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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아므리타 (52/203)


52화 아므리타
2021.11.22.


겔렌에서 벗어난 스테치 일행은 빠르게 북상하여, 지금까지 미루고 미뤘던 베네지아 중심부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일주일 정도 되는 거리에 수도가 있긴 했지만, 왕국 외곽을 돌며 대부분의 던전들을 전부 클리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냄새 안 나지? 응?”

“……아마도요.”

심중을 알 수 없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쥐고 있던 탈취작용의 식물을 더 빠르게 갑옷에 비벼댔다.

보르덴의 영지에서 빠져나오고 추격이 붙을 것을 우려한 스테치 일행은, 단숨에 겔렌과의 거리를 대폭 벌려 놓은 뒤에야 제대로 된 야영에 들어갔다.

스테치가 영주관을 탈출하면서 구한 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툭!

“아야! 이 빌어먹을 말 대가리 놈이!”

“히힝!”

꼬리로 뒤통수를 쳐대는 말을 향해 스테치가 소리치자, 놈은 잇몸을 드러내며 마치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한테 표정이 있을 리가 없지만, 그런 것 치고는 녀석의 행위 하나하나에서 묘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스테치가 한숨과 함께 말 안장에 얹혀 있던 자루 하나를 내리자, 엘레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보물은 진작 농노들에게 전부 나눠준 것 아니었나요?”

그녀의 물음에 스테치는 말없이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 보였다.

보르덴의 금고에서 찾아냈지만, 미처 내용물을 꺼내 보지 못했던 그것. 끈적해 보이는 액체가 병 안에서 흔들거리는 것을 본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물었다.

“설마…….”

“응, 이것도 아티팩트인 것 같아. 하지만 열어 볼 수가 없어서 아직 내용물을 제대로 확인해 보진 못했어.”

스테치가 용기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자 뚜껑이라 생각되는 부분에 좁쌀만 한 스위치가 보였다.

금고에서 이걸 막 찾아냈을 적엔 마음이 급했던 탓인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버튼을 누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간단히 열리는 병뚜껑을 보며 스테치는 어이없어했다.

“어디.”

손을 헝겊으로 닦아 낸 스테치가 새끼손가락 끝을 슬쩍 액체에 담그자, 바라크를 얻었을 때처럼 온갖 흐릿한 이미지가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는 것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엘레나, 이건 네게 줄게.”

잠깐 무언가를 생각해 본 스테치는 병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생각지도 않은 그의 제안에 사고가 정지한 엘레나는 당황하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엘프들에게 있어 아티팩트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사기와 죽음의 결정체.

지금까지의 엘레나는 스테치가 사용하는 아티팩트만큼은 이독제독의 이치로서 납득하고 받아들였지만, 그 이외의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스테치는 심상치 않은 엘레나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맘에 안 들어? 하지만 이 아티팩트는 전반적인 신체 능력을 증강시켜주는 훌륭한 아티팩트라고. 슬슬 너한테도 적당한 것을 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지 뭐야. 그냥 눈 딱 감고 쭈욱 들이키면…….”

“…….”

갑자기 침묵하는 엘레나와, 눈치 없이 구는 스테치. 이 답답한 광경에 보다 못한 메멘토 모템이 대신 입을 열었다.

『처음 저 여자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봐. 나를 보고 아주 질색을 했었는데 벌써 까먹은 건 아니겠지?』

스테치와 엘레나가 처음 맞붙어 싸우게 된 날, 메멘토 모템이 무엇인지 알게 된 순간 그녀가 보였던 적의. 엘프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이었으리라.

심지어 엘레나의 아버지는 던전에서 죽다 살아나지 않았는가? 아티팩트를 취하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넌센스인 것이다.

반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스테치는 그제서야 엘레나의 반응을 이해했고, 섬세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감이 들었다. 조금만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이진 않았을 텐데.

“미……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기분 나쁜 일을 강요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한편 스테치가 메멘토 모템에게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엘레나도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능력은 스테치를 옆에서 돕기엔 부족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마법 분야에 축복받은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쓸 수 있는 마법은 적었고, 던전에서 마주쳤던 인간 여성을 상대로는 끝끝내 접근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전의 만티코어와 싸우는 과정에서 무기인 활까지 부러뜨려 먹었지 않았는가.

도움을 주는 자신이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못 쓴다면, 그걸 정말 도움 역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엘레나?”

“줘 봐요.”

말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속상한 것이라 오해한 스테치가 이름을 부르자, 한참을 고민하던 엘레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알 턱이 없던 스테치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재차 말했다.

“걱정 마세요. 괜찮을…… 아니, 괜찮겠죠.”

그 말에 천천히 병을 내미는 스테치. 그러나 정작 본인의 말과는 다르게 그것을 받아든 엘레나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숨소리마저 거칠어지자,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걸 마신다는 게 너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젠 잘 알겠어. 난 네가 무리해서 마실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해.”

현재 그녀는 자발적 의지로 마을을 잠시간 떠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런데 엘레나가 아티팩트를 취해 버렸다간 같은 엘프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엔 마을로부터 추방당할 수도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자 따라나선 그녀의 인생을 너무나도 크게 망쳐 놓는 행위가 아닌가. 스테치로선 그런 결과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도움 역으로 따라온 주제에 짐덩이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엘레나의 말에, 스테치는 즉답했다.

“절대 그렇지 않–.”

“그리고 혹시 이것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나거든, 당신이 절 책임져 주시면 되잖아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꺼낸 그녀는 스테치가 반응할 틈도 없이, 병 속의 내용물을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마시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영 다른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병을 깔끔히 비운 엘레나에게 스테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괜찮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엘레나는 난생 처음 겪는 느낌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들이킨 액체의 맛은 천상의 음료처럼 달콤하고 감미로웠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쌓인 모든 노폐물을 씻겨 내리는 듯한 상쾌함을 불러일으켰다.

‘아므리타’.

그것이 엘레나가 흡수한 아티팩트의 이름이었다.

그 순간, 스테치는 액체의 검은 기운이 그녀의 목으로부터 혈관을 따라 오른쪽 팔뚝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팔 하나를 전부 휘감아 얽는 듯한 문신의 형태를 이루며 피부 위에 자리 잡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아악!”

갑작스럽게 오감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파도로 엘레나는 무릎을 꿇으며 고통스럽게 신음하자,

스테치는 그녀의 옆에 앉아 등을 두들겨주었다.

그는 아티팩트를 만져보았기 때문에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숨 크게 들이쉬어. 예민해진 감각을 진정시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야.”

아므리타.

체내를 흘러 다니며 사용자의 모든 감각적 능력을 강화시키고, 외부에서 침입한 독을 정화해 주는 기생형 아티팩트.

아므리타의 숙주가 된 이는 오감의 리미터가 완전히 풀려 버리기 때문에, 뒤섞인 감각들을 분리해내고 다스릴 수 있는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헐떡거리던 엘레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녀의 동공이 새까맣게 물들며 구름 속에 가려져 있던 은하수와 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귀로는 저 멀리 풀벌레와 동물들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손으로는 흙 알갱이 속 미세한 입자들의 촉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오감을 통해 파도처럼 쏟아지는 정보량에 압도되어 헛구역질 하던 엘레나였으나,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참으며 스테치를 돌아보았다.

“아, 아텔리어 씨…….”

“뭐든 말만 해, 필요한 건 다 가져다줄게!”

그는 엘레나의 부름에 얼른 응답했다. 아므리타의 특성상 제어에 능숙해지기 전까진 상당한 피로를 동반하기에, 스테치는 엘레나가 필요로 하는 건 뭐든 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스테치를 보곤 눈살을 찌푸리더니,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선 나지막이 속삭였다.

“……냄새 나요…….”

“…….”

그러고 보니 오감 중에는 후각도 있었지.

스테치는 잠자코 몸을 닦을 때 쓰던 탈취용 풀 뭉치를 다시 집어 들었다.

* * *

“다음부턴 편지를 쓰기 전에 생각이라는 걸 해 보고 펜대를 굴리라고 전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행차해서 손수 모가지를 쳐버릴 테니까!”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가, 다 읽은 편지를 무자비하게 구겨 버리며 윽박질렀다.

“와, 왕자님~!”

얼굴에 땀과 때로 잔뜩 절은 기사 하나가 애처롭게 손을 뻗어 보았지만, 성으로 향하는 사내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아, 텄다 텄어!”

경례를 하며 뻣뻣하게 자세를 바로세우는 병사들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준 뒤, 베네지아의 제 1 왕자 랍토레스는 성의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오늘은 웬일인지 평소의 유쾌함은 온데간데없고, 실망과 지루함만 그의 얼굴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그런 랍토레스의 뒤를 조용히, 동방의 거인이라 불리는 마르크 맥도웰이 그림자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덩치에 걸맞는 크기의 사자머리형 타워실드. 두텁고 육중한 강철 갑옷. 거기에 대검까지 찬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사방에서 병사들이 감탄을 터뜨리자, 이윽고 마르크는 침묵을 깨고 랍토레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직접 봐.”

버리는 것도 잊어먹었는지, 구겨진 편지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챈 랍토레스는 그것을 마르크에게 넘겼다. 커다란 손을 세심하게 움직여 편지를 제대로 펼친 그는,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 내렸다.

내용은 대부분이 하소연. 자랑할 내용도 아니건만, 편지에는 자신의 영지가 박살 난 과정에 대한 기나긴 묘사와 구원을 요청하는 문구가 실려 있었으며, 그 말미에는 백작 보르덴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보르덴이라면, 최근 왕자님께 치근덕대던 그 귀족 아닙니까.”

“귀중한 아티팩트들을 준다길래 적당히 어울려줬을 뿐이야. 아니면 누가 그런 쓸모없는 늙은이를 상대 해준대?”

그 말에 마르크는 편지를 팔랑이며 물었다.

“여기 보니까 모아둔 아티팩트들은 전부 강탈당했다는군요.”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그네들 일 처리가 다 그렇지 뭐. 무엇보다도 가장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 어떤 간 두꺼운 놈인지 몰라도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댔다는 거야.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라고!”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보르덴이 보낸 요청은 뒷전으로 넘긴 지 오래다.

이를 가는 랍토레스의 모습에 마르크는 잠시 턱끝을 매만지며 침묵하더니, 천천히 물었다.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추적해 볼까요.”

“왕가 그 자체인 내 명예가 실추되었는데, 상대가 누구건 간에 당연히 추적해서 끝장을 봐야지!”

한창 성의 복도를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가던 랍토레스는, 마르크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시했다.

“추적과 생포는 모두 너에게 일임하지. 귀찮게 굴면 확 죽여도 좋아!”

마르크는 왕자로부터 명을 받자마자 즉시 뒤로 돌아서더니,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나가며 말했다.

“……가능하면 생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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