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불청객
(54/203)
54화 불청객
(54/203)
54화 불청객
2021.11.24.
레지아 계곡은 빽빽하게 들어찬 바위암벽과 봉우리들로 인해, 예로부터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장소였다.
때문에 관리되지 않은 던전들이 큰 어려움 없이 우후죽순으로 생성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계곡은 몬스터들이 득시글대는 마굴로 변해 버렸다.
그런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렛이 고안해낸 방법은, 바로 계곡 여기저기에 위치한 폐광들을 쉬고 잘 수 있는 쉘터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낮 동안은 다리로 이동하고, 해가 떨어지면 쉘터에서 휴식. 이 정도만 되더라도 레지아 계곡을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있어서 좋은 무역로가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
물론 뭐든지 거저 되는 일은 없는 법. 망가진 다리들을 수리하기 위하여 가렛이 스테치와 엘레나에게 맡긴 역할은 딱 하나였다.
수리를 방해하는 몬스터들의 접근을 모조리 막아낼 것. 부하들 중에서 스테치를 모르는 이들은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쉴 곳과 음식을 제공받는 것을 조건으로 선선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액티브 스킬 : 서지.
낮은 확률의 상태이상 효과 ‘기절’ 및 ‘마비’를 동반하는 범위형 전격을 쏘아 보냅니다. 지정된 범위 따라 다수의 타겟에게 효율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파지직!
구름 한 점 없는 레지아 계곡에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전기 소리. 그와 함께 섬광이 번쩍이더니, 지상으로부터 프렉탈 구조를 그리며 솟아오른 전기가 공중에서 비행 중이던 몬스터를 덮쳤다.
“끼에에엑–!”
휴망고.
몸 전체에 돋아난 금속 재질의 깃털 때문에 치명타를 먹이기 매우 어려운 몬스터였지만, 상성에 맞는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면 대처하기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훌륭한 전도체나 다름없는 몸뚱이를 가진 휴망고는 주문에 직격당하자마자 불길에 휩싸여 땅으로 떨어졌다. 한편,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가렛은 괜히 목이 탔는지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 친구,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강해진 거 같은데…….’
이것으로 세 마리 째.
스테치는 스파크와 불똥을 튀겨대는 손을 흔들어 털었다.
고작 전기 한 가닥 날려 보내던 《아크》에 비해 《서지》는 비교적 더 넓은 범위와 강한 위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한 번 시전에 마력의 1/5를 날려 먹을 정도로 거지같은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는 데다, 출력이 높은 주문일수록 시전할 때마다 매번 마력 이외에 스테치 개인의 집중력도 요구했기 때문에 피로감이 엄청났다.
흡사 아무 지식도 없는 일반인이 유리 공예를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랄까.
“잠깐 쉬시겠어요?”
“아냐, 마저 끝내 버리자고.”
검게 물든 눈으로 걱정스레 쳐다보는 엘레나에게, 스테치는 OK 사인을 보이곤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V 자로 만든 중지와 검지 사이에, 팔뚝을 타고 올라온 전기가 모여 작은 덩어리를 형성했다.
“저쪽. 거리는 약 400m로 곧장 날아오고 있어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어딘가였지만, 스테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된 방향으로 손을 겨누었다.
가위질 하듯 두 손가락을 맞붙이는 순간, 피부를 짜릿하게 훑고 지나가는 후폭풍과 함께 두 번째 전류가 손끝으로부터 발사되었다.
빠지직!
그것은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 스피드가 아니었다.
전격에 맞아 몸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휴망고가 묵직한 땅 울림과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추락하자, 스테치는 시체로부터 마력을 회수한 뒤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러나 엘레나는 그런 그에게 수고했다는 말 대신 자신의 활을 꺼내 들더니 말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적이 있었군요.”
“끼에에엑!”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하피 무리였다. 평소엔 휴망고가 사냥하는 것을 멀리서 구경만 하던 녀석들이, 상위 포식자가 없어지자마자 기세등등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반격하려던 스테치가 비틀거리며 다시 바닥에 주저는 모습에 혀를 찬 가렛은 부하들에게 외쳤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겠군. 녀석들이 다리를 점거하게 놔둬선 안 된다! 공격!”
가렛이 망토를 걷어 보이자, 안감의 홀더에 꽂혀 있던 무수한 단검들이 그 이빨을 번뜩였다.
능숙한 손짓으로 단검 하나를 투척해 하피의 이마에 꽂아 넣는 그의 모습은 부하들의 전의를 고양시키게 충분했다.
함성을 내지르며 일어선 가렛의 부하들은 각자의 활로 하피들을 쏴 맞춰 떨어뜨렸고, 가렛은 단검 두개를 양손에 역수로 쥐고선 다시 도약하려던 하피에게로 달려가 그대로 등짝에 찍었다.
“꺄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하피의 울음소리와 날갯짓 소리. 엘레나도 열심히 활대로 녀석들을 후려치거나 화살을 쏘는 식으로 대응했으나, 점점 심해지는 소음에 움직임이 더뎌졌다.
가렛과 그의 부하들이 모두 합세하여 저항하고 있었지만, 녀석들은 좀처럼 순순히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공중에서 수직 하강한 하피가 바닥에 누워 정신을 못 차리던 스테치의 면상으로 발톱을 들이밀었다.
힘겹게 몸을 비틀어 피하자, 스테치는 눈앞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지나간 하피의 발톱이 애꿎은 바닥만 할퀴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건방진 새끼!”
누운 자세로 날린 발길질에 걷어차인 하피는 큼직한 날개를 휘저으며 비틀거렸고, 날아온 엘레나의 화살이 녀석을 마무리 지었다.
끝내주는 타이밍에 스테치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엘레나는 무릎을 꿇더니 귀를 틀어막으며 괴로워했다.
“이런, 소리가……!”
“하!”
엘레나를 노리며 날아오던 하피 하나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난입한 가렛의 발차기에 맞고선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스테치는 그런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뒤 외쳤다.
“그녀를 데리고 부하들이랑 전부 뒤로 물러서! 큰 거 한 방 날릴 테니까!”
스테치의 경고성 섞인 말에 가렛은 즉시 엘레나를 부축하고 저 멀리 엄폐물 뒤편으로 도망쳤다.
그러는 와중에 그가 내지르는 고함과 명령들은 주변 소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라, 부하들도 곧잘 알아듣고는 화살들을 거두고 엄폐물까지 이동했다.
“너네 살기 좋으라고 이 짓거리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서지》!”
부채꼴 범위로 넓게 확산 된 전류가 뿜어져 나오며 하피 떼들을 휩쓸었다.
전열부터 후열의 적까지 전기의 파동이 한 번 퍼져 나가자, 시끄럽게 울어대던 하피들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어떤 놈은 기절하는 데에 그쳤는가 하면, 또 어떤 놈은 아예 바싹 구워져 새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냈다.
하늘을 나느라 허공에 2초 정도 정지해 있던 녀석들은 곧장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고, 그것을 본 스테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으…….”
물론 마법의 여파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하피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워낙 소수인 데다 방금의 일격으로 전의가 완전히 꺾인 모양인지, 녀석들은 스테치에게 위협적으로 한 번 울부짖고는 하나둘씩 방향을 틀어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 광경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인 것은 가렛이었다.
낮 시간대에 그들을 위협할 만한 몬스터는 이것으로 모두 격퇴당했다.
하피들도 당분간은 이곳에 올 엄두조차 못 낼 테니, 다리 복구 작업을 진행하려면 지금뿐이다.
“공격 중지! 다친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라!”
혹여나 다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싶어 끝까지 활 시위를 당기고 있던 가렛의 부하들은, 가렛의 말에 뒤늦게나마 스테치와 다른 부상당한 이들을 점검했다.
다행히도 스테치의 경우는 단순한 현기증이었고, 나머지 이들도 물약으로 회복될 수 있는 미미한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스테치가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며 가렛을 돌아보니, 그는 엘레나의 머리에 새 붕대를 둘러주고 있었다.
“이렇게 해주면 되는 거지? 안 그래도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 보이더라고.”
가렛의 물음에 스테치가 말했다.
“……맞아, 고마워.”
엘레나가 가렛에게 목례를 하여 예를 표하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서두르자! 다리 복구 작업을 재개한다!”
* * *
몇 시간 후.
스테치와 엘레나는 가렛이 건네준 물과 빵을 받아들었다.
몬스터가 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서자 작업 속도는 놀라울 만치 빨라졌는데, 다 망가진 로프와 너덜거리는 발판밖에 없던 공중 다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재건되는 모습을 본 스테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군. 다리 만드는 속도가 굉장한데? 이런 식으로 며칠만 더 해나가면 계곡이 정말 사람 살 만한 장소로 변하겠어.”
“오늘은 너희가 몬스터를 처리해 줬으니까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거야. 평소엔 몬스터가 나올 때마다 줄행랑을 쳐야 되니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는 때가 많거든.”
가렛은 어울리지도 않는 알록달록한 피크닉 바구니에서 검은 빵과 수통을 건네주었고, 스테치와 엘레나는 이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이틀 며칠간은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다음은 어쩌려고? 몬스터들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테고, 그럼 다리를 못 써먹는 건 여전할 텐데.”
“휴망고가 사냥을 할 수 있는 성체가 되는 기간까지는 10년이나 걸려. 게다가 방금 네가 처치한 부모 세대들이 없으면 먹이를 먹지 못한 유생체들은 알아서 굶어 죽을 테니까, 문제없어.”
“휴망고 하나만 문제가 아니잖아.”
태연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는 가렛에게 스테치가 대꾸했다.
가렛을 돕게 된 지 오늘로 이틀째. 스테치가 실제 레지아 계곡에서 지내면서 본 바에 의하면, 다리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처리해야 할 몬스터는 비단 휴망고 뿐만이 아니었다.
낮에는 하피들도 출몰하고, 밤에는 던전에서 기어 나온 그로자크네와 딥나이트 아울들이 치고 박느라 밖을 돌아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몬스터 틈바구니에서 가렛이 제법 잘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이번 계획을 위해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쉘터는 준비되어 있으니 남은 건 시간과 인내의 싸움이야. 몇 개월 정도만 끈덕지게 일해서 길을 다듬으면, 제대로 통행료도 거둘 수 있는 무역로 겸 아지트가 완성되겠지.”
“보스, 큰일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던 가렛의 부하 하나가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안색이 그닥 좋지 못한 것으로 보아하니, 부하가 가져온 소식이 뭐든 간에 좋은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이! 너 보초일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여기 온 거냐?”
가렛의 장난스런 물음에 부하는 짜증스럽게 반응했다.
“시답잖은 농담 그만둬요, 보스! 추격자 놈들이 다시 왔습니다!”
추격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손바닥 뒤집듯 돌변하는 가렛의 표정에, 태연히 육포를 뜯던 스테치조차 깜짝 놀랐다. 평소 능글맞던 그가 이번만큼은 유달리 심각해지더니, 부하가 온 방향 쪽의 바위 능선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작업하던 몇몇 인원들과 엘레나는 어리둥절하여 가렛이 떠나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스테치는 벌떡 일어나 먹던 빵을 씹어 삼키고는 그 뒤를 쫓았다.
몇 분 정도 소요해서 도착한 장소는 계곡 봉우리 중 하나에 설치된 의적단의 감시초소.
말이 감시초소라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적당히 고지의 바위를 깎아 만든 은신처에 가까웠다.
스테치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가렛은 스파이 글래스로 어딘가를 유심히 살피던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렌즈에서 눈을 떼고 스테치를 돌아보더니, 말없이 스파이 글래스를 건넸다.
“뭔데?”
도구를 사용해 주변을 둘러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테치는 계곡 한켠에 위치한 숲속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속 물체들과 사람의 형상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목탄과 흙을 발라 위장시킨 탓에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너도 이제 봤지?”
뭔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봤다면 눈치채지 못 할뻔 했다. 저게 부하가 말하던 추격자인가? 그러자 마침 그 의문에 답하듯 가렛이 말했다.
“너랑 헤어진 이후로, 우리는 추격해오는 병사들을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격퇴해왔어. 도망과 싸움의 연속이었지.”
빠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데 이번엔 자기들도 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친구들을 데려온 모양이야. 그것도 아주 까탈스런 놈들로.”
그의 말과 동시에 스파이 글래스를 들여다보던 스테치의 눈에, 울부짖는 용의 머리통이 그려진 깃발 하나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