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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버닙 (50/203)


50화 버닙
2021.11.20.


털 없이 매끈하게 드러난 피부. 가까이에서 보면 시야를 꽉 채워 버릴 만한 몸집.

전신에 남아 있는 흉터들, 거기에 두터운 엄니, 톱니처럼 날카로운 작은 이빨들까지…… 녀석들의 목에 걸린 사슬 목줄이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틀어막고 있던 스테치의 눈에 띄었다.

『버닙이잖아. 늪지대에 사는 이 녀석들을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이것들이 정말 버닙이면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 텐데…… 탐험가 선배들도 녀석들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었다고.’

버닙의 외형은 털이 없고 주둥이가 불독처럼 납작하며, 전체적인 외형은 그레이트 울프와도 같았다. 하지만 개체 하나하나의 흉포함과 크기로 따지자면 버닙 쪽이 압도적인 데다, 신체 능력도 우수해서 스테치로선 가능하면 상대하고 싶지 않은 몬스터에 속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생뚱맞게 영주의 성 지하에 4마리나 있다니…… 스테치는 버닙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워낙 좋지 않은 소문을 많이 들어왔던 탓인지, 막연한 공포심 같은 것이 존재했다.

‘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들어오자마자 산채로 물어뜯길 뻔했네.’

스테치가 수면제 섞은 먹이를 먼저 내려 보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멧돼지도 잠재울 정도로 강력한 놈을 사용했으니, 앞으로 몇 분 정도는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져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근데 저런 놈들을 함정으로 두면 정작 백작이나 기사단장은 금고까지 어떻게 오가는 거지? 소소한 의문이 들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스테치는 목줄이 채워진 버닙들의 사이를 지나 조심스럽게 지하 금고 통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보인다.’

아무래도 버닙은 함정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이었나 보다.

불빛 하나 없는 통로를 걸어 들어가자,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자루들 세 개, 그리고 수납함으로 가득 찬 나무 선반이 나타났다. 스테치와 그 물건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거대한 철창벽 단 하나뿐이었다.

『생각보다 마지막 보안장치 치고는 허술하군. 뭐, 애초에 저만한 몬스터를 뚫고 여기까지 온다는 것부터가 일반인에겐 무리일 테니…….』

스테치는 차분히 락픽을 꺼내 자물쇠 구멍에 집어넣고 휘적거렸다.

함정 해체와 자물쇠 따기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속도는 좀 느렸지만, 성공적으로 문을 딸 수 있었다.

활짝 열린 철창의 문을 지나 자루를 하나하나 열어보는 스테치.

기나긴 시간 동안 영지민들로부터 앗아 온 재산들은 값비싼 금괴나 보석이 되어 자루 안에 담겨져 있었다.

좀 무겁긴 하지만 들고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 있나 했더니, 이런 곳에 숨겨놓았네…….’

스테치가 자루 속 금화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것을 끄집어내자, 반지의 빛을 받아 번쩍이는 투구 하나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손끝에 닿자마자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감각을 통해, 평범한 투구가 아닌 아티팩트라는 것을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자루 안을 살펴보니, 역시나 그 안에서도 범상찮은 형태의 단검이 나왔다.

“커스 이팅!”

투구고 단검이고 어차피 양쪽 모두 바라크보다도 못한 변변찮은 능력이었던지라, 스테치는 획득한 아티팩트들을 미련 없이 그 자리에서 모두 흡수했다.

《아티팩트 『메멘토 모템』의 마력 한도가 850 에서 3250 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액티브 스킬 : 아크 -> 서지로 진화하였습니다.》

《액티브 스킬 : 테슬라를 포함한 신규 스킬 두 개가 해금되었습니다.》

한꺼번에 두 개나 되는 아티팩트를 잡아먹은 탓인지, 메멘토 모템은 가용 마력량은 전에 없던 수준까지 올라섰다.

이제 어지간해선 마력 부족으로 빌빌댈 일은 없으리라. 거기다 이번엔 스킬 업그레이드와 신규 스킬의 추가도 이루어졌다.

《현재 흡수한 아티팩트의 갯수 : 5》

《현재 저장된 마력량 : 9760》

문제는 추가 어빌리티 개방을 위한 축적 마력량이었다.

보유한 아티팩트의 수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가장 먼저 해금하게 될 어빌리티인 ‘싱크로’와 ‘시져’는 각각 45000에 달하는 마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완충되고 남은 잉여 마력만이 업그레이드에 사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요구량이었다.

‘업그레이드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프로세스를 종료시킨 스테치는 일단 남은 자루도 마저 털어 냈고, 그 안에서 발견한 건…… 병에 든 액체였다.

“?”

잘못 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병을 눈앞에 들고 흔들어 보았지만, 미미한 점성을 띄고 안에서 찰랑거리던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액체였다.

“……이런 것도 아티팩트야?”

스테치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틀림없어. 모든 아티팩트가 구체적인 형상을 띄고 있는 건 아니니까. 기체나 액체 같은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는 법이지.』

용기를 깨거나 열지 않으면 흡수할 수가 없었기에 스테치는 뚜껑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붙잡아 돌렸으나, 단단하게 봉인된 병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예 박살 내자니 까딱 잘못하면 내용물이 죄다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았기에, 스테치는 일단 병을 자루 안에 다시 넣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담.’

보물 자루를 전부 어깨에 들쳐 맨 스테치는 일단 지하 금고의 입구를 찾아 이동했다.

그가 지하로 침투할 때 사용했던 먹이 배급관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버닙들 사이를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려던 스테치는, 일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입을 헤벌리며 곯아떨어져 있던 버닙들은 어느 틈엔가 두 눈을 부릅뜨고 스테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약효가 반쯤 빠지는 바람에 정신은 거의 차렸지만 몸만 가누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젠장!”

스테치는 즉시 검을 뽑아 바라크로 전기 에너지를 인챈트 했다.

약 성분이 예상보다도 더 빨리 날아가긴 했지만, 녀석들이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바로 지금이라면……!

푸쉿–!

면도날에 베인 상처처럼, 버닙의 목둘레 위에 페네트레이터가 긋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한 템포 뒤늦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나는 처리했고, 남은 놈은 셋.

휘릭-.

휘두른 몸을 그대로 회전시켜, 바로 옆에 누워 있던 다른 버닙의 옆구리에 검을 내리찍는 스테치.

가죽과 갈비뼈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는 검의 폼멜을 팔꿈치로 찍어 눌러 억지로 쑤셔 넣자, 그대로 폐부와 심장을 으깨고 들어가며 버닙의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다음……!?”

퍼억!

페네트레이터에 씌워진 전기막을 그대로 찢어발길 정도의 충격에 스테치는 그대로 바닥을 굴러 벽에 부딪혔고, 떨어진 돈 자루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으로 막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팔 한 짝이 날아갔을 참이었다.

“으윽!”

휘두른 앞발을 막 거둬들인 버닙이 스테치를 주시하는 동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다른 녀석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몸을 부르르 털었다. 그나마 나머지 둘이라도 먼저 처리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스테치는 즉시 손을 뻗었다.

‘《에어 버스트》!’

푸쉭~

바람 새는 싱거운 소리가 일고, 거기서 끝.

평소처럼 《에어 버스트》의 구체가 쏘아져 나가 버닙들을 두들기기는커녕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자, 당황한 스테치가 손바닥을 허공으로 마구 휘저었다.

“아니 이건 왜 갑자기 먹통이야?!”

“크어어엉!”

포효화 함께 덮쳐드는 버닙. 저런 거대한 녀석의 공격을 다시 한번 검으로 막으려 했다간, 제아무리 내구성이 뛰어난 페네트레이터일지라도 산산조각이 날 것이 분명했다.

스테치가 있는 힘껏 몸을 날려 옆으로 구르자, 크게 벌려진 버닙의 주둥이가 공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콱!

‘야, 이게 어찌 된 거야? 마법은 네 담당이잖아!’

『나도 방금에서야 눈치챘는데, 이 지하 금고 통로의 벽 안쪽에 디스펠륨이 둘러져 있는 모양이야. 두께가 얇은 데도 효과는 아주 발군인데?』

‘디스펠륨? 마법사 전용 수갑을 만들 때 쓰는 그 금속 말이야?’

디스펠륨은 매우 희귀한 금속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마력의 흐름을 강제로 흐트러뜨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력이 집중되지 않으면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으므로, 마법 사용자에게 있어서는 쥐약과도 같은 금속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귀중하고 값비싼 금속을 이 통로 내벽에 도포해 놓았다고?

‘이딴 걸 사대니 돈이 없지. 빌어 처먹을 시발 보르덴 새끼…….’

영주의 귀에 들어갈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욕설을 퍼붓는 스테치를 향해, 두 마리의 버닙이 앞발과 이빨을 내밀고 달려들었다.

* * *

“후우…….”

마을 겔렌의 외곽에 위치한 숲의 어느 곳에서, 엘레나는 거듭 심호흡을 하며 신체의 근육들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이는 긴장을 품과 동시에 언제든지 힘을 발휘할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테치와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그녀는 조용히 손에 쥐고 있던 물건으로 마력을 불어넣었다.

푸른빛의 마력으로 구성된 활대와 활시위가 손잡이를 중심으로 생성되었다.

그녀가 얻게 된 이 무기, ‘레코다치오’의 진가는 단순히 사용자에게 익숙한 무기를 생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꾸드드득—.

“《슈팅 어시스턴스》.”

스킬들이 하나씩 발동되며, 사격 준비 태세에 들어간 엘레나를 보조하기 시작했다.

《액티브 스킬 : 메인테넌스드 벨로시티(lv 3).
중력을 무시하고 사격타입 무기의 투사체 속도를 일정 거리까지 유지시켜줍니다. 최대 유지거리 300m.》

활을 건 시위를 당기는 엘레나의 손가락에, 평소보다 배 이상의 힘이 실리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마도구의 숨겨진 기능은 바로,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무기를 조율해 준다는 것이었다.

무게 중심을 옮기고 싶다면 밸런스를 재조정해 주고, 시위의 장력을 강하게 만들고 싶다면 더 팽팽하고 탄력 있는 시위를 생성해 준다.

즉 사용자에게 익숙한 형태의 무기를 만들어 내준다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고, 그것을 사용자에게 최적의 무기로 조정해 주는 것은 이 마도구의 제작자가 상정하지 않은 숨겨진 기능임이 분명했다.

‘원래 이런 묘기는…… 나보다는 에이다의 특기였는데.’

엘레나는 자기보다 비교적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창대같이 굵은 화살을 멀찍이 쏴재끼던 동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짓더니, 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그대로 놓았다.

팡!

폭탄이 터진 듯한 파열음과 함께, 폭발적인 스피드로 날아간 화살이 밤하늘의 공기를 가르며 쭉쭉 날아갔다.

100m, 200m, 300m…… 거침없이 나아간 화살은 어느새 성벽 위에 순찰을 돌던 병사의 머리통까지 도달해 있었다.

슈확!

무심코 성벽 밖을 돌아본 병사의 얼굴. 그리고 그런 병사의 뺨에 기다란 열상을 남기고 한참을 더 날아가는 화살. 그것이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며, 그 병사가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엘레나가 그것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화살을 날려 왔었지만, 그런 그녀조차 이 정도의 초장거리 저격은 해 본 적이 없었다.
400~500m 면 엘프인 그녀 입장에서조차 상당히 먼 거리였기 때문에, 솔직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눈치 못 챘나?’

분명 제대로 쐈을 텐데 한참 동안 병사들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엘레나는 영주성 내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고함과 비명소리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음 화살을 활대에 얹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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