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코르다치오
(46/203)
46화 코르다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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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코르다치오
2021.11.16.
“잠깐 여기 좀 들렀다 가자.”
스테치는 방향을 꺾어 엘레나를 바로 옆의 전당포로 이끌었다.
문 위에 매달린 조그마한 종을 딸랑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선 보이지 않았던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찬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여러 의미로 정말 굉장한데…….’
먼지가 쌓여 본래의 빛깔을 알아볼 수도 없게 변한 황금 접시, 어디의 지리를 그려 낸 건지 모를만한 지도, 누가 쓸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양날 도끼 등등.
스테치는 던전의 보물방이라도 발견한 마냥 자기도 모르게 흥분했다가, 곧 뺨을 두들기며 자신을 다그쳤다.
‘아니, 안 돼! 목적을 잊지 말자!’
“저, 실례합니다~.”
스테치는 텅 빈 카운터 너머의 뒤쪽 복도를 향해 주인을 부르며 벽을 두들겼다.
엘레나는 그가 왜 이런 곳에 들어오자고 했는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창가 쪽에 전시된 활 하나를 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음…… 이건…….”
“마음에 들어? 활은 많이 써본 적이 없어서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 활은 겉보기엔 꽤 그럴싸해 보여서.”
외견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단순한 만큼 견고해 보이는 활이었다.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전시되어 있던 활을 들어 보였다.
전시품을 만져도 되나? 싶었지만 스테치는 굳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확실히 튼튼해 보이긴 하지만…….”
엘레나는 활을 눕혀서 한쪽 눈으로 살펴보더니, 활대가 살짝 휘도록 시위를 당겨 보이며 하나씩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짚어 나갔다.
“이 소리 들리시죠? 겉은 멀쩡하지만 활대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소유자가 관리를 전혀 안 했단 증거에요.”
“……그런가.”
“그리고 이렇게 손등에 올려놓고 보면 어퍼림과 로워림의 균형이 어긋나 있잖습니까? 심재로 쓰인 목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 지경까지 오면 쓸 수 없어요.”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단 말이야…… 스테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어 쭈뼛거렸고, 엘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텔리어 씨. 다른 도시에서도 활을 구해 볼 기회가 있겠지요.”
스테치가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안절부절못하던 차에, 카운터 뒤쪽 복도의 문 하나가 열리면서 누군가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낡은 전당포엔 어울리지 않는 젊은이가 기지개를 켜면서 나타났다.
“아, 손님이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있나요? 아니면 뭘 팔려고……?”
“그게…….”
스테치는 할 말을 잃어 머뭇거렸다. 활이 괜찮은 물건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샀겠지만 정작 엘레나로부터 박한 평가를 듣고 나니, 주인장을 상대로 감히 무언가를 사러 왔다고 이야기를 꺼내기가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스테치가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던 그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스테치, 이 장소엔 관리되지 않은 물건들 투성이지만 희귀한 물건들이 정말 많아. 절대 하나라도 놓치고 가선 안 돼.』
‘그럼 당장 뭐라도 알려 줘 봐. 지금 되게 난처한 입장이니까!’
스테치가 말하자, 메멘토 모템은 즉시 물건 하나를 지목했다.
『오른쪽 선반 위, 제일 위쪽 칸에 있는 물건. 네 친구에게 줄 물건은 그걸로 충분해.』
스테치는 그 말에 선반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제일 위쪽에 딱 하나 놓여 있는 조그마한 막대기 같은 물건을 찾아냈다. 그립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천이 감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손으로 잡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건 어떻게 찾아내신 거죠? 좀 문제가 있는 물건이라 눈에 잘 안 띄는 곳에 두었던 것인데.”
스테치가 그것을 들고 내려오자, 젊은 주인은 씁 하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어느 한 마법사가 전당포에 두고 간 마도구인데요, 마력이 어느 정도 있지 않으면 기동하질 않는답니다. 전당포까지 마법사가 찾아들어올 일이 없어서 제대로 어필할 수가 없었죠.”
“엘레나, 한 번 써 볼래?”
스테치의 권유에 엘레나는 잠깐이지만 주저했다.
아버지나 할머니가 대대로 마법에 능숙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 자신은 마력량이 일반인에 비해 많은 것을 제외하면 딱히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그녀가 화려한 마법보단 감각과 신체 능력을 활용하는 스킬을 주로 사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엘레나가 한숨을 푹 쉬며 그 막대기를 쥐자, 막대기의 양끝으로부터 푸른빛의 활대와 스트링이 형성되었다. 물건을 쥐고 있던 그녀는 미약하지만 급속한 마력의 흡수에 살짝 현기증이 났는지 비틀거렸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스테치와 젊은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 활이다!”
심지어 그 활의 모습은 푸른빛을 내뿜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부러진 지 얼마 안 된 활과 똑같이 생겼다. 엘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울컥 했는지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들었다.
“굉장하네요. 마법사가 아닌 일반인이 그 물건을 작동시킨 것은 처음 봤어요. 제대로 다시 설명하자면, 그 물건은 사용자의 마력을 빨아들여 사용자가 가장 익숙해하는 무기를 형성시켜주는 마도구랍니다. 하지만 정작 그걸 만들었던 마법사는 실패작이라며 이 전당포에 팔아 치워 버렸죠.”
스테치는 주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물건에 뭔가 결함이 있다고 그랬는데, 뭐였죠?”
“제작자가 그 마도구를 만든 목적은, 자신의 마력이 전부 소모되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위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였답니다. 그런데 만들고 나서야 생각이 난거죠. ‘마력이 없는데 무슨 수로 이 마도구를 사용하나?’하고요.”
스테치가 킬킬대자, 주인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두 번째로, 사용자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를 형성해 주는 마도구였는데, 마법사가 일평생 써 본 무기가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제작자가 시동했을 때 나온 거라곤 펜대와 펜촉뿐이었죠.”
그야말로 엘레나에게는 최적의 마도구였다. 숨기기에도 적절하고, 마도구를 쓸 마력도 충분히 있는 데다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무기를 형성해 준다니 이것보다 훌륭한 활 대체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거 주세요.”
스테치가 값을 치르는 사이, 그의 눈에 검은 불길처럼 일렁거리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주의 기운들을 머금고 타오르는 장신구들이 커다란 접시 안에 가득 들어 있는 모습에, 스테치는 물었다.
“저것들은 얼마죠?”
“저건 파는 물건이 아닌데요, 손님. 아니, 정확히는 팔 수도 없다는 쪽이겠군요. 저건 전부 저주받은 장비입니다.”
스테치가 쳐다보자, 주인은 곤란한 듯 말했다.
“이 전당포는 사실 저희 아버지가 물려주신 가게입니다. 당시에는 희귀해 보이거나 특이한 물건이라면 닥치는 대로 받으셨던 모양이지만, 실리를 챙기지 못한 덕분에 저런 식으로 남들이 사가지도 않은 애물단지만 쌓이고 말았거든요.”
상식적으로 장비해 봤자 자신의 신체 능력을 떨어뜨리기만 하는 물품을 누가 사가겠는가. 하지만 스테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어빌리티가 있었다.
“전부 주세요.”
* * *
스테치와 엘레나가 원하는 물건들을 얻고 숙소에서 뒹굴뒹굴하는 이틀의 시간 동안, 큰 해프닝은 벌어지지 않았다.
엘레나는 스테치가 어떻게 그런 물건을 쑥 찾아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문이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새로운 활을 구한 것이 너무 기쁜 탓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레코르다치오’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선 애지중지 하는 그녀의 모습에 스테치는 만족스러웠다.
“좋아, 이 정도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겠지?”
『진한 사기와 죽음의 향취…… 아주 ……만족스럽군. 이제야 비로소 네가 나의 파트너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게 되었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장갑, 팔찌, 반지, 목걸이 등등.
스테치는 아무도 없는 개인 방에서 구입해온 장비들을 몸에 두른 상태였다.
이만한 악세사리를 전부 그냥 끼웠다간 눈에 확 띄고 말테니, 적당히 후드나 장갑으로 가려지는 부위의 것들만 착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의 기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스테치의 모습에, 메멘토 모템은 감탄했다.
“그건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데…… 슬슬 내려가 볼까?”
스테치는 마지막으로 탄띠를 어깨에 두르고 검을 소드 벨트에 걸어둔 뒤, 방문을 나서서 아래층의 술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드디어 레티가 스테치로부터 주문받은 물품을 가지고 오는 날. 아무래도 재료로서 만티코어를 접한 장인은 레티를 포함해도 손에 꼽을 지경이었기에, 스테치는 레티가 대체 어떤 물건을 만들어올지 기대가 되었다.
대량으로 무구를 제작하고 납품하는 입장에서 납기일을 지키는 것이 몸에 밴 탓일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미 레티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늘상 그래왔듯 두 명의 장정들이 뻣뻣하게 자세를 잡은 채 서 있었다.
“좋아, 다들 모였군.”
“정말 나흘 만에 다 만드셨나 보네요. 어떻게?”
“사업 비밀이지.”
뒤늦게 따라 나온 엘레나도 함께 자리에 착석하자 레티는 테이블 옆 바닥에 놓여 있던 궤짝을 열었고, 단단한 질감의 남녀용 가죽 갑옷 두 벌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셔츠 위에 걸쳐 봐. 문제가 있으면 바로 고쳐야 하니까.”
레티의 지시에 엘레나와 스테치는 여기저기 꿰매서 너덜너덜해진 갑옷을 풀어놓고, 새로 준비된 조끼 형태의 갑옷을 걸쳤다. 그러자 레티는 다른 두 장정들에게 갑옷의 점검을 부탁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제 아무리 가죽 갑옷이라 할지라도 신체의 유연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방어력을 포기할 필요가 있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각 부분의 이음매나 관절 부위는 공격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만티코어의 가죽은 다른 가죽에 비해 작게 잘라 써도 그 내구도와 탄력이 훼손되질 않아서, 인체에 딱 맞으면서도 방어도를 보장해 주는 갑옷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일단 갑옷을 계속 입어서 몸에 길들이면 움직이는 것도 지금보다 더 편해지고, 혼자서 탈착하는 데에 몇 초 밖에 걸리지 않게 될 거야.”
스테치가 장정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걸치고 상반신을 이리저리 돌리자, 근육의 위치에 맞춰 결합되어 있던 여러 갑옷 조각들이 유동적으로 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갑옷보다는 몸에 잘 맞는 타이즈를 걸친 것 같은 감각에 스테치와 엘레나가 신기해하는 한편, 레티는 다음 물건들을 꺼냈다.
“만티코어의 남은 꼬리 부분으로는 부츠와 팔 위에 덧댈 수 있는 각반과 보호대를 제작했어. 어지간한 칼날 정도는 보호할 수 있겠지만, 너무 강한 충격을 가하면 깨질 수 있으니까 조심해. 쓰다 망가지면 과감하게 버려도 좋아.”
스테치는 신고 있던 부츠 위에 각반을 덧대고, 엘레나는 팔 보호대를 장착했다.
두텁고 거칠던 만티코어의 몸뚱이가 이렇게 훌륭한 갑옷과 보호대로 돌변한 것에 대해 엘레나와 스테치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레티는 마지막으로 손가락 부분이 없는 검은색 장갑 두 페어를 꺼내 건네줬다.
“날개 피막 부분은 적당히 다듬어서 장갑으로 만들어 봤어. 생각보다 만티코어의 날개는 몸뚱이에 비해 튼튼하지가 않더라고. 손에 땀이 차서 쥐고 있던 물건이 미끄러지는 일은 없어질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해 주셨어요.”
스테치가 고마워하자, 레티는 껄걸 웃으며 말했다.
“나야말로 만티코어의 소재를 사용해 볼 수 있어서 좋았어. 덕분에 무슨 재료를 어떻게 써먹는 게 적당한지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고. 다음에도 뭔가 만들어야 할 일이 있다면 또 찾아줘.”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레티는 장정들과 함께 즉시 자신들의 공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일이 밀려서 잠시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티 일행이 어둑어둑한 하수구 통로 저편으로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마주 흔들어 주던 스테치에게 엘레나가 말했다.
“말하는 게 늦었지만…… 정말 고마워요. 활도, 갑옷도.”
스테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활은 내 잘못 때문이라고 그랬잖아. 갑옷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힘을 빌려주고 있는 건 너인데, 내가 고맙다 소리를 듣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쳐 놓고 다음 루트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베네지아 왕국을 돌기 시작한 지 꽤나 긴 시간이 지났다. 한 달 하고도 반은 넘었나?
복수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지만, 슬슬 힘을 축적하기만 하는 단계에서 한 발짝 정도 나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모양인지, 메멘토 모템이 경고했다.
『잘 생각해라, 스테치. 일을 벌이는 건 네 마음이지만, 일국의 왕자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었다간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일이 진행되고 말거야. 신중하게 생각해라.』
‘누가 지금 당장 쳐죽이러 왕성까지 뛰어간대? 나는 다만 슬슬 무언가 해 보고 싶다 이거지. 눈에 띄지 않으면서, 제라드의 속을 긁어 놓기에 알맞은 뭔가를 말야.’
그러면서 고민하는 그의 눈에, 지도의 한 장소가 들어왔다.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