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무서운 여자
(56/203)
56화 무서운 여자
(56/203)
56화 무서운 여자
2021.11.26.
카가가각-.
전기장으로 코팅된 스테치의 검과 가렛의 단검이 동시에 휘둘러졌지만, 닿은 것은 가로드의 목이 아닌 그의 아티팩트였다.
스피라투스의 가장 단단한 부분으로 두 사람의 공격과 화살까지 너끈하게 막아 낸 가로드는, 팔을 휘저어 스테치와 가렛을 물러서게 만든 뒤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투구를 천천히 뒤집어썼다.
머리가 유일한 약점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공략하기 어렵게 되었다.
“가렛!”
가로드가 스피라투스의 포신을 수납시켜 주둥이 부분을 자신의 손 마냥 딸깍거리자, 가렛은 씩 하고 웃어 재끼더니 가로드를 향해 다시 한번 돌진했다.
가로드가 쩍 벌어진 용의 주둥이를 가렛에게 뻗었으나, 그의 몸은 허상처럼 투명해지더니 공격을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음?!”
가렛의 페이크에 뒤이어 이번엔 스테치가 달려들었다.
가로드의 자세가 무너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기에, 검을 장전한 스테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가로드의 복부에 검 끝을 밀어 넣은 뒤 격발시켰다.
탕!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복부로 파고드는 페네트레이터의 타격부와, 한 박자 느리게 뒤로 빠지는 가로드.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갑자기 허리를 숙여 위장 속에 쌓여 있던 것을 전부 게워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스테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의 일격이 제대로 맞았다면 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뱃가죽이 뚫려야 정상일 텐데?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뒤로 빠져서 충격을 완화시킨 건가?’
그 증거로 가로드의 몸뚱이를 감싸고 있던 강철 플레이트는 처참하게 우그러진 상태였지만, 어디에도 핏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방금의 페이크가 실패한 이상, 같은 수를 다시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스테치가 차분히 탄피를 배출시킨 후 다음 탄을 장전해 넣자, 그것을 본 가로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
말을 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이다.
살면서 처음 보는 스테치의 무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일까? 그는 다짜고짜 스피라투스 내부에 수납되어 있던 연장 포신을 뽑아내어 스테치에게로 겨누었으나, 그가 얼어붙어 있던 다른 용병의 뒤로 이동하여 숨어 버리자 혀를 찼다.
보아하니 이 산적 패거리는 그의 아티팩트가 가진 능력을 확실히 파악하고 온 모양이다.
“나에 대한 예습을 확실히 한 모양이군. 하지만 나도 단순히 포만 쏠 줄 아는 용병은 아니거든!”
탓!
빠르게 스테치의 앞까지 접근한 가로드는 아티팩트를 글러브처럼 변환하여 스테치를 냅다 후려갈겼다.
어찌나 상대의 힘이 셌는지, 제대로 공격을 막아 내고도 질질 밀려나는 스테치였다.
그가 백스텝으로 물러설 때마다, 가로드는 매번 빠르게 스테치를 추격하여 한발 빠르게 다음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간간히 가렛이 단검을 투척하거나 스테치가 검을 휘둘렀지만, 가로드는 모든 위협에 대해 능숙하게 대응했다. 자잘한 일격은 두꺼운 전신 갑옷으로 받아넘기고, 스피라투스로는 계속 펀치를 가해왔다.
전투가 벌어지는 지점 밖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엘레나도, 가로드가 스테치와 너무 가까이 있는 탓에 함부로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있었다.
『페네트레이터 같은 괴상한 무기를 상대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다, 자신의 장점을 살린 근접 격투술. 과연, 용병 대장의 타이틀을 달 만큼의 실력은 있네.』
‘확실히 그 말대로…… 이 자식, 제법 터프해!’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가로드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묵직했고, 태세를 재정비하기 위한 틈을 일절 주지 않았다.
“크윽!”
투콱!
다시 한번 휘둘러져 오는 용의 글러브를 향해 페네트레이터를 격발시키는 스테치. 타격부와 스피라투스의 정면충돌의 반동으로 거리가 크게 벌어지자, 스테치는 즉시 손을 뻗었다.
무기가 먹히지 않는다면, 마법은 어떨까?
‘《서지》!’
메멘토 모템으로부터 발산되는 녹색 빛과 번개의 푸른빛이 뒤섞이더니, 스테치의 검지와 중지 사이로 모인 전기 구슬에서 그물망과 같은 전류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가로드는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한 동작으로 한 발 먼저 움직여 주문을 피했고, 스테치는 뻗은 손의 방향을 돌려 가로드의 뒤를 쫓았다.
‘상황이 좋지 않은데.’
가로드는 마법 공격을 스피라투스로 막아 내며 고민에 빠졌다.
스테치가 사용하는 마법이 아티팩트를 통해 발현되는 것은 비주얼적으로 너무나 명백했다.
가렛에 대한 정보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티팩트를 가진 자가 하나 더 덤벼올 줄이야…… 완전히 그의 상정 외였다.
현재 자신의 부하나 병사들은 죄다 얼음으로 구속되어 방패막으로 쓰이고 있는 신세. 스피라투스의 포격을 함부로 날렸다간 아군까지 휘말릴 것이다.
강력한 적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동료들을 얼음의 구속으로부터 일일이 구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스테치에게 돌진했다.
“우옷!”
주문을 그대로 막아 내며 다가오는 가로드의 모습에, 스테치는 쏘던 마법을 중단하고 옆으로 굴러 피했다.
하기사,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아온 용병 대장이 단 한 번도 대 마법전을 겪어 보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여기까지는 스테치의 생각대로였다.
마법도,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핏 의미 없어 보이는 이 모든 행위에는 사실 또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가로드가 스테치의 마법을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렇다면 슬슬…….’
스테치가 손아귀를 벌려 다음 주문을 준비하자, 가로드가 먼저 움직였다.
스피라투스의 포신을 뽑아낸 그는, 스테치나 가렛이 반응하기도 전에 포구를 얼어붙어 있는 지면으로 향하고선 냅다 발사해 버렸다.
“흐앗!”
콰과광!
포탄이 지표면을 뒤덮은 얼음 장판을 강타하여 거대한 균열과 지진을 발생하자, 바닥이 일그러지고 뒤틀리는 과정에서 병사와 용병들의 몸을 얽매고 있던 얼음들이 차례로 깨져나갔다.
흙먼지와 함께 반짝이는 얼음 조각들이 주변에 자욱이 깔릴 때 즈음엔, 이미 모든 이가 구속에서 탈출한 뒤였다.
“모두들, 움직일 수 있겠나?”
가로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용병들과 병사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기들을 집어들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들의 눈은 스테치와 가렛에 대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잘도 우리를 방패로 써먹었겠다!”
“죽여 버려!”
그들은 함께 산적 일당을 무찌를 생각이었겠지만, 가로드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다른 용병들이나 병사들이 가까이에 있으면 오히려 그에게 방해가 될 뿐이었다. 때문에 가로드는 다시 마법을 사용하려던 스테치를 전력으로 방해하며 외쳤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라!”
그것이 곧 스피라투스의 포격 선언임을 알아차린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병사들을 이끌고 주변 숲속을 향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파지직!
“으아악!”
달려가던 용병 하나가 별안간 나뭇가지들 사이로 뻗어 나온 스파크에 얻어맞더니, 명멸하는 섬광과 함께 고꾸라졌다.
그것은 당장 도망치려던 모든 이들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용병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뭐, 뭐야? 방금 것은?”
“마법인가?”
희미하게 공기 중으로 퍼지는 탄내. 감전되어 미동조차 하지 않는 희생자의 모습에, 다른 이들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용병 하나가 손짓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반대쪽! 반대쪽으로 가자!”
‘방금 전 그건…… 마법사인가? 무슨 놈의 도적단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전력들을 가지고 있는 건데?’
스테치와 힘겨루기를 하던 가로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아아악!”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던 병사 하나가 또다시 스파크에 맞아 쓰러져 버리자, 비명소리에 놀란 병사들과 용병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마법사가 여럿이 아닌 이상에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전격을 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로드는 재빨리 주변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봐도 소용없어.”
스테치의 목소리에 가로드가 돌아보니, 검을 아티팩트에 대고 밀어붙이던 스테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고하겠는데, 이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액티브 스킬 : 테슬라.
범위 내로 들어 온 적을 자동 요격하는 오브를 설치합니다. 오브의 지속 시간은 생성하는 데에 소모한 마력량과, 공격 횟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스테치가 준비한 보험이자, 비장의 수였다.
가로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사전에 충분히 파악해 둔 스테치는, 기습을 걸기 전에 적의 야영지 주변을 전부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테슬라 오브들을 설치해 두었다.
마법의 특성상 테슬라 오브 하나로 수십 명이 달려들어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 돌파당할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그런 사실을 누가 알 리도 없을 뿐더러 시도해 볼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결국. 스테치의 예상대로 병사와 용병들이 얼음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옴짝달싹 못 하자, 가로드는 이를 갈았다. 상황은 무엇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애송이가!”
처음으로 가로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욕설이 터져 나오자 스테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스테치의 뒤로 접근한 다른 병사들이, 가로드와 무기를 맞대고 있던 스테치를 향해 도끼와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가렛이나 엘레나가 아니었다.
홀연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난 가렛은 상대의 턱을 팔꿈치로 쳐갈겨 쓰러뜨렸고, 엘레나가 쏜 화살은 창을 든 병사의 손가락을 날려 버렸다.
털썩.
“끄아아아……!”
창날이 그대로 땅에 떨어져 꽂히자, 뒤늦게 밀려오는 격통에 병사는 손가락 잃은 손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허튼짓은 하지 마라! 다음은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릴 테니까!”
가렛의 외침에 병사들과 용병들은 깨달았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가로드의 싸움을 돕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방패막이자 인질로 쓰일 거라는 사실을.
굳이 그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 이유는 살아 있어야 방패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을 모를 리 없던 가로드는 급기야 노호성을 터뜨렸다.
“정정당당하게 제대로 붙어 볼 생각은 없는 거냐, 산적 놈들!”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해 주리? 스테치는 속으로 어처구니없어했다.
몇몇 용병들은 화살이 발사된 방향을 특정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설령 엘레나의 위치를 파악한다고 해서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차피 네놈의 주문이 내게 먹히는 일은 없으니까!”
“어디 한번 보자고.”
검을 몸으로 받치며 한쪽으로 뺀 스테치의 손에서, 《에어 버스트》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압축 회전 중인 투명한 난기류 덩어리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에 가로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티팩트를 전면에 방패로 내세웠다.
터엉!
스피라투스의 견고함은 《에어 버스트》의 물리력으로도 뚫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신 바람의 구체가 터지면서 발산된 풍압에 의해 가로드의 몸뚱이는 공중으로 붕 떠올랐고, 가로드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 누구라도 공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로 이 한 방을 맞추기 위해, 스테치는 지금껏 떡밥을 깔아왔다.
“밀어붙여!”
가로드가 채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가렛은 그의 흉부에 날아차기를 먹였다. 그것도 모자라 이어지는 스테치의 보디 체크까지 받은 가로드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다가 테슬라 오브의 범위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흐아아악!”
예외 없는 전격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가로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금속 갑옷을 입은 그에게 있어 《테슬라》의 전기는 상성이 최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신체 능력 덕분에 가로드는 용케 기절하지 않고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재빠르게 《테슬라》의 범위에서 빠져나온 가로드가 한쪽 무릎을 꿇자, 스테치와 가렛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여 다시 그를 압박했다.
감전, 또 감전. 점점 누적되는 데미지 때문에 나중엔 마법을 피할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첫 번째로 받은 일격이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으…….”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린 가로드는, 검을 번쩍 치켜드는 스테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손 하나 까딱 못한 채 죽게 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죽는다고? 내가?’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도 병신같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죽는다?
도덕심이나 동료애 따위를 챙기다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가로드의 초점 잃은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더니, 스피라투스의 주둥이 안에서 연장 포신이 튀어나왔다.
“어?!”
투쾅!
『피해!』
갑자기, 스테치의 눈앞으로 거대한 포탄이 날아왔다. 무심코 《크로스 윈드》를 발동하는 그였으나, 메멘토 모템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굴렀다.
포탄이 수십 그루의 나무를 박살 내며 날아가다, 크레이터를 발생시키는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저런 무식한 투사체는 《크로스 윈드》로도 절대 막을 수 없다.
“죽어라!”
가로드의 실성한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오더니 마구잡이식 포격이 이어졌다.
사실상 죽기 직전에 발휘하는 최후의 발악이나 다름없었으나, 그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에 스테치는 반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가로드를 말리려던 병사나 용병들도 얄짤 없이 쓸려나가는 것을 보아하니, 완전히 정신을 나가 버린 듯 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끈질겨요, 당신.”
스테치의 마법조차 무력화시켰던 엘레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포신의 내부에서 탄자를 형성하고, 발사하기까지의 모든 것이.
언제 포격에 쓸려 버릴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는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고 화살을 쏴 날렸다.
콰과광!
스피라투스의 포구 안으로 들어간 화살이 탄자를 재구성하던 에너지의 중심을 건드리자, 대폭발과 함께 가로드는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키며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늘 높이 치솟은 육편과 내장 조각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충격적인 전개를 목전에 두고서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어……?”
상황 파악이 늦은 병사들과 용병들은, 이윽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무기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던 가렛과 스테치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머리를 쓸어 넘기며 숲으로부터 걸어 나오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