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배급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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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배급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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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배급관으로
2021.11.19.
접견실의 창을 통해 쏟아지는 아침 햇살. 자신의 영지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보르덴은, 문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노크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끼익—.
멋들어지게 다듬은 콧수염을 흔들거리며 접견실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기사단장 첼시.
오늘도 어김없이 성 주변의 아침 순찰을 마치고 영주를 찾아온 그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왕자님으로부터는 아무런 답장도 없었습니까?”
“자네 치고는 꽤나 조바심을 내는군 그래?”
자신이 모시는 영주의 웃음에도 불구하고, 첼시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지민을 쥐어짜 모은 자금,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아티팩트들…… 보르덴이 이렇게나 급작스럽게 아티팩트 수집에 열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베네지아의 첫째 왕자인 랍토레스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꽤나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으니까.
아티팩트 콜렉팅이 취미인 랍토레스는, 털어도 큰 해가 없는 자잘한 던전들에 틈만 나면 순례를 가곤 했다. 그런 그의 환심을 사기에 아티팩트는 최고의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첼시는 영주민 수탈에 회의적으로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 보르덴을 보좌해 출세하여 왕도에 오르고 나면 묻히고 넘어갈 문제라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특히 저번에 마지막으로 입수한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셨네. 편지에서도 꼭 보고 싶다고 누차 강조하시더군.”
“그 정도 돈값은 해 줘야지요. 나머지 둘을 합친 것보다도 더 비쌌으니까요.”
출세 하나만을 위해 많은 것을 판돈으로 올려놓은 백작과 첼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며칠 뒤 수도로 물건을 올려 보내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첼시는 전신을 스멀스멀 기는 듯한 찝찝함에 헛기침을 했다.
* * *
“오늘 밤 결행이다.”
다음 날 오후, 스테치는 마을 외곽 쪽 숲을 뒤지고 다니며 엘레나에게 말했다.
새벽의 습격자들로부터 정보를 캐내고선 아무도 오지 않을 숲까지 끌고 간 스테치는, 로프로 그들을 꽁꽁 묶어둔 후 아침부터 지금까지 무언가를 찾아서 돌아다니던 참이었다.
“기사단장 첼시가 정말 그 남자들이 말한 만큼 철저하다면, 자기 부하들이 없어진 지금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야. 최소한 오늘 내로 금고에 잠입하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역시 그 관을 통해서 들어가려는 건가요?”
“몬스터나 인간 사체, 일반 고깃덩이…… 아래에 있는 무언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런 걸 내려 보낼 리가 없지. 현재로선 그게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지하 금고까지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야.”
지하 금고 쪽에 몬스터가 있다는 확신은 생겼으나, 몬스터의 정체만큼은 도저히 외부에서는 특정할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스테치는 강력한 수면제를 섞은 먹이를 먼저 관으로 배급하여 녀석을 잠재우고, 다음엔 자신이 직접 관을 타 금고로 침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수면작용을 일으키는 약초의 대부분이 몬스터들을 상대론 먹히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몬스터에게도 약발이 들 정도로 강한 수면제를 제조하려면, 그만큼 복잡하면서도 긴 과정이 필요했다.
‘다행히 재료는 숲 여기저기에 보이지만, 제조에 시간이 꽤 걸리게 생겼어.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스테치는 농노들에게 빌려온 냄비에 물을 받아 회복 물약이 든 포션 병을 통째로 집어넣고 중탕하는 한편, 모아온 풀들의 잎사귀와 뿌리를 잘게 찢고 손으로 비벼 액을 내기 시작했다.
“엘레나. 내가 성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나거든, 병사들의 시선을 끌어줘. 방법은 뭘 사용해도 좋아.”
이번 침투 계획에서 남은 요소는 이제 딱 한 가지였다.
바로 교란. 스테치가 볼일을 마치고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선, 외부의 누군가가 적절한 타이밍에 개입하여 경비들의 시선을 끌어줄 필요가 있었다.
“혼자 가실 생각인가요?”
“내가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선 외부에 있는 네 도움이 필요하니까 말야.”
스테치의 말에 엘레나는 조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들짐승의 고기를 구해다 줄 것을 부탁했다. 숲이 곧 고향이자 터전이던 그녀에게 사냥은 누워서 떡 먹기 일 테니까.
한참 동안 끓인 회복 물약이 끈적하게 변하자, 스테치는 거기에 식물을 갈고 빻아 만들어 낸 액과 나무열매 즙을 짜 넣었다.
복잡한 공정을 거치는 도중 돌아온 엘레나는 커다란 멧돼지 사체의 한쪽 발을 붙잡아 질질 끌어오고 있었다.
땀은 비처럼 흘러내리고 숨소리는 가쁜 것이 꽤나 먼 곳까지 가서 잡아 온 모양이었다.
“이런, 큰 고생을 시켜 버렸네. 수고했어.”
스테치는 모닥불에 나무토막을 더 집어넣어 불길을 더 세게 피워 올렸다.
엘레나가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곧장 멧돼지를 해체하여 고기와 가죽을 분리하자마자, 그는 한창 끓어오르던 혼합액에 나이프를 담갔다 꺼냈다.
푹!
피도 안 뽑은 고깃덩이를 혼합액에 적신 나이프로 찌르길 몇 차례. 칼집을 낸 틈새로 수면제 성분이 잘 베어 들어갈 것이다.
너무 과용하면 낯선 냄새에 몬스터들이 먹이를 거를 수도 있으니, 오히려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지금 상태가 딱 좋았다.
마지막으로 스테치가 준비된 고기들을 멧돼지 가죽으로 둘둘 말아 배낭과 엮고 있으니, 해는 벌써 저물어 밤이 되고 있었다.
“경비 상태는 어때?”
스테치의 물음에 엘레나는 성곽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주가 사는 곳 치고 성 자체의 크기는 작았지만, 보안 책임자가 첼시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경계는 매우 삼엄했다. 그나마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의 수가 비교적 적다는 사실을 엘레나가 일러주자, 스테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간다!”
엘레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등에 커다란 짐을 이고 뛰어가기 시작한 스테치.
어둠 속에 섞여들어 영주의 성까지 접근하는 것은 쉬웠지만, 막상 거대한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벽을 탈 생각에 막막할 따름이었다.
성 주위를 둘러싼 해자 밑에서부터 올라가자니 실제 체감 높이가 10m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짐까지 매고 등반하다가 죽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페네트레이터를 박아 넣어 말라붙은 해자의 벽을 올라간 스테치는, 올라가는 틈틈이 남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쌓인 피로를 풀어주었다.
이후 성벽 밑 부분에 도달할 때쯤엔 검은 집어넣고 손을 써서 올라갔다.
성벽을 구성하는 바위들 사이엔 손가락을 집어넣을 수 있는 틈이 많아 상상했던 것보단 편했지만, 줄 하나도 없이 벽을 타는 것은 역시 불안했다.
후두둑–.
“!”
발끝을 올려놓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자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제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몸이 되었다곤 하지만, 떨어졌다가 어디 목이라도 부러져 죽는 감각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휴…….”
병사들이 멀어져가는 틈을 타 간신히 성벽 위까지 올라온 스테치는, 벽탑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후 가운데의 아성을 둘러싼 내벽을 향해 이동했다.
여전히 순찰을 돌고 있는 병사들은 많았지만, 성벽 안쪽이라서 그런가 상대적으로 경계 수위는 낮은 편이었다.
“이 관이구나.”
습격자들이 알려준 대로, 땅 밑 지하로 향하는 원통형 관의 주둥이가 오래 돼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우물 옆으로 나와 있었다.
나무로 된 덮개를 치우자, 도무지 뭐라 형언 불가능한 악취가 스테치의 코를 유린했다.
“으악!”
사방에 병사들이 쫙 깔려 있다는 사실도 잊고 절로 비명을 지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냄새였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이 관으로 저 안에 있는 몬스터에게 먹이를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쌓인 분뇨까지 처리할 순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맘때쯤 스테치를 놀리느라 바빴을 메멘토 모템조차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
‘아, 갑자기 너무 후회된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스테치는 가죽 보따리를 풀어 피에 절은 고깃덩이를 꺼내, 관 구멍 안으로 꾹꾹 쑤셔 넣었다.
핏물 자국을 남기며 쭈욱 미끄러져 들어간 고깃덩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스테치는 관 뚜껑을 덮었다. 남은 건 모두 몬스터들이 먹이를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
“이상 없나?”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스테치는 우물 안쪽으로 들어가 매달리고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영주관 내벽으로부터 불과 10m 정도 남짓 떨어진 위치에, 순찰 돌던 병사 둘을 세워 둔 한 남성이 보였다.
전투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갑옷을 죄다 걸친 채 직접 순찰을 돌다니…… 스테치는 곧장 그가 첼시 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안심하십시오. 평소처럼 조용합니다.”
“꼭 그렇게 경계를 늦춘 순간에 뭔가 터지곤 하더군. 내일부턴 성곽 주변의 경비 수를 늘려라. 사흘 뒤 수도로 출발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선 안 된다.”
“……예.”
다른 병사의 얼굴에 아주 잠깐 동안 불쾌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다행히도 첼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면 모르는 척 해 준 것일지도. 병사들을 돌려보낸 그는 병사들이 가는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향해 사라져갔다.
『분위기가 되게 흉흉하군. 용케 아직까지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야.』
‘그러게…… 이렇게까지 해서 아티팩트 수집에 열중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지. 단순히 금고에 처박을 거라면 더더욱이나.’
스테치는 잠시 우물 안에서 주변을 살피다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일부러 수면제는 지속시간이 짧지만, 즉효성이 있는 조합으로 제조했으니, 지금이라면 몬스터가 잠들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럼…… 으.”
뚜껑을 열자 또 냄새가 밀려왔지만, 스테치는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비틀어 쥔 채 관 안으로 몸을 드밀었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나 싶은 순간, 스테치는 좁고 어두운 통로를 타고 쭉 미끄러졌다.
“우오—.”
냄새 따위는 잊어버릴 만한 스피드로 중력에 이끌려 내려간 스테치는, 이리저리 꺾이는 관에 부딪힐 때마다 고통으로 신음했다.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안면을 때리는 바람에 눈을 깜빡이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관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철퍽!
“어흑!”
뭔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액체가 고인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떨어진 스테치는, 후다닥 일어나 개처럼 몸을 털어 냈다.
이 정도 냄새와 위생 상태라면, 그에게 호의적인 엘레나조차 정나미가 떨어져 내릴 것이다. 침까지 바닥에 뱉어가며 온몸으로 역겨움을 호소하던 스테치는, 주변을 살피기 위해 메멘토 모템의 빛을 밝혔다.
“에이…… 어?”
불빛을 비추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괴물의 주둥이와 엄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