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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가로드 (55/203)


55화 가로드
2021.11.25.


“자, 기어이 일이 터져 버렸다.”

가렛이 커다란 석제 테이블 위에 지도를 쫙 펼쳐 놓으며 말했다.

스테치와 엘레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가렛은 레지아 계곡의 상세한 지형지물이 표시된 지도의 외곽 부분에 표시용으로 돌멩이 둘을 올려놓았다.

“뛰어난 색적 능력을 가진 우리 훌륭한 보초 덕분에, 몇 주 동안 끈질기게 우리를 쫓아오던 추격대를 이쪽에서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놈들이 우릴 상대로 어지간히 짜증났는지 이제는 기어이 용병까지 고용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지랄 맞기로 유명한 드레이크즈 용병단을…… 멍청한 병사들 골려주면서 재미 보던 나날도 이제는 바이바이라 이거지.”

“그 용병단 이름이 드레이크즈 용병단이야?”

“설마 들어 본 적 없어? 나름 그쪽 분야에서는 이름값 좀 날리는 편인데.”

가렛의 말에 스테치는 머릿속을 헤집어 보았다.

그가 한창 던전 탐험 일을 하고 있을 적, 한 용병단의 이름이 조롱의 대상으로 거론되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그들이 용을 자신들의 심볼로 삼았다는 것.

실제 구전으로 내려오는 용의 위상은 매우 드높았기에, 그 어떤 단체나 개인이라 할지라도 용을 심볼로 삼으면 역으로 건방지고 허세에 찌들었다는 인상을 주기 일쑤였다. 그러나 드레이크즈 용병단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보란 듯이 자신들의 심볼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스테치조차 어렴풋이 이름을 들어 본 기억만 남아 있을 뿐, 그들의 활약상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었다. 애초에 홀로 활동하길 좋아하는 스테치로서는 남과 엮일 일이 없었으니까.

그가 어깻짓을 해 보이자, 가렛이 말했다.

“두 사람 다 들어본 적 없어 보이니까, 이번 기회에 제대로 설명해 주마. 단장의 이름은 가로드. 드래곤 버스터, 드래곤 킬러…… 온갖 별명을 달고 다니는 남자지.”

“그렇게 굉장한 사람이 여기에……?”

옆에서 듣고 있던 엘레나가 멍하니 되뇌이자, 가렛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속지 마, 전부 다 자칭이니까. 실제 용은 쓰러뜨려 본 적도 없는 주제에 그딴 걸 닉네임이랍시고 지으니 누가 인정해 줄 턱이 있나.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이 가진 아티팩트는 정말 위험해.”

가로드가 소유한 아티팩트, ‘스피라투스’. 살아 있는 용의 머리통에 포신과 핸들을 붙여 놓은 듯한 이 독특한 외견의 아티팩트는, 그 생김새만큼이나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티팩트의 능력은 주변 물질을 집어삼켜 탄으로 만들고 발사하는 거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엘레나가 물었다.

“포탄 하나 하나의 위력이 단순한 대포급을 뛰어넘으니까 문제지…… 주변에 널린 모든 것이 포탄의 재료가 되니 탄 수급도 문제가 없고, 본인 능력에 따라선 달리는 도중에도 포를 쏠 수가 있어. 안 그래도 가로드 그 새끼는 무려 성을 상대로 정면에서 공성전을 벌인 전적도 있단 말씀이야.”

스피라투스는 사실상 소형 대포에 가까운 물건으로, 인간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무기 중에서는 최상위급의 위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그런 무기로 레지아 계곡 곳곳에 숨겨진 아지트들을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한다면? 이쪽은 저항조차 못 하고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너 어째 꽤 자세히 안다?”

“워낙 눈에 띄는 짓거리들만 골라서 하잖냐. 용 문장에, 용 이름에, 용 같은 무기까지…… 그래 봤자 나도 대부분은 들어서 알게 된 정보들밖에 없어. 어쨌거나, 내가 봤을 때 가로드가 곧장 아티팩트로 이쪽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야. 아직 우리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또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가렛의 설명을 듣고 있던 스테치는 뒤늦게서야 어느 사실을 눈치챘다.

저 가로드란 작자가 레지아 계곡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다리 복구 작업은 절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포격으로 인해 기껏 수리해 놓은 다리가 아예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스테치가 슬쩍 손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혹시 추격대들을 공격하는 데엔 나도 동원되는 건가?”

“응? 당연하지. 지금으로선 네가 우리 핵심 전력인데, 빠지면 말이 되겠냐?”

“……말 안 해도 싸울 생각이긴 하지만 조금은 사양이란 걸 해 보는 게 어때?!”

스테치는 황당하단 투로 쏘아붙인 뒤, 가만히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일단 가로드만 제거하면 나머지를 쓰러뜨리는 건 쉽다 이 말이잖아. 그럼 네가 몰래 접근해서 암습을 걸면 되는 거 아니냐?”

스테치가 그 말과 함께 가리킨 것은 가렛의 아티팩트인 타른카페였다. 그러나 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망토 끝단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그게 됐으면 이렇게 작전 회의를 펼 것까지도 없지.”

『아마 그건 불가능할거야.』

의외로 스테치의 의문에 먼저 대답한 것은 메멘토 모템이었다.

『저 아티팩트의 능력은 위상 변환이야.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 아스트랄 도메인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자체가 세상의 법칙에 위배되는 행위이니, 사용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통도 심해지겠지.』

‘좀 쉽게 말해 봐.’

『한 마디로 말해서, 산 사람이 영혼들의 세계에 오래 발을 들여놓을수록 신체적 부담이 커진다는 뜻이야.』

메멘토 모템의 설명과 거의 비슷한 설명을 가렛에게서 또 한 번 들은 스테치는 실망스런 표정이 되어 다시 지도로 눈을 돌렸다.

하긴 그렇게 뭐든 되는 아티팩트였으면, 가렛은 진작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쳐들어가서 가로드의 모가지를 따고 왔을 것이다.

스테치가 고민하는 사이 엘레나가 가렛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쓸 수 있는 공격 수단이 뭔가요?”

“글세……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아.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 둔 화살이 많긴 하지만, 어설프게 공격했다간 우리 위치만 드러내는 꼴이 될 거야.”

상대가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탓에, 엘레나의 장거리 저격으로 맞추기엔 시야 확보도 어려운 데다 거리도 너무 멀었다.

또한 상대도 장거리전에 능한 이상, 자칫 대포 대 활의 싸움이 되었다간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가렛은 거기다 한 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가로드는 두꺼운 전신 갑옷을 항시 입고 다니는 녀석이야. 어지간한 화살이나 검으로 녀석의 방어를 뚫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

스테치가 가렛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네 부하, 셰일이라고 했던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저번에 우리 엿 먹였을 때처럼 다 잠재우면 되잖아?”

“셰일은 지금 타지의 의적단 활동을 관리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니까 논외야. 그나저나 넌 걔가 없는 걸 여기 온 지 이틀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눈치챈 거냐?”

가렛이 핀잔을 주었지만, 스테치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역시 직접 나서서 싸우는 수밖에.”

“어떻게 하려고?”

상대편의 핵심 공격 수단인 스피라투스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는 것. 제아무리 강력한 아티팩트더라도 아군이 피해 범위 내에 있다면 절대 함부로 쓸 수 없다. 동료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또라이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기습을 하더라도, 방패가 되어 줄 적들이 사방으로 산개하여 스피라투스의 영향권 밖으로 빠져나가면 곧바로 자비 없는 포격이 스테치에게로 쏟아지게 될 테니까.

스테치는 말없이 메멘토 모템을 낀 왼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마침 마땅한 기회가 없어서 아직까지도 써먹지 못한 주문이 하나 남아 있던 참이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요긴하게 쓰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한 스테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다 방법이 있지.”

* * *

추격대가 산적들의 흔적을 추격하여 레지아 계곡에 도달한 지 딱 하루.

매번 다 잡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쥐새끼처럼 빠져나가는 산적단 때문에 추격대의 병사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상부에 지원을 요청하여 고용한 것이 바로 이 드레이크즈 용병단. 포격 중심의 전술을 사용하는 그들을 고용한 시점에서 추격대는 산적단 멤버들을 생포할 계획은 때려치운 지 오래였다.

“내일까지 산적 놈들을 일망타진하고 나머지 의뢰들이나 하러 가자, 이놈들아!”

“오우!”

용병단의 단장 가로드가 잔에 든 술을 들이켜며 부하들과 함께 소리 지르는 모습에, 병사들과 그들을 이끄는 기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여나 이번에도 산적단을 놓칠까 전전긍긍하는 자신들과 달리 속편하게 술이나 퍼마시고 소리까지 지르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용병단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사실이었기에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 교대로 주변에 보초를 서라. 적들이 이쪽을 눈치채면 안 되니, 불을 밝힐 때는 항상 조심하고.”

“예.”

그 적들이 이미 자신들을 포착한 지 오래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기사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한편, 한창 술을 들이켜던 가로드는 손을 더듬더듬 뻗어 땅바닥에 놓여져 있던 스피라투스를 집어 들더니 물었다.

“너도 배고프지? 자, 많이 먹어라.”

포신을 안으로 수납한 스피라투스의 용 주둥이가 쩍 벌어지더니, 그것을 쥐고 있던 가로드의 손 움직임에 따라 주변의 흙과 돌멩이들을 퍼먹었다.

거구의 사나이가 용 머리를 가지고 인형 놀이를 하는 듯한 기괴한 광경에 병사들은 기겁했으나, 용병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장님, 한 잔 더 드시죠.”

용병 하나가 마차로부터 내려온 술통을 따 새 술잔을 채워 건네자.

가로드는 스피라투스에 한창 흙을 먹이는 와중에도 흔쾌히 잔을 받아 내용물을 들이켰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기나긴 목 넘김이 끝나자, 그는 크게 트림을 한 번 내질러 주고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제이미…… 제이미는 어디 간 거야? 술은 그 친구 입 터는 걸 안주 삼아서 마셔야 제맛인데.”

저 멀리 수풀 어딘가로 볼일을 보러 나섰던 용병 하나가 보이질 않자, 가로드와 그 부하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멀리 나가진 않았을 텐데?

캉!

난데없이 야영지 한가운데에서 들린 금속 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스피라투스에 맞고 튕겨 나온 화살이 바닥에 떨어지자, 눈치가 빠른 이들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쩌저적!

입김이 보일 정도로 주변 기온이 차가워지더니, 순식간에 일대가 꽁꽁 얼어붙으며 곳곳에서 고드름을 피워 올렸다.

바닥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용병들은 그대로 상반신까지 얼음으로 뒤덮여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고, 그나마 서 있단 자들도 발목까지 얼어 버린 탓에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머리를 노렸는데, 대단한 반사신경이네요. 아니면 단순히 저자의 운이 좋았던 걸지도.”

“운은 아닐 거야. 짐승 마냥 감각이 끝내주는 작자니까 말야.”

엘레나의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선 스테치와 가렛이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첫 번째 기습에서 실패했다면 더 이상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스테치의 전략을 써먹기 위해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흐응!”

콧김을 내뿜으며 전신에 힘을 꽉 준 가로드는 다리를 비틀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던 얼음을 깨 버렸다.

역시 덩치 값은 한다 이건가? 전신 갑옷을 절그럭 거리며 몸에 묻은 서리를 툭툭 털어 내는 가로드의 모습에서는 일말의 당혹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을 이리저리 돌려 위협적으로 뚜둑거린 그는 스테치에게 말했다.

“만나서 반갑네, 친구들. 레지아 계곡으로 도망쳤다던 산적단이 자네들인가?”

“뭐, 그렇지. 되도록 산적보단 의적이라고 불러줬으면 더 좋겠지만.”

“나는 얘네하고 한 편이 아니…… 아이고, 말을 말자.”

굳이 가로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적인지 묻는 질문까지 긍정해 준 이유는, 혹시라도 그가 계곡을 향해 포격을 가할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부하들은 계곡에서 잠시 철수시켰지만, 작업 중이던 다리와 쉘터는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절대로 공격받아선 안 됐다.

다행히도 방금 전 대답을 들은 가로드의 이목은 오롯이 스테치 일행에게 집중된 듯 보였다.

“기습이 실패해서 유감이군. 하지만 고작 화살 하나나 마법 정도로 이쪽이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네. 부하들은 몰라도 온갖 상황을 다 겪어온 이 몸을 이제 와서 놀래킨다는 건 불가능할걸.”

“네 부모는 적을 만나면 주절주절 허세나 늘어놓으라고 가르치시던?”

“하하! 제이미 이외에 이렇게 독사 같은 혀를 가진 친구는 처음 보는구먼!”

가렛의 비아냥을 가로드는 호탕하게 받아넘겼다.

단순 무식한 행동과는 달리 성격은 제법 둥근 모양이었다. 스테치는 시답잖게 도발하는 가렛이 한심해 보였는지, 한숨을 푹 쉬며 가로드에게 겨눈 검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잔말 말고 덤벼. 오늘이 네가 이승 하직하는 날인 줄 알아라.”

어차피 가로드 같은 녀석을 상대로 가렛의 부하들이 덤벼 봤자 이길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때문에 스테치는 그들이 쓸데없이 나섰다가 공격 대상이 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은근슬쩍 부하들간의 싸움을 배제시키고 대장 클래스끼리의 전투를 유도하고 있었다.

“원, 성질 한 번 급하긴.”

가로드가 들고 있던 스피라투스가 입을 벌리더니, 지면과 얼음으로 딱 붙어 있던 부하 용병의 발목을 덥석 물어뜯었다.

얼핏 잡아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얼음을 깨부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딜!”

그 타이밍에 맞춰 엘레나의 엄호 사격과 함께, 스테치와 가렛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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