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레지아의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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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레지아의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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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레지아의 던전
2021.11.28.
같은 던전에서 태어난 몬스터들일지라도, 엄연히 먹고 먹히는 관계가 존재한다.
생존 경쟁에서 도태된 약한 몬스터들은 포식자들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양분이 되거나, 또는 위협을 피해 던전 밖으로 퍼져 나가 더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다.
레지아 계곡의 던전들은 그와 같은 과정을 오랜 시간 거친 탓에 위험도가 준 S급에 달한 상태였다.
때마침 스테치가 몬스터들을 한 번 크게 몰아낸 탓에 출몰도 뜸해진 터라, 그는 길이 완성되기 전까지 자신의 지식을 총 동원하여 던전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을 생각이었다.
“관측 결과는 어떻지?”
어느새 보초의 뒤까지 다가온 스테치가 묻자, 그는 스파이 글래스로부터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자신이 작성한 기록물을 가리켰다.
“틀림없습니다. 던전에 가까워질수록 땅울림과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하게 울려오고 있어요.”
그와 동시에 지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이상한 소리와 진동. 스테치는 흔들거리는 땅바닥을 노려보며 끙–하고 작게 신음했다.
던전으로 가는 다리를 놓기 시작한 지 벌써 이틀째.
몬스터의 습격 걱정 없이 인부들의 작업 속도는 빨라졌으나, 던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땐 눈치챌 수 없었던 여러 징후들이 하나둘씩 관측되기 시작됐다.
불규칙한 땅울림은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외에는?”
“하늘에 낀 먹구름을 빼고는, 별다른 이상 현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스테치가 위를 올려다보자, 돌무더기가 굴러 떨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먹구름 너머에서 번뜩이는 섬광이 눈에 들어왔다.
레지아 계곡에 있는 내내 비는커녕 물방울 하나조차 떨어지는 꼴을 본 적이 없었는데, 던전 근처에 오자마자 뇌운으로 가득 찬 하늘이라니.
스테치는 혀를 차며 보초의 등을 두들겼다.
“고마워, 계속 수고해 줘.”
가렛과 그의 부하들은 계곡에 주둔하는 동안 주변 생태 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는 스테치가 던전 안에 무슨 몬스터가 있는지를 추측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지진이라니? 감시초소를 뒤로하고 아지트까지 돌아가던 스테치는 진동음의 원인을 생각하느라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어떤 몬스터가 그런 현상들을 일으킬 수 있을까?
‘설마?’
스테치가 떠올린 것은 ‘락 이터’. 토양 물질을 섭취하여 금속 같은 외갑을 형성하고, 지저에서 군체 단위로 생활하는 데스웜의 일종이었다.
비록 놈들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스테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침 레지아 계곡은 락 이터가 좋아하는 희토류가 지천에 널려 있는 데다, 무분별하게 길을 뚫고 다니는 탓에 지진이나 산사태를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어쩌면 던전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락 이터가 뚫어 놓은 길 때문에 불안정해진 지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이런.’
스테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락 이터의 외갑은 어지간한 마법이나 금속류에 완전 면역이므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면 지금 준비를 서둘러야만 한다.
메멘토 모템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가렛의 아지트에 다다를 때쯤, 아지트 옆 공터에서 활 연습을 하던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콰광!
때마침 그녀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표적이 된 바위를 산산조각 냈고, 대량의 흙먼지가 계곡의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
말을 걸려다 말고 서서 잠시 엘레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스테치.
그녀도 스테치가 온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미 두 번째 시위를 당기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격에 집중했다.
스르륵.
스피라투스의 주둥이 끝 허공으로 먼지와 같은 미세한 입자들이 뭉치더니, 이윽고 기다란 화살을 형성했다.
화살? 아니, 그녀가 만들어낸 것은 나무로 된 얄팍한 화살이 아닌 강철같이 곧고 단단한 창에 가까웠다.
거기에 전방을 주시하는 눈은 이미 아므리타의 영향으로 새까맣게 물든 상태.
안면 전체를 뒤덮은 문신은 그녀가 오감을 한계까지 강화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후각과 청각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큰 역할을 했다.
파앙!
화살은 어딘가를 맞추는 일 없이,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갔다.
애초에 두 번째는 정확한 타겟을 겨누고 발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므리타의 조준 보정, 레코르다치오의 위력 증강, 거기에 무한에 가까운 강력한 투사체들을 스피라투스로 생성.
자유자재로 능력을 조합해서 사용하는 엘레나는, 이미 사수로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툭!
엘레나의 손에서 활이 떨어지자, 푸른 마력으로 형성된 활대와 시위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한눈에 봐도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찬 그녀는 그대로 비틀거렸고, 스테치는 아슬아슬하게 뛰어들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을 수 있었다.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그녀가 보완할 수 없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체력이었다. 스트라이더로서 엘프 중에서도 평균 이상의 체력을 갖춘 엘레나였으나, 다수의 마도구와 아티팩트를 장시간 동시 운용하는 데에는 여전히 충분치 않았다.
“역시 오래는 못 써먹겠네요.”
스테치의 품에 안긴 엘레나가 헐떡이며 말하자,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그렇게나 힘들어?”
“먹고, 일하고, 노는 것을 한꺼번에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누구라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엘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그녀는 곧 다시 스테치에게서 떨어졌다.
“……제 사정은 됐습니다. 바깥일은 잘 보고 오셨나요?”
“아, 응.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준비해야할 것이 떠올랐거든. 같이 갈래?”
스테치의 제안에 엘레나는 두말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말 것을 재차 당부한 스테치는 가렛에게 가더니, 잠시 후 조잡한 지도 한 장을 받아 돌아왔다.
계곡의 고저 차가 표시된 지도 위에는 수많은 X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바로 레지아 계곡 곳곳에 있는 폐광들의 위치였다.
“폐광이요?”
“응. 거기서만 얻을 수 있는 소재가 있거든.”
가렛의 아지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테치는 커다란 배낭 하나를 챙겨 곧장 출발했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낮 시간 동안, 가장 가까운 곳을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폐쇄된 갱도들을 순례하는 기나긴 일정이 시작되었다.
스테치는 폐광에 들어갈 때마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광물들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통로의 가장 구석지고 어두운 곳만 집중적으로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좀처럼 발견될 기미조차 없어 보였다.
그렇게 소득 없는 탐색이 계속 진행되던 도중.
마지막으로 들르게 된 폐광의 어두침침한 통로 안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던 스테치는 잠시 후 이상한 꽃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활짝 핀 보라색 꽃. 그러나 예쁜 색깔과 외견에도 불구하고 엘레나는 꽃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기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스테치는 얼굴에 화색을 띄우더니, 근방에서 동종의 꽃들을 몇 개 더 찾아내 배낭에 넣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털었다.
“원하시는 건 찾으셨나요?”
수통을 내밀며 엘레나가 스테치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말없이 자루에 손을 집어넣고 꽃을 꺼내 양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꽃술이 떨어져나가고 남은 것은 바로 동글동글한 씨 알맹이들. 그가 찾고 있던 ‘마정화’라 불리는 식물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은 특정 몬스터에게 있어 극독으로 작용했지만, 그렇게 써먹기 위해선 적절한 가공이 더해질 필요가 있었다.
“응. 아직 좀 더 찾아야 될 것들이 있는데, 그쪽은 나중에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야.”
마정화의 폐광 밖으로 빠져나온 스테치는 막 해가 떨어지기 시작해 노을이 진 능선을 한 번 흘끗 보고는 서둘러 아지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어둑해진 계곡의 숲과 연못 사이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애써 무시한 것은 덤이었다.
“왔냐.”
간신히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부르는 소리에 스테치는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댄 채로 한참을 기다렸는지, 가렛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스테치에게로 다가갔다. 얼굴에 그늘이 진 꼴이 딱 엘레나나 스테치만큼이나 피곤한 듯 보였다.
“무슨 일이야?”
“부하들 옆에서 닦달하고 재촉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라 나도 좀 움직였지. 힘들어서 말도 잘 안 나올 지경이다.”
늘어지게 하품한 가렛이 말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건 스테치도 마찬가지였으나, 몬스터 대비책을 위해선 미리 해 두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힘든 몸을 억지로 이끌어 아지트 중앙에 위치한 화로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는 물약을 부어 넣었다.
* * *
“엄청난 숫자네. 입구 근처인데도 몬스터들이 바글거릴 지경이니 원.”
엘레나와 함께 마지막으로 갑옷과 검을 점검하며 던전의 입구를 보던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리 복구 작업을 재개한지 약 사흘 후, 가렛과 스테치 일행은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주둔중인 거대한 던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던전에 가까워질수록 벌건 대낮에도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의 기세는 매우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대체로 던전들은 입구만 봐도 얼마나 오래 묵었는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는데, 특히 스테치의 눈앞에 있는 이 던전은 도저히 자연 발생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외형의 강철문을 입구로 두고 있었다.
“저 던전이 맞는 거지?”
“그래.”
스테치의 질문에 가렛이 대답했다.
보급 마차를 앞질러 매복하기 위해, 이 거대한 던전 건너편에 있는 지점에 다리를 놓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 때문에 근방에 주둔 중인 몬스터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이번 탐험을 반드시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제 와서 말하기엔 많이 늦었지만, 솔직히…… 저걸 보고 나니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어.”
“내가 그래서 그냥 여기 있으라고 했잖아.”
“걱정 마, 정말 위험할 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쳐 줄 테니까.”
고개를 저으며 당당하게 말하는 가렛에게 스테치는 피식피식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계곡으로 필요한 물자들을 조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다리 복구에 필요한 재료와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식량, 무기까지…… 때문에 가렛에게 있어 북부 보급품 마차들은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먹잇감이었다.
가렛은 조그마한 배낭을 등에 메고선 성큼성큼 던전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고, 스테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엘레나와 함께 그 뒤를 따라갔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가렛의 부하들이 응원의 함성을 질러댔다.
“힘내세요!”
쿠구구—.
가렛의 손가락 끝이 거대한 철문에 닿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묵직한 쇳소리를 흘리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비치는 바깥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던전 안쪽에 자리 잡은 심연으로부터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나와 스테치와 엘레나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