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암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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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암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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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암컷
2021.11.13.
“왜 그러세요?”
『왜 그래?』
반지나 엘레나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반지로 복부 안을 비추며 나이프로 내장을 헤집는 스테치. 잠시 후, 스테치는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말했다.
“……없어.”
“뭐가…… 말이죠?”
“말 그대로야. 없어, 없다고! 녀석이 잡아먹었을 시체가 없단 말이야.”
그 말에 메멘토 모템은 시체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확실히, 죽은 희생자들의 숫자 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한 위장 상태에 메멘토 모템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엘레나도 스테치처럼 복부를 열어 안을 살폈다.
“그 말대로네요. 병사들을 통째로 삼킨 몬스터 치고는 안이 지나치게 깨끗해요. 그 흔한 금속 파편조차 나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엘레나…….”
스테치의 손가락이 만티코어의 몸뚱이 어느 한 부분으로 향하자, 메멘토 모템과 엘레나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수컷?”
『……수컷?』
이 사실이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엘레나의 사고가 빠른 속도로 가속했다.
존재해야 할 시신들의 부재, 그리고 수컷 만티코어가 지키고 있던 알. 스테치와 엘레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슈팟!
그 순간, 산성액을 뚝뚝 흘리는 거대한 독침이 스테치의 머리통으로 쇄도해왔다.
* * *
가장 먼저 반응한 엘레나가 스테치를 밀치자,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정확히 만티코어의 꼬리가 뚫고 지나갔다. 엘프의 예리한 감각으로도 예측은 커녕 맞기 전에 피하는 것이 고작이라니…….
그러나 한 번 빗나가고 끝인 줄 알았던 꼬리 독침은, 곧바로 기역자로 엘레나를 향해 방향을 틀더니 그녀의 목을 휘감아 올렸다.
“커헉!”
“엘레나!”
만티코어의 힘이라면 단숨에 엘레나의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 스테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주문을 쐈다.
“《에어 버스트》!”
압축된 공기탄에 얻어맞은 꼬리가 대포에 맞은 것처럼 꺾이며, 그 충격으로 붙잡은 엘레나를 놓치고 말았다.
스테치가 안도의 한숨을 쉬자, 만티코어는 자신을 방해한 그를 노려보더니 머리를 들이밀며 돌진해왔다.
박치기에 정통으로 맞아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데미지를 입은 스테치가 붕 떠서 날아가자, 만티코어는 꼬리 끝을 그대로 찔러 넣어 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흐아아아악!!”
왼쪽 어깨를 부여잡으며 울부짖는 스테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또 한 마리의 ‘암컷’만티코어였다. 독침에 꿰여 전신이 그대로 공중에 들어 올려진 그는, 체내에 주입된 산성액에 의해 녹아내리는 감각을 산채로 느끼며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텔리어!”
비명에 가까운 엘레나의 부름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꺾여 있는 날개, 수많은 흉터까지…… 틀림없다.
이 녀석이야말로 딕슨이 얘기했었던 그 만티코어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수컷이 알을 보호하는 동안 먹이를 찾으러 갔던 것이겠지.
눈의 흰자를 까뒤집으며 기절하려는 찰나, 희미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며 스테치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파이어볼》!』
퍼엉!
늘어뜨린 손으로부터 난데없이 발사된 《파이어볼》이 지면에 닿고 폭발하자, 만티코어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휘적거렸다.
꼬리 끝 독침에 매달린 채 이리저리 흔들거리던 스테치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메멘토 모템은 즉시 회복 스킬을 시전했다.
『젠장! 회복 속도가 너무 더뎌!』
《리커버리》는 회복이라기보단 신체를 원래의 형태대로 복구시켜 주는 스킬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어온 이물질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이 경우엔 스테치의 체내로 스며든 산성액이 그 이물질에 해당했다.
“정신 차려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하게 된 엘레나가 달려와 스테치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눈이 멀어 버릴 기세로 빛을 뿜어내는 메멘토 모템의 모습과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는 상처 때문에, 그녀는 천만다행으로 스테치가 목숨은 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킬의 복구능력과 산성액의 부식과정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벌이는 사이, 스테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퍽!
사정없이 재차 꼬리를 휘둘러 눈앞의 엘레나를 쳐 날려 버리는 만티코어.
방패 대신으로 들었던 활이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대신 부러졌고, 엘레나는 바닥을 구르며 한참을 미끄러지고 나서야 멈췄다.
“엘레…… 우웨에엑.”
널브러진 채 위에 고여 있던 핏물을 그대로 토해 내는 스테치. 조금이라도 산성액을 중화시키기 위해 주머니에 하나 남아 있던 포션을 꺼내 마시자, 타들어가던 속이 한결 나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엘레나는?”
『죽지는 않았어. 하지만 저놈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두 눈을 부릅뜨고 비틀거리며 일어선 스테치.
하나가 오든 둘이 오든 살아남기 위해선 전부 쓰러뜨릴 수밖에 없다.
말없이 전의를 불태우며 망고슈를 다시 뽑아 드는 그의 모습에, 만티코어는 조금은 당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이빨을 드러내고선 크게 울부짖었다.
“크와아악-!”
팟!
눈 깜짝할 사이에 발사된 세 개의 독침은 스테치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궤도를 틀어 엉뚱한 위치로 날아갔고, 메멘토 모템이 스테치에게 외쳤다.
『자잘한 공격은 내가 방어한다! 넌 녀석을 공격하는 데에 집중해!』
지면을 박찬 스테치는 곧장 만티코어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앞전의 수컷 만티코어와의 싸움에서 그가 깨달은 점이라면, 그것은 바로 만티코어에게 유효한 대응법이 적극적인 근접전투라는 것이었다.
워낙 강력한 몬스터인 탓에 지금껏 수많은 인간들이 접근을 피하고 화살이나 마법 등의 원거리전을 시도했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만티코어를 격퇴한 사례가 극단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만티코어를 상대로 근접전에서 이긴다는 점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스테치에겐 메멘토 모템이 있었다.
‘똑같은 수가 이 녀석에게도 먹힐까?’
스테치는 망고슈를 전기 에너지로 코팅한 뒤, 스킬의 효과로 끌어올린 반응 속도를 적극 활용해 복부를 노리고 뻗어오는 독침을 옆으로 후려쳤다.
어떻게든 녀석의 몸에 구멍을 내줄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 스테치는 만티코어의 코앞에 도달한 순간, 바닥을 향해 《에어 버스트》를 사용했다.
푸확!
잦은 채굴 작업 때문에 평소 갱도 바닥에 쌓여 있었던 분진이, 《에어 버스트》로 발생된 풍압에 의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라 만티코어의 눈을 가렸다.
팔뚝으로 코와 입을 막은 스테치는 지면을 기는 듯한 낮은 자세로 녀석의 시야를 우회한 다음, 날개 하나의 피막에 칼날을 찍어 넣고 쭉 내리그었다.
“캬아아악!”
서늘하면서도 서서히 퍼지는 날카로운 통증이 이는가 싶더니, 피막이 찢어진 천막마냥 세로로 갈라져 펄럭였다. 익숙지 않은 감각에 만티코어는 괴성을 내지르며 꼬리를 세차게 털었지만, 이미 스테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으아아아!!”
기합인지 뭔지 모를 소리와 함께, 스테치는 뒤를 돌아보던 만티코어의 정면에서 나타나 역수로 쥔 망고슈를 녀석의 눈알에 찍어 넣었다.
콰직!
“켁!”
그러나 녀석은 놀랍게도 미쳐 날뛰기보단, 스테치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을 선택했다. 마치 사냥개가 사냥한 먹잇감을 확인사살 하는 것처럼, 만티코어는 스테치를 물고선 이리저리 흔들다 바닥으로 수차례 패대기쳤다.
콰직! 콰직!
『《리커버리》!』
사실 목이 물린 시점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스테치의 체조직은 만티코어의 이빨로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조차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스테치는 차라리 기절하거나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을 맨 정신으로 체감하고 있었지만.
“그르륵!”
목구멍에 피가 낀 탓에 목소리 대신 피거품을 토해 내는 스테치였지만, 그 눈은 여전히 만티코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만티코어를 대면하기 전의 공포는 온데간데없고, 눈동자 안에는 순수한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흡!”
스테치는 단검을 쥔 쪽의 반대편 손을 주먹 쥐더니, 자신의 목을 쥐고 있던 만티코어의 코를 연신 내리찍었다.
“크와아아악!”
그러는 와중에도 쥐고 있던 망고슈까지 비틀어 상처를 벌리기까지 하는 악랄함에, 살아오면서 무서운 것 없이 설치던 만티코어의 움직임에 처음으로 두려운 기색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인간은 왜 죽질 않는단 말인가?
결국 만티코어는 입에 물고 있던 스테치를 포기하고 거세게 내동댕이쳤다.
바닥을 구르던 그는 기절해 있던 엘레나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멈췄으나, 어째선지 그의 얼굴엔 웃음이 띄워져 있었다.
“으하하하!”
기절해 있던 엘레나가 터져 나오는 광소에 눈을 끔뻑거리며 정신을 차리자, 때마침 성대가 회복되어 목청껏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내뱉는 스테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새끼! 겁 대가리 없이 나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날 두려워하는 거냐!”
정면 승부를 걸어온 적을 상대로 만티코어가 먼저 상대와의 거리를 벌린 것이다. 기세에서 지면 이길 싸움도 지는 법. 스테치는 바로 그 점이 만족스러웠다. 엘레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만티코어와 스테치를 번갈아 살펴보고 있었다.
“아텔리어 씨, 이게 무슨…….”
“일어설 수 있겠어?”
신기하게도 만티코어는 스테치가 자신에게 무엇을 할지가 두려운가 본지, 그가 엘레나를 일으켜 세울 때까지 멀찍이에서 가만히 경계만 하고 있었다.
“가자, 엘레나. 아직 잡아야 할 몬스터가 버젓이 살아 움직이고 있잖아.”
스테치는 현재 매우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는데, 첫 번째 만티코어를 상대하느라 소모했던 마력을 채 회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곧장 연장전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자신이 있었다.
『스테치, 마력이…….』
‘충분해!’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손짓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던 남은 하나의 단검을 넘겨받은 뒤, 전기 에너지를 인챈트하여 되돌려주었다.
“녀석은 이제 속 빈 강정이야. 따라와!”
“네, 네!”
스테치의 머릿속에서는 녀석을 끝장낼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그걸 실행하기까지의 전개를 만들어 나갈 뿐. 한쪽 눈에 박힌 칼을 빼내려고 앞발을 휘적이는 만티코어에게 스테치가 다시 돌격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스테치의 얼굴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크》!”
박혀 있던 망고슈에 여지없이 적중하는 스테치의 마법.
고압 전류가 안구 바로 뒤에 위치한 뇌를 시작으로 꼬리 끝까지 휩쓸고 지나가자, 만티코어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옆으로 쓰러졌다.
카가각!
곡괭이 날을 바닥에 질질 끌며 달리던 스테치는, 바닥에 늘어진 만티코어 머리통의 남은 눈을 향해 풀스윙으로 휘둘렀다. 부드러운 눈알은 달걀처럼 뭉개지고 눈꺼풀이 통째로 찢겨 날아가며, 발끝부터 가슴팍까지 이어지는 한줄기 핏자국이 스테치에게 튀었다.
한편 곧장 뒤에서 따라오던 엘레나는 바닥을 슬라이딩하며 만티코어의 반대쪽 눈알에 박혀 있던 망고슈를 거칠게 비틀어 뽑아 버렸다.
양 시신경으로부터 전해지는 타오르는 듯한 통증에, 때마침 일어서려던 만티코어는 가래 끄는 소리를 내며 다시 쓰러졌다.
“캬아악!!”
양 눈을 모두 잃고 침을 질질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스테치는 소리를 질렀다.
“엘레나! 꼬리를 잘라!”
만티코어의 머리와 등을 차례로 박차고 올라간 스테치가 전갈 꼬리를 붙잡아 고정시킨 사이, 엘레나가 꼬리의 가장 얇고 약한 마디 부분을 노려 베고 지나갔다.
“으아아아!”
떨어져 나간 독침을 위쪽으로 번쩍 들어 올린 스테치는, 체중과 힘을 실어 있는 힘껏 만티코어의 등허리에 찍어 넣었다.
푸욱!
강철 같은 피부를 너무나도 가볍게 뚫은 독침은 거침없이 고기벽을 파고 들어가 저 깊숙이 자리 잡힌 내장까지 도달했고, 만티코어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끄르르으윽-.”
구슬피 한 번 울부짖은 만티코어는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사지를 쭉 펴고선 부들거리더니, 마지막 한숨을 토해 내고선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