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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겔렌 (47/203)


47화 겔렌
2021.11.17.


센티그마를 빠져나온 지 이틀째.

최초로 메멘토 모템을 얻은 이후부터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까지 모두 돌아본 스테치였다.

동쪽의 라크샤 산맥을 따라 북상해 봐야 경계가 삼엄한 데다 위험으로 가득한 카델트 대사막이 나오니, 스테치는 수도 방향인 서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아무도 없는 길 한복판에서 한창 전투 중이었다.

“흐아앗!”

내리친 검날이 골통을 쪼개고 들어가자, 스테치는 발로 상대를 밀어 검을 뽑아냈다.

인간형 수생 몬스터 ‘아퀸’.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으며, 민물이나 바다를 가리지 않고 깊은 물속에서 생활하는 수중 몬스터이다.

이따금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지상으로 올라와 주변의 먹을 만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하는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그 사냥 행위에 하필 스테치와 엘레나가 엮여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확실히 갑옷이 제 역할을 해 주는군. 아니, 그 이상인가?’

생각보다 빨리 체감하게 된 갑옷의 성능에 스테치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가죽 갑옷은 베는 공격에는 방어력이 강한 데에 반해, 찌르기에는 약한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갑옷은 무기의 찌르는 각도가 조금만 비스듬히 흐트러지면, 아예 튕겨 내 버릴 정도의 강한 탄력과 내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크웨엑!”

스테치에게 녹슨 금속날의 창을 휘두르던 아퀸 한 마리가, 꿰뚫린 미간의 구멍으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뒤를 돌아본 스테치의 시야로 마력의 활을 들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녀는 새 화살을 꺼내 뒤에서 몰래 접근하던 아퀸의 관자놀이에 꽂아 넣었다.

“마지막 하나!”

엘레나에게 돌진하던 아퀸을 뒤에서 붙잡은 스테치는, 축축한 비늘로 뒤덮인 아퀸의 목을 비틀어 꺾어 버리며 전투를 완전히 끝마쳤다.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위협적인 몬스터였으나, 지금의 스테치에게 있어서는 메멘토 모템의 힘을 써서 죽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싱거운 녀석들에 불과했다.

식사 좀 하려고 지상으로 나왔다가 졸지에 싸그리 몰살당해 버린 이 불쌍한 종족에게 스테치는 명복을 빌어준 뒤, 커스 이팅으로 전부 흡수했다.

“괜찮나요?”

“이 정도는 몸 풀기 정도밖에 안 돼. 그나저나…… 정말이지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군.”

스테치가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현재 위치로부터 목적지인 다음 마을까지는 반나절도 채 안 되는 거리이다.

지방 영주가 자기 영역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면 이 정도 몬스터가 길거리를 활보하게 놔두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영주가 다스리는 마을중 하나인 ‘겔렌’이었다. 굳이 다음 행선지로 이 마을을 택한 이유는, 영지민을 향한 수탈로 악명 높던 악덕 영주 보르덴 백작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스테치가 던전 탐험가로 처음 활동하던 시절부터 들려오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이번 목적지에 가는 이유는 던전 탐험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권선징악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는 거군요?”

보르덴은 꽤 오래전부터 자기 영지의 사람들을 쥐어짜, 그 자금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여기저기에 돈을 찔러 넣고 다녔다.

보르덴을 잘 처리한다면 왕가의 귀중한 자금줄 하나가 사라짐과 동시에, 영지 사람들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묘하게 들뜬 엘레나의 모습에 스테치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쪽은 덤이지. 예전에 달튼이라고 하는 친구한테 이쪽 영주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어서 말이야.”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보르덴은 어느 순간부터 마치 무언가에 집착하듯 자기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자금을 끌어 모아 아티팩트를 구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모인 물건들은 전부 영주가 거주하는 영주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해가 언덕 능선에 걸쳐 노을이 질 무렵, 스테치와 엘레나는 저 멀찍이 위치한 영주의 성과 마을로부터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들을 볼 수 있었다.

깔끔했던 센티그마와는 대조적인 농촌 마을 특유의 냄새에 스테치는 쓴웃음을 지으며 코를 틀어쥐었지만, 의외로 엘레나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일단 오늘은 잠잘 곳부터 구하는 게 좋…….”

“아이고, 안 됩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스테치와 엘레나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고, 그곳에는 돼지에게 줄을 묶어 억지로 끌고 가는 병사 몇몇이 보였다.

저항하는 과정에서 걷어차인 농노 하나가 필사적으로 병사 다리를 붙들고선 애원하고 있었다.

“이 돼지까지 가져가시면 저희 집엔 남는 게 없습니다요! 제발 이것만큼은!”

누구나가 던전에서 일확천금의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농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땅과 영주의 재산으로 종속되어 삶에서 선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스스로의 던전에 뛰어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차라리 이 마을이 던전의 관리 역으로 지정되었다면 국가 차원으로 전부 자유민 취급을 해 주었을 텐데…….

“시끄러! 네놈들의 재산이 곧 영주님의 것이다! “

막무가내로 재산을 앗아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엘레나가 나서려 들었지만, 스테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저건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봐도 옳지 못한 일이잖아요?”

“일단 기다려. 뭐든 상황을 파악하고 일을 시작해야 하는 법이잖아.”

아마 저 끌려간 돼지는 영주한테 가기는 커녕, 통구이가 되어 병사들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갈 것이다.

코웃음을 친 스테치는 멀어져가는 병사들을 한번 흘끗 바라본 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농노에게 다가갔다.

농노의 부인과 딸들은 정신없이 그의 몸 상태를 살피다 뒤늦게서야 스테치를 눈치채고선 경계해오기 시작했다.

“별 일은 아니고,“

스테치는 남자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준 뒤 배낭에서 금화 몇 닢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저물어가는 햇빛에 반짝이는 금화는 농노와 그 가족들의 눈빛을 뒤바뀌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잠잘 곳이 필요해서 그러는데, 그 집 바닥 좀 빌립시다.”

* * *

스테치와 엘레나를 집으로 들인 남자의 부인은 얼마 안 되는 말린 고기와 감자를 더 넣어, 조금이라도 희멀건 스튜를 풍성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스테치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어떻게든 대접하려는 것이었다.

“이 수탈은 몇 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남자는 허겁지겁 스튜를 먹는 딸들을 우울한 눈으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엔 물레방아 같은 각종 시설 이용료를 조금씩 올리더니, 그 다음은 별 희한한 것들을 문제 삼아 벌금과 통행세까지 거두기 시작하더군요.”

농노들에게는 거주지를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유일한 방법은 도망쳐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돈을 모아 자유민의 사는 것뿐. 하지만 그중 어느 쪽도 힘없는 이들에게 있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스테치는 남자의 하소연을 들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고아였던 내가 지금 와선 부모자식 모두 가진 그들보다 낫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아까 그 병사들은 왜 굳이 농노들의 재산을 빼앗아가는 거죠? 그렇게나 많은 돈을 거두고 있다면, 급여는 부족함 없이 받고 있을 텐데요.”

엘레나의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백작이 세금으로 횡포를 부리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 후부턴 어찌된 일인지 병사들 급여가 체납되는 때가 잦아져서…….”

‘엉뚱한 곳에 돈을 펑펑 쓰느라 그러시겠지.’

스테치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아티팩트를 확보하는 데에 필요한 필수 자금과는 별개로, 기사들과 사병들의 상시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

보르덴에게 있어 지출을 줄인다면 무엇부터 줄이게 될지는 명백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까?’

스테치는 향후 계획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티팩트와 재화가 쌓여 있는 만큼, 영주가 거주하는 영주관의 보안 수준은 분명 높을 것이다.

문제는 보안 장치로서 어떤 장애물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목표인 아티팩트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흠, 그러고 보니 방금…….’

스테치는 한창 대화중이던 남자와 엘레나의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병사들의 불만이 많다고요?”

“병사들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몇몇 기사들은 언젠가 자신들한테도 그 영향이 미치는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더군요.”

저 남자의 말대로라면 보르덴은 출세와 몰락의 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기사와 사병들의 불만을 부추기는 행동을 계속 하다 보면 반란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병사들은 주로 어디에 모여서 쉬나요?”

“마을 주점이죠. 사실 제가 한 이야기들도 전부 병사들이 늘어놓는 넋두리를 그대로 읊은 것에 불과합니다.”

빙고. 스테치가 손가락을 튕겼다.

영주로부터 봉급을 받는 이상 병사들이 마냥 협조적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그들이 보르덴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식을 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적당히 자극하며 파고들면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정보까지 술술 털어놓을 것이다.

“저, 실례지만 여러분들은 모험가이신가요?”

“던전 탐험가인데…… 뭐 비슷하죠.”

남자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이 마을에 볼일이 있는 게 아니시라면 최대한 빨리 다른 곳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기사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마을을 순찰하는 병사들까지도 돈이 될 만한 건 죄다 뜯어 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요.”

“아…… 괜찮습니다. 뜯어 가 볼 테면 뜯어가라고 하세요.”

스테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튜를 반쯤 먹던 엘레나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그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가자, 엘레나. 밤 시간대를 그냥 낭비할 수는 없지.”

잠시 후에 돌아오겠다고 말한 뒤, 스테치와 엘레나는 농노의 낡은 집을 나섰다.

제법 어두워진 마을의 밤길. 이 시간대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 탓에 주변은 조용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마을 주점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생긴 거나 분위기만 봐선 대형 주점이라기보단 마을 회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면서,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엿듣고 있어.”

“함께 들어가면 안 되나요?”

“같이 가면 분명 너한테도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올 거야. 아직 인간과의 대화에 익숙지 않은 네가 엮여들면 내가 도와줄 수가 없으니까, 듣고 배우라고.”

엘레나를 문 옆에서 대기시킨 스테치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생각보다 크게 울리는 문소리에 주점 안에서 떠들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해 쏠렸다.

덕분에 초장부터 본의 아니게 주목받게 된 스테치는 후드 밑에서 눈을 질끈 감고선 가운데의 바 테이블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자리를 찾아 앉기까지 장장 15초의 시간 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이, 이 주변에서는 못 보던 놈 같은데.”

의자에 앉자마자 날아드는 병사들의 흉흉한 시선에 스테치는 멋쩍은 듯 후드 너머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마침 일이 있어서 여기 처음 왔거든요.”

“그러셔? 무슨 일?”

위장 신분으로 ‘행상인’은 좋지 않다. 병사들이 행상인에 대해 갖는 이미지란, 노역을 치를 힘도 없는 주제에 돈 될 건수만 쫓는 거머리 족속이기 때문.

“용병의 일이죠. 오늘도 막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오는 참이거든요.”

용병이란 병사들처럼 몸을 굴리는 직업.

스스로가 용병임을 자처하고 일할 수 있을 정도면 신체 능력은 발군일 터. 병사들을 상대로는 동질감과 경외감을 모두 끌어내는 좋은 위장 신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 힘 좀 쓰나보지?”

스테치가 말없이 후드 밑에 숨겨져 있던 팔을 들어 올리자, 자잘한 흉터가 가로 새겨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분위기에 밀려 침묵을 고수하던 영지민들조차 연신 감탄을 흘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깟 근육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요…… 오늘은 정말이지 죽만 쒔습니다. 의뢰를 받고 잡으러 왔던 몬스터가 한 둘이 아니어서 그만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지 뭡니까.”

은근슬쩍 자신의 한계와 어리숙함을 암시해서, 호기심과 함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한숨지으며 말하는 스테치의 모습에 병사들이 물었다.

“무슨 몬스터? 이 주변에 그렇게까지 무서운 몬스터는 없을 텐데…….”

“아퀸이요.”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침울해져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

사실 수중에서라면 모를까, 육지로 나온 아퀸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동등하다.

인간이 그들을 상대로 지는 대부분의 이유는 괴상한 생김새에 겁먹고 압도당하거나, 쪽수에서 밀렸기 때문. 이 경우는 아마도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때마침 좋은 화젯거리가 튀어나오자, 병사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몬스터를 만나 고생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며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데에 성공한 스테치는 병사들로부터 술까지 얻어먹으며 한껏 분위기를 탔으나, 눈빛만큼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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