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정산 (44/203)


44화 정산
2021.11.14.


“이런 세상에.”

온 세상 불만과 근심은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을 일상처럼 유지하던 발타자르조차, 눈앞의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로를 그대로 타고 내려와 블랙 마켓 안까지 낑낑거리며 거대한 가죽과 소재를 끌고 내려오는 스테치와 엘레나, 그리고 딕슨의 모습에 사람들은 뒤로 주춤거렸다.

“진짜 만티코어? 라크샤 산맥에?”

“예. 아마도 알을 품은 암컷과 수컷이 함께 이동하던 중에, 암컷 쪽이 날개를 다치는 바람에 임시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에요.”

“놈들한테 알도 있었다고?”

딕슨의 말에 발타자르는 스테치와 가죽더미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고, 그제서야 스테치는 가죽들 틈바구니에 빼꼼히 드러나 있는 알을 가리켰다.

“…….”

발타자르는 뒤로 물러서며 한 손으로 더듬더듬 의자를 찾더니, 털썩 그 위로 주저앉아 버렸다.

비록 그도 실제 만티코어를 본 적은 없었지만, 가죽과 알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짜였다.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만 만지작거리는 발타자르에게 스테치가 금화 몇 닢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하수도 열쇠를 제공해 주신 것에 대한 비용인데요…….”

발타자르는 여전히 시선을 가죽 더미로 향한 채, 스테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지금 본 걸로 값은 치렀다 쳐 주마. 이건 두고두고 씹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테니깐.”

한창 술집 안이 이 놀라운 전리품으로 떠들썩해지는 사이, 스테치가 딕슨에게 말했다.

“여기요.”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던 그는 그때서야 미리 준비해 뒀던 자루를 넘겨주었고, 딕슨은 떨리는 손으로 자루 입구를 펼쳤다.

팔찌와 반지, 그리고 반쯤 녹아내리다 만 단검 등이 자루 안에서 짤그랑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유품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나마 건진 물건들이라도 최대한 챙겨왔지만…… 죄송합니다.”

“……적어도 동료들 소식을 전하러 갈 때 돌려줄 무언가는 생겼잖아. 미안해 할 것 없어.”

딕슨은 자루를 품에 안고선 감사의 뜻을 표했고, 스테치는 그런 그의 등을 두들기며 다독여 주었다. 이것으로 그와 유족들의 속이 조금이라도 풀어지길 바랄 따름이었다.

한편, 블랙 마켓과 깊이 관여하고 있는 종사자들 사이에서 이번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만티코어라는 환상종이 실제 출몰한 것도 모자라, 그것을 잡고 소재까지 가져왔다는 이야기에 상인은 물론이고 온갖 대장장이들과 연금술사들이 발타자르의 술집을 방문했다.

덕분에 술과 고기가 더 잘 팔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타자르는 손님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와서 구경하는 건 좋은데 어디 엉뚱한 곳에 가서 입만 벙긋해 봐라. 만약 이 이야기를 퍼뜨려서 문제 일으키는 놈이 있다면, 지하신 엑스턴의 이름을 걸고 내가 직접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멱을 따 버릴 테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테치 일행은 거대한 테이블에 만티코어의 소재들을 올려놓고선 한창 이야기를 진행 중이었다.

“두 마리나 잡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돼요?”

레티의 검사 결과, 스테치가 가져온 가죽들의 일부는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의아해하는 스테치에게 레티는 가죽이 전투 과정 중에 많이 상했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댔다.

“하지만 어쩌겠어. 만티코어를 상대로 싸우는데 가죽이 문제겠니? 사는 게 우선이지.”

말의 내용과는 달리 히죽거리는 레티의 모습에 스테치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의를 표했다. 어차피 전투 후반에는 스테치도 가죽에 대한 생각은 전부 집어치우고 싸웠으니, 그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다행히 가죽 갑옷을 만드는 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하니 거기에 만족할 수밖에.

“빨리, 이리 줘!”

레티와의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고, 스테치는 자꾸만 옆에서 보채는 캐스퍼에게 알을 넘겨주었다.

평생 누가 만져보기도 힘든 만티코어의 알을 목전에 둔 캐스퍼는 자그마한 나이프 끝으로 알을 살살 두들기며 감탄을 뱉었다.

“이 경도를 봐! 무슨 물질로 구성되어 있길래 이렇게나 단단하지?”

“그런데 대체 그걸로 뭘 하시려고요……?”

“……글쎄, 나도 아직 생각해 둔 바는 없어서. 일단 두고 보도록 하지.”

캐스퍼는 복잡 미묘한 대답과 함께 돈주머니를 넘겨주었다. 무기 개조 관련 비용을 제외하고 넘겨준 비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었다.

그 장면을 뚫어져라 지켜보던 몇몇 연금술사들과 상인들 틈으로 탄식과 욕설이 터져 나오는 것은 덤이었다.

“치사하다, 캐스퍼!”

“대체 그 귀중한 알에 무슨 수작을 부릴 셈이냐!”

“시끄럽다! 기회는 노력하는 자한테만 주어지는 법이거늘!”

한창 캐스퍼가 사람들과 투닥거리던 차에, 레티가 말했다.

“네 무기는 공방 동료한테 맡겨두고 왔으니까 내일이면 마무리가 되겠지만, 갑옷은 오늘부터 제작에 들어가더라도 시간이 꽤 걸릴 거야. 대충 사흘에서 나흘 정도?”

“아니, 가죽 갑옷이 그렇게 뚝딱하면 완성이 되나요?”

스테치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가져온 가죽을 무두질하고 경화작업을 거치는 데에 걸리는 기간은 최소 한 달 이상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런 말도 안 되는 기간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러자 레티는 손사레를 치며 킬킬거렸다.

“장비 없고 실력 없는 초짜들이나 오래 걸린다 하지.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수많은 가죽 장인들의 자존심을 한순간에 박살 내 버린 레티가 뒤에 서 있던 두 장정들에게 손짓하자, 그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지막지한 크기의 가죽들을 번쩍 들고선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스테치가 엘레나를 돌아보자,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선 테이블 아래에 놓여져 있던 무언가를 올려두었다.

“응?”

레티의 눈에 들어온 물건은 부러진 활이었다.

활대가 박살 나 현 하나로 간신히 연결된 그 활은, 보기만 해도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손잡이 부분에 탄 손때와 재료로 쓰인 원목의 아름다운 무늬까지, 그야말로 제작자의 실력과 활에 얽힌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제 동료의 것인데, 혹시 이걸 수리할 수는…….”

“없지.”

레티가 단칼에 잘라 말하자, 엘레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만티코어의 공격으로부터 스테치를 지키려고 앞에 나섰던 그때, 엘레나의 활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본 것이었지만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이만치 부서졌으면 새로 만들어야지. 무기는 내 전문이 아니지만, 단언할 수 있는 건 이것과 동급의 활을 구하기는 힘들 거라는 점이야.”

그 말에 스테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블랙 마켓으로 돌아오기 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엘레나가 부러진 활을 들고 지어 보였던 그 망연자실한 얼굴은…… 그런 탓에 스테치는 감히 그녀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쥐어 짜내서 사과의 말을 건네자, 엘레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만큼 꽤 오래된 물건인지라, 빠르건 늦건 이런 일이 언젠간 벌어질 거라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단다.』

‘아아아아아…….’

그렇게까지 유서 깊은 물건이, 왜 하필 자신 때문에 두 동강 나 버렸단 말인가.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 내던 스테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더 좋은 활을 찾아줄게…….”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모습에, 스스로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스테치는 그저 눈을 감고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 * *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눈을 뜬 스테치는, 숙소 아래층의 술집으로 갔다가 한창 장부를 정리 중이던 발타자르와 마주쳤다.

“잘 잤냐? 어제 본인 입으로 죽을 뻔했다고 말한 것 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구나.”

비아냥인지 뭔지 모를 그의 말에 어이없어하던 스테치는,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거 되게 웃기네요. 아침이나 주세요.”

한창 펜대를 놀리던 발타자르는 스테치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더니, 주방 쪽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후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의자에 앉아 아무도 없는 술집 내부를 돌아보며 테이블 위만 두들기고 있자니, 기름때로 거뭇거뭇해진 작업복을 입은 깡마른 사내가 검은 천으로 둘둘 만 무언가를 들고서 술집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스테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총총거리며 다가와선 물었다.

“혹시 브라이언 고슬링 씨가 어디 계신지 아시나요?”

“네, 저에요.”

레티와 사전에 미리 약속해 둔 가명이 튀어나오자 스테치는 뒤늦게 손을 들어 반응했다. 그러자 남자는 화들짝 놀라더니, 들고 있던 물건을 스테치가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악수를 청했다.

무심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은 스테치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아, 손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며, 이번에 저희 공방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조를 맡겨 주신 제품은 저희 공방 기계공들과 대장장이들이 세심한 손길로…….”

“누구라고요?”

어리둥절해하는 스테치의 말에 남자는 눈에 걸치고 있던 모노클을 고쳐 쓰더니, 그제서야 조금 부끄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레티님의 공방에 맡기신 무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그곳의 도제로 일하는 악슬리라고 하고요.”

아마도 무기란 페네트레이터를 말하는 것이겠지.

스테치는 순간 화색을 띄웠다가 얼른 표정을 다잡았다.

엘레나의 활을 부려뜨려 먹은 주제에 자신이 이 시점에서 즐거워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 음…… 그럼 한 번 보실까요.”

스테치가 자신을 불편해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악슬리는 얼굴을 붉히더니 조심스럽게 천으로 둘러쌓인 물건은 풀어헤쳤다.

안에서 나온 것은 레티에게 맡겼던 검과, 캐스퍼가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대량의 화약탄 묶음이었다.

뭔가 거창할 줄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검 자체에는 의외로 가시적인 변화가 보이지는 않았다.

스테치가 악슬리를 쳐다보자, 그는 열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느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만드신 분은 정말이지 천재입니다! 단순히 기계공학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검에 쓰인 강재와 열처리 방식은 정말이지…….”

“그냥 핵심만 말해 줘요.”

“……아, 네. 엣헴…… 일단 이 무기의 기본 원리는 가스 폭발력에 의한 힘으로 검 내부에 탑재된 타격부를 밀어내, 그 충격으로 대상을 분쇄하는 것인데요.”

악슬리는 손잡이 부분을 가리켰다. 크로스 가드 부분엔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기존의 격발 스위치는 방아쇠로 바뀌어 있었다.

“공방의 장인들이 캐스퍼님과 상의를 정말 많이 하시더군요. 결과적으로 컴버스쳔 체임버 부분은 열과 충격에 강하면서 마모율이 낮은 기간티움으로 새로 성형해 장착했고, 검 날은 전부 새로 갈았습니다. 재료는 대부분 캐스퍼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스테치가 검을 들고 허공에 휘두르자, 듣기 좋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슬리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화약탄이 꽂힌 벨트줄을 집어서 건넨 뒤, 잘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저도 이 화약‘탄’ 이라는 물건은 처음 봅니다만…… 여기 캐스퍼님의 설명에 의하면, 가스에서 화약으로 연소재를 바꿈에 따라 출력 효율이 기존의 1.35배 증가했다고 합니다. 총 40발, 그중에 A등급 화약으로 만든 탄이 35발, 살라만더 더스트를 넣어 만든 특제탄이 5발이라고 써져 있네요.”

『화약같이 불 잘 붙는 물질에 살라만더 더스트라고? 그 자식 정신 나갔구먼.』

‘그게 무슨 뜻이야?’

『캐스퍼라는 놈 실력이 어설플 경우엔 네 손모가지가 날아간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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