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친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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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친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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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친화력
2021.11.18.
스테치가 병사들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시시콜콜한 것들뿐이었지만, 영주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다.
대놓고 이름만 나오지 않았을 뿐, 불만을 가진 건 병사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나 보다.
“며칠 전에는 레토랑 나머지 애들도 다 짤려 나갔어! 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다 쑤셔 박아 놓았길래 엉뚱한 병사들 모가지만 그렇게 쳐대는지 원!”
어느 샌가 목 밑까지 새빨개진 병사가 스테치의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소리 지르자, 나머지 병사들도 ‘옳소!’를 외치며 각자의 파인트를 테이블에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골 때리게도 이들 모두 술값이라곤 전혀 치르지 않았던지라, 스테치는 남몰래 금화 몇 닢을 내밀어 주인의 손에 쥐어 주며 병사에게 물었다.
“영주가 돈이 그렇게 많아요?”
“아무렴! 돈만 모였다 하면 아티팩트를 사서 그 빌어먹을 지하 어딘가에 집어넣더라고…… 지금까지 영주의 그 보물에 혹해서 침입해 온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 다들 어디로 떨어지고, 찔리고…….”
지하, 아티팩트. 함정.
스테치는 귀를 한껏 기울여 그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듣고 있었다. 수많은 던전 트랩을 해체하는 것이 일상이던 스테치에게, 저런 식의 표현 하나하나가 함정을 유추해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 좋은데, 생각만큼 핵심 정보를 빼내는 게 쉽지가 않구먼.’
술자리를 함께하는 정도로 결정적인 정보를 얻기엔 역시 부족하다.
함정 종류야 그렇다 치지만 일개 병사가 함정이 설치된 위치까지 정확히 특정지어 줄 리 만무하고, 제 아무리 서로 친해졌다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스테치를 상대로 자기네들 기밀 사항까지 털어놓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응?’
답답함에 잠시 옆과 뒤쪽을 슬그머니 둘러보니, 유달리 독특한 병사 하나가 스테치의 눈에 들어왔다.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대화는 커녕 웃음조차 짓지 않고 주변만 살피는 모습이, 스테치에게 있어서는 마치 대놓고 수상한 사람이라 광고하는 꼴이었다.
‘한 번 흔들어 볼까.’
“아티팩트라.”
스테치가 입을 열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영주님께서 돈을 그렇게 많이 쳐주신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처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테치는 오른팔에 끼고 있던 바라크를 슬쩍 흔들어 보였고, 그것을 본 영지민들과 병사들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아티팩트를 평생 못 보고 지내는 일도 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야, 아티팩트도 있으면서 아퀸들을 상대로 졌단 말이야?”
“아티팩트라고 전부 싸우는 데에만 쓰이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녀석은 사실상 장식용에 가깝죠.”
뒤쪽에서 술을 마시던 누군가의 질문에 스테치가 말했다. 실상은 장식용은 커녕 훌륭한 실전형 무기였지만.
이쯤에서 뒤를 살짝 돌아보니, 그의 예상대로 주점에서 내내 겉돌던 병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상태였다.
‘걸렸다.’
하다못해 다른 병사들처럼 부럽다거나 질투하는 눈치였다면 스테치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겠지만, 그 병사의 태도는 마치 목표를 발견했다는 듯한 기쁨에 가까웠다.
“걱정 마. 우리 영주님 돈 쓰는 꼬라지를 보건데, 아티팩트이기만 하면 똥을 발라 놔도 사들일걸. 만약 팔 생각이 있거든 성으로 가. 대체로 그런 업무는 기사 단장인 첼시 경이 도맡아서 하고 있거든.”
병사는 술을 홀짝이며 그렇게 말했다.
스테치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병사들의 술 상대를 하다가 간신히 주점을 빠져나왔는데, 주량으로 그들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는지 스텝이 꼬일 지경이었다. 엘레나가 그런 그를 옆에서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쓰러졌으리라.
“술은 적당히 마십시다.”
“으…… 이거 내일 아침은 고생하겠구먼…….”
주점부터 농노의 집까지는 불과 몇 백 미터. 10분 가까이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나가며 고생하던 스테치의 귓가로, 엘레나가 슬쩍 속삭였다.
“……눈치채셨나요?”
“그야 저렇게 서투르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 흐암…….”
스테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엘레나의 부축으로부터 벗어나더니, 뒤로 휙 돌아섰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황급히 건물 모퉁이로 숨는 것이 보였지만, 너무 어설퍼서 눈에 다 띌 지경이었다.
“아 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집고 손아귀에 힘을 주자, 돌멩이 표면에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전기막이 덧씌워졌다.
휙!
대충 던진 돌멩이가 건물 모퉁이 쪽을 두들기는 순간 작은 섬광이 터지더니, 들릴락 말락 한 누군가의 비명과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스테치가 잠시 팔짱을 끼고 멈춰선 채 더 이상 이동하지 않자, 안 되겠다 싶었던 이들은 결국 제 발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니까…… 누구야, 너흰?”
스테치의 질문에 그들은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었다. 습격자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복면과 복장을 둘러 신원을 감추고 있었다. 숫자는 아홉 명쯤 되려나.
“좋은 말 할 때 아티팩트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우지직—.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동시에, 남자들 가운데 칼을 들고 위협하던 사내의 안면엔 어느 틈엔가 접근해온 엘레나의 스핀 엘보가 꽂혀 있었다.
누구도 반응 못 할 정도의 신속함에 습격자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이번엔 다른 이의 정수리로 그녀의 엑스킥이 작렬했다.
‘가끔은 내가 어떻게 엘레나를 이긴 건지 궁금하다니까.’
『그때는 거진 내 덕분에 이겼지. 장기전으로 갔으면 너라고 무사할 거 같냐?』
스테치는 한창 습격자 무리를 휘젓던 엘레나와 합류해, 상대를 하나하나 제압해 갔다.
적들의 유일한 무기인 검조차 만티코어의 가죽 갑옷을 뚫는 건 불가능했고, 그나마도 보호대에 부딪히자 아예 찌그러져 나갔다.
“어째서 무기가 안 통하는 거야–억!”
각반을 댄 부츠에 얻어맞은 습격자 하나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2 대 9 라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이기기는 커녕 역으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으악!”
스테치에게 멱살을 잡혀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쳐진 남자가 콜록대는 사이, 엘레나가 습격자들의 복면을 차례대로 벗겼다.
예상대로 그중에는 물론, 스테치가 주점에서 예의주시하던 그 병사가 있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다들 어서 일어나!”
스테치는 쓰러져 있는 이들을 한곳에 모아 로프로 꽁꽁 감았다. 다들 고통으로 몸을 비틀기에 바빠 큰 저항 없이 포박당해 버렸다.
“너희들의 목적은 뭐냐.”
술에 취한 흔적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아예 미간 정중앙을 뚫어 버릴 기세로 노려보는 스테치의 모습에, 습격자들 중 하나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아티…….”
퍽!
스테치의 질문에 똑같은 대답만 앵무새처럼 주워섬기려던 사내의 뺨으로 가차 없는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부채꼴로 바닥에 흩뿌려지는 핏자국에 다른 습격자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러뜨리자, 스테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내가 주점을 나선 지 몇 분만에 모이는 이 조직력, 미리 준비해 놓은 이 검은 복장까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아. 근데 내가 봤을 때 이 정도 계획과 준비성이 너희들 대가리에서 나올 수준은 아닌 것 같거든.”
어설픈 추적 기술에, 상대의 전력이나 아티팩트의 진위 여부도 미리 파악하지도 않고 덤비는 이 허술함까지……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었다.
쏟아지는 지적에 벙찐 얼굴이 된 습격자들에게, 스테치는 손가락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러니까 어디 하나 분질러뜨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다. 너희들의 목적이 뭐냐고!”
한 쪽 발을 바닥에 쿵 소리 나도록 구르자 그 효과는 발군이었다. 습격자들은 아까 전까지의 침묵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마냥,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죄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체, 첼시 경!”
“뭐라고?”
“첼시 경께서 시키셨다! 보르덴 백작의 아티팩트에 대한 지출이 너무 심하니, 영지 내로 누군가 아티팩트를 가져오거든 정체를 밝히지 말고 무력으로 강탈하라고…….”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든 스테치는 피식거리며 웃더니 조용히 엘레나를 돌아보았다.
병사들 모두가 보르덴 백작에게 불평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토록 충직한걸 보니, 첼시 경이 따로 급여를 잘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끝까지 본인들이 아티팩트를 챙겨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 보면 무식한 건지, 순진한 건지…….’
어쨌거나 잡은 이상 그냥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이진 않더라도, 최소한 목표했던 일이 끝나기 전까진 어디 숨겨놓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는 게 있으면 전부 불어. 듣고도 내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면 거시기 잘릴 줄 알아.”
스테치의 협박에 습격자들은 지금까지 머릿속 한구석에 짱박아뒀던 사소한 정보 하나하나까지 전부 쥐어 짜내 닥치는 대로 실토해냈다.
병사들 개개인의 배치와 순찰 루트, 심지어는 함정들의 구상 및 설계를 모두 맡았던 기술자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죽었어.”
습격자 사내의 말에 스테치가 실망스러워하며 검을 뽑아 들자, 그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항변했다.
“저, 정말이야. 첼시 경이 그 사람을 직접 처형시키고, 집까지 불태웠어. 영주관의 설계도 같은 기밀 정보가 새어나가면 안 된다고…….”
부하들과는 달리 이 기사단장이라는 놈은 쓸데없는 곳까지 철저한 듯하다.
현재까지 확실히 알아낸 거라곤 외부 경비들의 배치와 순찰 루트 정도. 이렇게 되면 시설도면을 구해 침입하는 방법은 고스란히 날아간 셈이다.
스테치는 혀를 차며 되물었다.
“뭔가 유용한 정보가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함정에 대해서라던가, 지하 금고 입구라던가! 너희들이 여기 생활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수상한 거 본 적 없어?”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첼시 경은 정보 통제에 민감해서 일반 병사들 앞에선 아예 입도 벙긋 않는다고.”
항변하는 사내들의 모습에 스테치는 얼굴을 가려주던 후드 끝을 신경질적으로 턱밑까지 내리 당겼다. 그러자, 포박되어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수상한 거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이따금 다른 병사들이 영주관 안에 설치된 기다란 관에 고깃덩어리들을 흘려보내는 걸 본 적이 있어.”
“관? 무슨 관?”
“우물 옆에 설치된, 땅속으로 이어지는 길고 커다란 관이야. 처음엔 음식물 쓰레기라도 버리는 건가 싶었는데, 멀쩡한 고기나 들짐승 시체도 날라다 버리더라고.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사내의 말에 스테치는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확실히 그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그 관은 왜 아래로 향하는 거지? 영주의 성 아래에 있는 건 분명…….
“아.”
비단 장치나 지형지물만이 함정의 의미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던전 탐험을 그렇게 오래 해놓고도 이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스테치는 짝 소리가 나도록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신음했다.
아무것도 없을 지하 금고 쪽으로 수시로 ‘음식물’을 투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함정 중에 몬스터가 있단 말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