀 진정해!”
에머릭은 호수 건너편 뭍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가는 밀러를 붙잡으며 말을 걸었다.
“제 아무리 능력있는 모험가라도 던전 키퍼까지 순살 시키는 건 무리야. 괜히 조급해져서 그르치지 말고, 차분히 접근해보자.”
“…… 이번만큼은 나도 동감이야.”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레이먼드마저 그 말에 동의를 표하자, 밀러는 입을 꾹 다물고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 던전답게 복잡한 구조의 던전은 아니었던 탓에, 호수를 건너온 뒤로는 갈림길 하나 없는 일직선의 길이 이어졌다. 별다른 몬스터가 가로막는 일도 없어서, 밀러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쿠르릉-.
하지만 때마침 그녀의 불안감을 가중시키듯, 통로 깊은 곳 어딘가에서부터 간헐적으로 땅이 흔들거리며 폭음이 울려퍼져왔다.
“서둘러!”
급경사진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거의 구르다시피 뛰어가던 그들은, 통로의 끝에 이를수록 그것이 점점 가까워지자, 밀러는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콰광!
난데없이 생각 이상으로 가까운 곳에서 터져 나온 폭발음에 밀러와 에머릭은 동시에 몸을 낮췄고, 레이먼드는 뒤로 몸을 쭉 뺐다.
“뭐, 뭐였…….”
“쉿!”
밀러가 레이먼드의 입을 손으로 덮어 제지한 뒤, 머리만 대공동 안으로 슬며시 내밀자 짜릿하면서도 강렬한 빛을 발하는 스파크가 그녀의 코끝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콰광!
5m 정도는 되는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손에 든 클럽을 바닥에 내리치자, 사방을 둘러싼 벽으로 바위 파편이 튀어 우박처럼 두들겼다.
트롤처럼 거대한 몸집의 이 괴물은, 긴 꼬리와 더불어 하나의 목 위에 아홉개의 안면을 달고 있었다.
각자 다른 곳을 훑어보던 눈알들이 일제히 어느 한 지점으로 향하자, 입‘들’로부터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바닥에 끝이 닿아있던 클럽을 빗자루처럼 휘둘러 쓸어내자, 괴물의 크기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 인간 둘이 전력으로 몸을 날려 피하는 것이 마침 밀러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 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