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삼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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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삼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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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삼파전
2021.11.06.
“《아크》!”
남성이 위쪽으로 손을 뻗자, 나뭇가지처럼 퍼져 나가는 스파크가 섬광같이 솟아올랐다. 괴물의 클럽과 팔뚝을 뱀처럼 휘감고 올라가던 전류는, 괴물의 안면 하나를 새까맣게 태워 버렸다.
불꽃놀이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마법 퍼포먼스에 밀러를 포함한 나머지 둘은 입을 쩍 벌렸다.
마법도 마법이지만, 남성의 동료로 보이는 여성 또한 인간 같지 않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괴물의 몽둥이질과 펀치를 흘려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플립으로 회피와 동시에 괴물을 향해 활로 대응 사격까지 먹이는 그 솜씨는, 이미 전투에 능한 수준을 넘어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 실력이면 아까 그 고블린이나 켈피들이 왜 도륙당했는지가 설명되네.”
레이먼드의 말에 밀러는 검지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대로 놔두면 저 괴물 같은 콤비에게 아티팩트를 빼앗길 우려가 있었다.
“……레이먼드, 저격 준비.”
“진심이냐?”
레이먼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군말 없이 화살과 활을 꺼내 들었다. 던전 키퍼와 다른 파티가 서로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밀러는 키퍼와 마법사 중 어느 쪽이 더 잠재적으로 위험할지를 가늠해야만 했다.
“목표는?”
“저 남자의 뒤통수에 한 방 꽂아줘. 키퍼는 우리 손으로 끝장낸다.”
외관의 특징을 기반으로 한 추측이 맞다면 키퍼의 정체는 아귀임에 틀림없었다.
아홉 개의 안면 모두에 치명타를 박아 넣지 않는 이상, 트롤처럼 계속해서 부활하는 몬스터.
거대한 체구에 걸맞은 맷집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롭긴 하지만, 친위대로서 갈고닦아 온 실력과 가지고 온 장비를 총동원하면 쓰러뜨리지 못할 건 아니었다.
밀러의 말에 레이먼드는 한쪽 눈을 감고선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수십 미터 떨어진 데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목표를 저격하기 위해선,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쏠 줄 아는 감각이 필요했다.
그리고 레이먼드에겐 그것이 가능했다.
《액티브 스킬 : 페너트러블 샷(lv 4).
스킬 숙련도에 비례하여 두꺼운 장갑이나 외피 등, 두께가 있는 물체에 대한 관통 능력을 상승시킵니다.》
《액티브 스킬 : 슈팅 어시스턴스(lv 3).
사격 계열 공격에 대한 명중률 보정을 더해 줍니다. 스킬 숙련도에 비례하여 투사체가 풍향, 풍속, 중력 등 자연요건의 영향을 덜 받게 됩니다.》
온갖 스킬들을 중첩시킨 단 한 발의 치명적인 화살이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 안에서 당장이라도 목표에게 파고들 준비를 마쳤다.
키퍼와의 전투로 정신없는 이 상황에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피한다는 것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울 터.
밀러와 에머릭이 조마조마한 눈으로 키퍼와 싸우는 남성과 레이먼드를 번갈아 지켜보는 가운데, 심호흡으로 조준을 안정시킨 레이먼드가 조용히 읊조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잘 가시게.”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발사된 화살이, 타겟인 남성의 후두부로 향했다.
* * *
팍!
“이건 웬 거야?”
눈앞을 가로질러 저 멀리 날아가는 화살에 당황한 스테치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레이먼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타겟인 스테치를 향해 화살이 날아가는 그때에, 저격을 위해 집중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레이먼드는 자신의 일격이 명중되기도 전에 스테치가 뒤돌아보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우연이라고 치기엔 기막힌 타이밍으로 화살을 포착해낸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끝까지 화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상반신을 젖혀 피해냈다.
동체시력? 반응속도?
어느 쪽도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에 반응한 것은 설명이 되질 않는다.
“에머릭!”
밀러의 외침과 동시에 레이먼드의 몸이 번쩍 들리는가 싶더니, 대공동 한 편으로 날아갔다.
콰과광!
에머릭에 의해 공중으로 집어 던져진 레이먼드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동료가 숨어 있던 통로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대로 낙법을 취하지 못하고 바닥에 충돌한 레이먼드는 고통으로 신음했고, 그런 그를 향해 스테치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파이어볼》이 발사된 직후 남은 잔불이 그의 손에 엉겨 붙듯 일렁거리며, 겁에 질린 레이먼드의 얼굴을 비췄다.
“뭐냐, 너희들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에, 레이먼드의 뒤쪽에서 멍하니 스테치를 쳐다보던 밀러는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기습이 실패할 경우에 대해서는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레이먼드의 실력을 믿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리더 역할을 맡은 이상 그녀는 서둘러야만 했다.
한편, 스테치는 눈앞에 등장한 새 집단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인 탓에 공격받았다는 분노보다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은 뭐지? 난데없이 나타서는 다짜고짜……’
『사람인 줄 모르고 공격했다…… 같은 헛소리는 아닌 거 알지? 명백한 적의를 담고 쏜 화살이었다고.』
메멘토 모템이 차가운 목소리로 스테치에게 귀띔하자,
“우어어억!”
두꺼운 목에 핏줄이 잡힐 정도로 힘이 들어간 괴성이 스테치의 등 뒤에 서있던 아귀 주둥이들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엘레나의 시선 끌기에 흥미를 잃은 모양인지, 아귀는 목표를 스테치로 바꾸며 클럽을 재차 내리쳤다.
“《아크》!”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한 스테치는 아귀가 아닌, 밀러 일행을 향해 주문을 발사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자들이 아군은 아니라는 점이었으니까.
레이먼드의 앞에 선 에머릭은, 방패를 전면으로 내세워 《아크》의 에너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방패가 흡수하지 못하고 남은 전기가 에머릭의 전신을 휘젓고 다니자, 그는 고통에 겨워 이빨이 깨지도록 악물었다.
에머릭을 포함하여 친위대에서도 정예에 속한 일부 단원들은, 마법사들이 아티팩트의 강력한 능력을 모사하고자 만든 마도구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검과 방패의 근접전투 타입인 에머릭은 마법에 취약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모든 마력 에너지를 흡수해서 흘려보내는 축전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이 녀석은 절대로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야!’
마법사들에 의해 마법으로 환원되는 마력 에너지는, 그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 적으로 손실이 일어나며 그 위력이 감소한다. 그러나 에머릭은 지금 자신의 축전 방패를 두들기는 이 주문이, 1:1의 완벽한 마력 교환비를 갖춘 아티팩트 메멘토 모템의 의해 시전된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진 못했다.
그의 눈에 스테치는 그저 터무니없는 규모의 주문을 마구 영창해대는 괴물일 뿐이었다.
스테치가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을 견제하는 사이, 아귀의 주먹질을 피해 슬라이딩해 온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은 누구죠?”
“누군지는 몰라도 같은 편은 아닌데!”
정체불명인 3인조가 노리는 건 단순했다.
스테치같은 괴물을 상대로 싸워서 이겨먹기는 힘드니, 최대한 던전 키퍼를 보조하여 스테치를 대신 처리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렇다면 스테치는 역으로 그들에게 접근해서 난전으로 몰고 가면 그만일 뿐이었다.
“!”
때마침 엘레나가 쏜 화살이 아귀의 눈알 하나를 쑤시고 들어가자, 거기에 맞춰 스테치도 공격을 개시했다.
“하아아아!”
에머릭이 《아크》를 전부 흡수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동안 스테치는 페네트레이터를 뽑아 에머릭의 축전 방패를 강하게 내리쳤다.
상상 이상으로 묵직한 일격들이 반격할 틈도 없이 수차례 쏟아지자 에머릭은 가드가 내려갔고, 엘레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귀로부터 돌아서며 상대의 머리통을 조준했다.
퓩!
그러나 날아간 화살은 목표까지 닿는 일 없이 무언가에 부딪혀 맥없이 튕겨 나갔다.
“당황하지 마! 침착하게 각개격파에 들어간다!”
밀러가 팔을 크게 휘두르자, 에머릭의 눈앞에 뱀 똬리 마냥 나선형으로 꼬여 방패막을 형성하고 있던 그녀의 검이 스테치의 옆구리로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포지션 213!”
스테치가 방패와 힘겨루기 도중이던 검을 비틀어 검날을 비껴낸 뒤, 밀러가 외치자 그녀의 뒤에서 레이먼드가 나타나 사격 자세를 취했다.
스테치의 시선이 레이먼드에게 쏠린 사이 밀러의 검이 페네트레이터의 검등을 타고 미끄러지더니,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뻗어져 스테치를 그대로 옥죄었다.
“우옷?!”
“《쉴드 배쉬》!”
팔에 힘을 줘 보지만, 꿈쩍도 안 하는 밀러의 검. 때는 이때다 싶어 에머릭이 스킬로 스테치를 밀어붙이고,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스테치를 향해 레이먼드는 두 번째 화살을 발사했다.
‘이번에야말로……!’
부디 이 한 발로 끝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활을 쏜 레이먼드였으나, 별안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의 강풍이 스테치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더니 화살의 궤도가 꺾여 저 멀리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거기까지만 해도 황당할 지경이건만 화살이 빗나가기가 무섭게 엘레나의 화살비까지 쏟아지자, 밀러 일행 모두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끝이 없다.
스테치처럼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를 상대로 정면승부에서 이기려면, 빈틈없는 연계로 단번에 기세를 몰아 반격할 틈도 없이 몰아쳐야만 했다. 바로 그러기 위해 친위대 중에서도 서로 가장 가까우면서, 능력도 있는 3인이 차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스테치와 함께 있는 저 여자가 밀러의 연계를 차단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원 사격을 퍼부어대니 제대로 공격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스테치가 기어이 밀러의 검을 풀어내고 뒤로 빠지자, 고통으로 울부짖는 아귀를 배경으로 양측 간의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뭐하는 놈들이냐? 왜 나를 노리는 거지?”
다이렉트로 먼저 질문을 던지는 스테치. 하지만 밀러와 나머지 두 사내는 그런 그를 가만히 노려볼 뿐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줄여서 정보 유출을 막으려는 심산인가?』
‘난들 아냐. 저 녀석들 목적이 나라고 해도 딱히 거기에 대해 짚이는 게 없는데…….’
만약 이들이 스테치 자신을 노리고 온 암살자라면, 그들을 보낼 만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스테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고민하다가 일순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제라드를 떠올린 스테치는 곧 스스로 그것을 부정했다.
지금까지 그는 신중에 신중을 더해서 이동 경로를 짜왔으며, 제아무리 마법을 쓴다고 해도 손가락질 한 방으로 스테치의 위치를 그냥 알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런 외딴 장소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가 등장한다니,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아니라면 아티팩트를 노리는 건가? 아니면 키퍼를 쓰러뜨리고 얻는 소재?’
모르겠다. 스테치를 제치고 아티팩트를 먼저 얻는 게 목적인가? 그렇다곤 해도 던전 키퍼를 목전에 둔 판국에 같은 인간을 먼저 공격한다니, 그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스테치의 표정에, 밀러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자신의 두 동료에게 귀띔했다.
“작전 변경이다. 레이먼드, 에머릭은 저 남자를 상대해. 난 여자 쪽을 손봐주겠어.”
“……알았어.”
긴장감이 역력한 기색으로 끄덕여 보인 에머릭과 레이먼드. 모두가 동시에 다음 행동으로 들어가려던 그 순간, 고통으로부터 회복한 아귀의 포효가 대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 * *
목표의 상대역으로 레이먼드와 에머릭을 배정하고, 그 동료인 여성을 직접 처리한다는 밀러의 판단은 사실 꽤나 적절했다.
마법의 위력이야 어찌 되었건 에머릭에겐 대 마법전을 상정한 축전 방패가 있었고, 자신에겐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는 특수한 검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무기는 평소엔 장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밀러가 마력을 불어넣으면 체인과 와이어로 연결된 검의 조각들이 나누어지며 채찍처럼 휘두를 수 있게 되는 사복검이었다.
마법사가 되기엔 너무나 미약한 마력을 보유한 밀러에게 있어, 이 사복검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
살아 있는 생물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으로 튕기듯 뻗어 나간 사복검의 날이 엘레나의 가죽 조끼를 찢으며 지나가자, 엘레나는 활대를 몽둥이처럼 잡고 우악스럽게 휘둘러 사복검을 쳐냈다.
한편 제정신을 차리고 던전의 침입자들을 노려보던 아귀의 눈이 서서히 붉게 물들고, 살짝 벌어진 입 틈새에서는 뜨거운 대장간의 화로처럼 일렁이는 불길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푸화아악-!
보는 사람의 눈마저 태워 버릴 기세로 새하얀 빛을 발하는 불꽃이, 아귀의 주둥이들로부터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쏟아지는 화염의 파도에 엘레나와 밀러가 허둥지둥 옆으로 피하는 사이, 아귀를 중심으로 둔 그 반대편에선 스테치와 에머릭 일당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엘레나!”
스테치의 부름을 들은 에머릭이 외쳤다.
“자기 여자에게 신경 쓸 틈이 있거든 눈앞의 일에나 집중하시지!”
방어에만 몰두하던 에머릭이 갑자기 반대쪽 손의 검을 휘두르자,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스테치는 무기를 맞댄 채 뒤로 수 발짝 물러섰다. 페네트레이터는 일점 파괴용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단순 힘겨루기에 들어가면 그냥 좀 특이한 외견을 가진 검에 불과했다.
“그쪽이야말로, 내 생각해 줄 여유가 있다면 본인 일부터 신경 쓰라고!”
스테치는 페네트레이터의 넓적한 검등을 왼손바닥으로 밀어붙인 뒤, 손을 떼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에어 버스트》!’
주먹 쥔 손가락 사이로 미세한 바람의 기운이 흘러나오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에머릭이 방패를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
폭탄을 연상케 하는 굉음과 함께 터져나가며 방패를 두들기는 공기의 구체. 휘몰아치는 풍압에 맞서 에머릭의 축전 방패가 한계까지 풀가동하여 스테치의 주문을 흡수하였으나, 그러고도 남는 나머지 공기의 흐름에 에머릭은 숨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다.
그런 둘을 놔둔 채 어느 틈엔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레이먼드는 조용히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