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광산 속으로
(40/203)
40화 광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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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광산 속으로
2021.11.10.
캐스퍼와 레티는 일단 검의 부품 환장 및 개조를 위해 스테치의 페네트레이터를 가져갔다.
간단한 작업이기 때문에 이쪽은 금방 끝날 것이라고 레티가 단언했기에, 착수 기간은 길어야 이틀 정도로 추측되었다.
“돌겠네, 진짜.”
스테치는 홀로 개인방 탁자 앞에 앉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아침의 미팅에서 레티가 건넸던 제안은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합리적이었으나, 그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질 좋은 방어구 제작에 필요한 가죽은 당연히 동물의 것이 아닌 몬스터의 가죽이다.
문제는 센티그마같은 대도시는 몬스터에 대한 방비가 상당히 잘 되어 있는 도시라는 점이었다.
갱도 주변에 몬스터 출몰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벌떼같이 몰려드는 군대를 보면 그 사실은 더더욱 명백했다.
그런데 이토록 몬스터의 씨가 마른 상황에서 가죽을 수급해 오라는 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들라는 뜻과도 같았다. 심지어 센티그마를 방문하는 행상인들의 거래 품목 중에 가죽은 없다고 봐도 만무했으니, 누군가에게 구입해서 재료를 충당한다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달칵-.
때마침 스테치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엘레나는, 개인실에서 고민 중이던 그를 발견하자 품에 안고 있던 책자를 건네주었다.
“음?”
“레티가 건네준 카탈로그에요. 요구 사항을 맞추려면 최소한 그 책자에 표시된 수준의 가죽이 필요하다고 그러더군요.”
몬스터의 가죽이 동물 가죽보다도 고급품으로 취급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력으로 충만한 몬스터의 가죽을 방어구의 소재로 사용할 경우, 해당 몬스터의 방어적 특성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같은 몬스터라고 해서 그레이트 울프랑 고블린의 가죽이 동급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디보자…….”
요구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필요한 재료도 희귀해진다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티가 지정한 몬스터들은 전부 라크샤 산맥 주변에선 마주치기 힘든 것들뿐이었다.
“…… 대부분은 숲에서도 본 적도 없는 녀석들 투성인데요. 여기 이 아이스 드레이클링은 또 무슨 몬스터죠?”
“혹한 환경 속에서 서식하는 몬스터야. 최소한 라크샤 산맥 주위에서는 볼 일이 없지.”
“정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방어구는 포기할까요? 일단 급한 대로 가죽을 덧대면 수리 정도는 가능합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표하며 책자를 덮은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아래층의 술집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점내는 밥을 먹으러 온 사람으로 바글거리던 참이었다.
바 테이블에 앉아 여급을 통해 음식을 주문한 스테치는 한창 담뱃대를 뻐끔거리며 농땡이를 피우던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라크샤 산맥의 갱도 근처에서 몬스터가 출현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발타자르는 뜬금없는 스테치의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더니, 뜸을 들였다가 되물었다.
“……설마 그 몬스터들을 잡으러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아서라. 어지간한 경비로도 수습이 되지 않으니 다른 지역에서 병사들을 소집하고 있는 것 아니겠냐?”
발타자르는 단순히 몬스터의 위험성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분을 숨기고 다녀야 할 스테치에게 있어, 물자의 이동이 철저히 관리감독되고 있는 라크샤 산맥의 길은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앞으로 제가 센티그마 같은 대도시에 몇 번이나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데다가, 서두르지 않으면 도시 주둔군이 먼저 녀석들을 토벌할지도 모르겠거든요.”
멀쩡한 기성품을 놔두고 수제 방어구에 집착하는 것이 다른 이의 눈에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스테치는 자신의 몸을 지키는 물건에 대해 재료와 자금을 아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고품질의 갑옷은 저품질과의 성능차가 어마어마하다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스테치의 말을 들은 발타자르는 턱끝으로 뒤쪽 테이블에서 연신 맥주만 들이키던 한 남자를 가리켰다.
“저기 저 친구는 센티그마의 경비대원 중 하나야. 치안유지 부대의 내부 사정에 대해 흘려주는, 블랙 마켓의 아주 중요한 연결책이지. 가서 한 번 물어보지 그래? 애초에 여기까지 몬스터 소식을 가지고 온 것도 저놈이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스테치는 고개를 주억거린 뒤 바로 일어서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철갑옷을 걸친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잔 밑바닥에 고여 있는 맥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찍이서도 술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것이 일찍부터 거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술 한잔 사드리죠.”
다짜고짜 합석을 요청해온 스테치의 모습에 남자는 화들짝 놀랐으나, 공짜 술이라는 말에 혹했는지 잠깐 고민하다가 이윽고 앞자리를 가리켰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차례대로 자리에 앉는 스테치와 엘레나의 모습에 그는 초조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광산 내부의 몬스터 출몰 사고.”
“또 그 문제야? 안 그래도 자주 입에 담을 만한 이야기도 아닌데, 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그것만 물어보는 거지…….”
짜증을 부리며 중얼대는 남자를 제지하며, 스테치는 말없이 여급이 놓아두고 간 새 맥주를 들어 그에게 건네주곤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단순한 흥밋거리 소식이 아니에요. 당신은 작업원들이 습격당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한 건가요?”
“그래.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들이 녀석의 발톱에 찢겨 나가는 것을 넋 놓고 구경만 한 것도 나고, 병사로써 맞서 싸우지도 않고 병신같이 도망만 친 것도 나다. 불만 있냐?!”
본인은 내심 그 사건으로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인지, 스테치가 묻지도 않은 내용들을 술술 털어놓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바 테이블 뒤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던 발타자르가 외쳤다.
“넌 당연히 죽으면 안 되지! 우리 소중한 정보원인데!”
“아 좀!”
비아냥인지 모를 한 마디에 몸을 비트는 남자를 무시하며, 스테치는 그에게 몬스터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카탈로그까지 내밀어서 확인시킬 생각이었지만…….
“만티코어였어.”
생각치도 못한 몬스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스테치는 일순 당황하여 카탈로그의 만티코어 사진을 펼쳐 보인 뒤 재차 남자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만티코어요? 카델트 대사막에서나 볼 수 있다는 그 만티코어가, 라크샤 산맥에서 나왔다 이 말이에요?”
“갱도를 파내려가는 와중에 커다란 벽 하나가 허물어졌는데, 한 쪽 날개가 찢어진 만티코어 하나가 갑자기 그 안에서 쑥 튀어나온 거야. 경비 대원들이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도륙 내 버리더군.”
만티코어는 거대한 박쥐 날개에 전갈의 독침 꼬리가 달린 사자 머리의 몬스터였다. 온갖 다양한 강도의 복합 소재가 섞여 있는 만큼, 갑옷의 소재로서도 다양한 요구 조건이 충족 가능한 몬스터였다.
“……고맙습니다. 사례금은 여기요.”
텁!
남자의 도움으로 만티코어의 위치까지 대강 파악한 스테치가 돈주머니를 건네며 자리를 뜨려하자, 남자는 술에 쩔은 사람 치고는 강한 힘으로 스테치의 손목을 붙잡았다.
“놈을 잡으러 갈 생각이야?”
“네. 몬스터의 소재가 필요하던 참이라…….”
“관둬. 어설픈 모험가 나부랭이나 오합지졸 군대가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강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통째로 발톱에 썰려 나가는 꼴을 내가 직접 봤다니까?”
어찌나 심각했는지, 남자는 돈주머니를 집더니 스테치의 가슴팍에 대고 꾹 밀어냈다.
“돈은 도로 가져가. 누구 하나 뒈지는 꼴 구경하면서 돈이나 따먹으려고 알려준 정보는 아니었으니까.”
위기상황에 무감각해진 걸까, 아니면 그만큼 지난 시간 동안 성장한 것일까? 스테치는 남자가 놀랄 정도로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난 보기보다 강하거든요, 아저씨. 괜히 믿는 구석도 없이 만티코어를 잡으러 가겠다는 소릴 꺼내겠어요?”
“무슨 헛소리야?”
웬 뚱딴지같은 소릴 하냐며 역으로 쏘아붙이는 남자를, 스테치는 억지로 잡아끌더니 술집 바로 옆에 위치한 하수도로 이동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반응에 스테치는 조용히 흘러가던 하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빠지직!
눈에 잔상이 남을 정도로 강력한 섬광이 하수로를 메움과 동시에, 스테치의 손바닥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스파크가 물속을 어지럽히며 번뜩였다.
그 위력이 사람은 물론이고 몬스터조차 위협할 만한 수준임을 한눈에 알아본 남자는 기절할 듯이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 마법사……?”
“그건 아니지만, 최소한 제 한 몸 지킬 수준은 되고도 남아요. 이제 불만은 없겠죠?”
눈으로 본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자신감 넘치는 스테치의 말에 남자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갱도까지 몰래 이동할 방법이 필요하지 않아? 부탁 하나만 들어준다면 내가 전부 처리해 주지.”
* * *
아침 해가 뜨기 몇 시간 전.
센티그마의 사람들은 금일 있을 작업의 준비를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손수레에 장비와 흙을 실어 나르고, 병사들은 장비를 점검했다.
“거의 다 왔다.”
한편, 경비대원 ‘딕슨’은 어두운 지하 수로에서 랜턴을 들고 앞장서 스테치와 엘레나를 이끌고 있었다. 도무지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딕슨에게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몇몇 마법을 선보이자, 그는 처음엔 기절할 듯이 놀라더니 이후엔 스테치의 작업을 돕겠다고 나섰다.
경비 인력들의 눈이 쫙 깔린 이상, 스테치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티코어가 출몰했다던 갱도까지 지상루트를 통해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침 라크샤 산맥의 지하에는 광물 찌꺼기가 섞인 침출수를 흘려보내는 복잡한 배수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이 배수망은 사실 알려지지 않은 루트에 의해 도시의 하수망과 연결 돼있다는 것이었다. 발타자르의 말에 의하면 도시설계 과정 중 누락된 구역이라고.
딕슨이 제안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 만티코어 사건 이후로 딕슨의 안위를 걱정한 상관의 권유에 의해, 일시적으로 그의 순찰 구역이 배수로로 변경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스테치 일행은 하수 시스템 구조가 그려진 상면도와 하수로 격벽의 열쇠를 전부 제공받아, 광산으로의 침입 및 가죽 운반 루트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좋아, 계획대로 하자.”
딕슨의 뒤를 따라오던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길을 지나 이리저리 꺾어가며 한참을 걸어가던 그들은, 곧 거대한 쇠창살로 된 격벽을 발견했다. 열쇠로 문을 따자마자 보이는 것은 폐수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구멍이었다.
“이게 마지막 격벽이야. 이후부터는 지도를 보고 직접 가면 돼. 정말 괜찮겠어?”
진입 준비를 마친 스테치와 엘레나에게 딕슨이 물어오자, 스테치는 피식거리며 그에게 대꾸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어제 저한테 했던 부탁은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어쨌든 약속한 걸 잊지 마.”
죽은 동료들의 유품을 회수하는 것.
온갖 위험을 무릅쓴 딕슨이 스테치에게 요구한 것은 그것 한 가지뿐이었다.
손을 흔들며 딕슨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낸 스테치와 엘레나는,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중독될 것만 같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배수구로 몸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