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락 이터
(59/203)
59화 락 이터
(59/203)
59화 락 이터
2021.11.29.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자동으로 굳게 닫히는 철문.
찰나의 빛조차 없는 어둠으로 사방에 휩싸이자 던전 탐험 경험이 그다지 없는 가렛이 그제야 횃불을 꺼내 드는 사이, 스테치와 엘레나는 능숙하게 제각각 반지와 랜턴으로 빛을 밝혔다.
‘…….’
왠지 모르게 기존의 던전이랑은 사뭇 다른 분위기에 스테치가 살짝 긴장하며 평소처럼 《패스파인딩》을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지아 계곡의 던전은 준 S급으로 스테치가 지금껏 도전해온 그 어떤 던전보다도 위험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던전 탐험가 길드가 설립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던전들의 위치와 각각의 위험도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었다.
죽음의 에너지인 사기를 원동력으로 돌아가는 던전의 특성상, 풋내기 모험가가 자기 주제에 맞지 않는 던전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아 죽어 나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탐험가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D급부터, 개인의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탐사하기 힘든 C~B급, 어느 정도의 운도 필요한 A급까지.
던전 키퍼를 처리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D~A급의 던전에 들어간 모험가들의 생환율은 평균 65% 정도는 된다고 한다.
하지만 S등급은?
기본 생환율 15%에, 던전 키퍼까지 맞닥뜨릴 경우엔 그마저도 1% 미만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완전 답파를 위해선 그야말로 어지간한 운과 실력, 그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 부탁한다.’
『답지 않게 왜 그래? 걱정 말고 나만 믿어.』
메멘토 모템이 물었지만 스테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뒤에서 스테치를 따라가던 가렛은, 무의식중에 자꾸만 망토 안 홀더에 걸려 있는 단검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경험의 부족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저 아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브라이언(스테치)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동료인 세레나(엘레나)는 어떨까.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사실 그녀도 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위험도의 던전에 들어온 것 치고는 지나치게 길이 깔끔했다.
지금쯤이라면 몬스터나 함정 하나둘쯤은 맞닥뜨려야 정상인데, 왜 이렇게나 조용한 걸까?
앞장서던 스테치가 한 발짝 내딛는 순간, 때마침 우측 벽면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스테치, 오른쪽이다!』
오감을 총동원해 전방을 살피던 스테치의 머릿속에서 메멘토 모템의 경고가 들려오자, 그는 눈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바위벽의 균열과 무늬를 따라 교묘하게 위장된 마법진이 마력으로 번뜩이는 순간, 스테치는 자신의 은연중에 품어온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음을 실감했다.
매직 트랩.
탐험가들의 생환율을 단숨에 낮춰 버리는 데에 한 몫 한 최악의 요인.
발동하기 직전까지의 마법진은 마력의 움직임이 일절 없는 한낱 그림일 뿐이기에, 마력의 흐름을 읽어 내는 엘레나의 능력으로 매직 트랩의 위치를 미리 감지할 수는 없었다.
콰과곽!
망설임 없이 뒤로 몸을 날린 스테치는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일행들을 넘어뜨렸고, 마법진 중심에서 뻗어져 나온 굵직한 석순의 첨단부가 일행이 서 있던 위치를 관통하여 반대쪽 벽에 꽂혔다.
간신히 피했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첫 번째 마법진에 연동하듯 통로를 빼곡히 뒤덮고 있던 수십 개의 또 다른 진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했기에 망정이지…….’
일반적인 경우, 이런 함정을 미리 알고 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법 회로도나 마법진에 능한 전문가의 눈이나, 특수하고 희귀한 마법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그래서 스테치는 던전에 들어오면서부터 한 가지 도박과도 같은 결단을 내렸다.
바로 메멘토 모템의 ‘눈’을 믿는 것.
무언가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게 메멘토 모템의 기본 능력이었기에, 스테치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감지를 부탁해 두었던 것이다.
꾸드득-.
비틀어 움켜쥔 스테치의 주먹이 쩍 벌어지며 앞으로 향했다.
현재의 그는 직면한 위기 상황으로 인해 발동된 《오토매틱 리플렉스》로 반사신경이 강화되어, 다음 수를 생각해 볼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긴 상태.
그런 스테치가 찰나의 순간 함정들을 신속하게 파훼하기 위해 취한 행동은 다음과 같았다.
바로 눈앞의 장애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
“《에어 버스트》!”
퍼버벙!
압축된 세 개의 공기 구체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석순을 박살 내고 벽에 닿자, 마법진이 그려진 바위 표면 전체에 균열을 일으켰다.
접촉하는 모든 것들을 죄다 부숴 버리는 무자비한 난기류 덩어리들이, 채 발동하기도 전인 마법진들을 싸그리 망가뜨리며 내벽을 타고 통로 아래쪽까지 굴러 들어갔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흙먼지에 스테치는 망토 끝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어두운 길 저편에서는 올바르게 마법진들의 마력이 《에어 버스트》에 의해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후우…… 죽는 줄 알았네.”
짐짓 태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스테치의 말투에, 충격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가렛은 그제서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티팩트를 써서 피한다는 생각도 못 했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가볍게 넘기는 스테치의 모습은 충분히 이상해 보였다.
사실,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놀란 이는 가렛이 아닌 엘레나였다.
아무리 스테치가 던전 전문가라지만, 아티팩트의 힘으로 더더욱 예민해진 그녀보다 더 빠르게 반응한다니?
잠시 후, 나머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스테치에게 메멘토 모템이 말했다.
『급하게 생각해낸 방법 치고는 꽤 효과적이었어. 하지만 그렇게 매번 마력을 소모해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하지만 이것보다 매직 트랩을 해체하는 더 좋은 방법은 없어. 다른 모험가들이라도 나랑 별반 다를 바 없을걸?’
실제로 지금껏 S급 던전에 도전한 모험가 파티는 제법 많았으나, 이 매직 트랩에 대해 제시된 명쾌한 파훼법은 그다지 없었다. 마법진을 먼저 발견해서 형태를 물리적으로 훼손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길을 우회하는 수밖에.
『매직 트랩의 기본 원리는 생명체의 에너지를 탐지하고 발동하는 거야. 생명 에너지 자체를 안 보이게 만들어 버리면 트랩이 발동될 이유도 없는 거지…… 자, 보라고.』
푸확!
메멘토 모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중심으로 어둡고 찐득한 기운이 전신을 뒤덮었고, 스테치는 급작스레 밀려오는 현기증에 잠시 흔들거렸다.
“우왁, 뭐야?!”
스테치의 모습에 엘레나와 가렛은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었다.
마력에 둔감한 가렛마저 치밀어 오르는 불쾌한 느낌에 뒷걸음질 칠 정도였지만, 반면에 스테치는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 속에서도 메멘토 모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선 자그맣게 탄성을 내뱉었다.
커스 아우라.
메멘토 모템의 기본 어빌리티 중 하나인 커스 아우라는, 저주받은 아이템들로부터 사기와 저주의 힘을 끌어내 몸에 두르는 능력이었다.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충분한 농도의 사기로 덮어씌운다면, 매직 트랩의 탐지에도 걸리지 않을 터. 아우라를 두르고 있는 동안은 저주의 힘이 시전자인 스테치도 약화시켰으나, 함정에 걸려 일일이 힘을 빼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스테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다른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비주얼이 좀 꺼림칙한 건 미안하지만, 함정들을 무사히 통과하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어.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
정말 이런 조치로 함정을 피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가렛이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그 효과는 발군이었다.
앞서가던 스테치가 발견한 매직 트랩들은 코앞까지 다가가도 일절 반응하지 않았고, 그걸 본 가렛과 엘레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몇 시간 후.
밟으면 멀쩡한 바닥을 무너뜨려 푹 꺼지게 만드는 진. 던전의 다른 공간으로 날려 버리는 진.
온갖 마법 함정들을 상처 하나 없이 말끔히 통과해낸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구조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건…….”
엘레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통로를 바라보았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길을 끊으며, 횡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터널이 별안간 나타난 것이었다. 비교적 깔끔하게 포장된 던전 특유의 통로와 달리, 부자연스럽게 뚫린 터널의 형태는 던전 탐험가인 스테치의 눈에 매우 어색해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군. 락 이터의 군집이 이동하면서 뚫어 놓은 길이 분명해.”
주변에 함정이 없다는 걸 확인한 스테치는 커스 아우라를 거둬들이고, 끊긴 계단 끝에서 훌쩍 뛰어내려 터널 밑바닥에 착지했다.
락 이터의 외갑이 땅바닥을 헤집어놓고 남긴 특이한 패턴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불행스럽게도, 《패스파인딩》의 궤적이 향하는 방향은 계단에서 꺾여 터널의 안쪽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군집체들의 이동 경로로 추정해 보건데, 이 궤적을 그대로 따라갔다간 락 이터 무리와 마주칠 것은 뻔했다.
“락 이터? 어제 네가 말했던 그 바위 구렁이 놈들 말이야?”
바위 구렁이라니…… 스테치는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모두 무기 꺼내들어. 던전 중심부까지 가려면 터널을 따라 가야 하니까.”
그 말은 락 이터들이 우글거리는 소굴로 직행하겠다는 뜻 아닌가? 농담인지 뭔지 모를 소리에 가렛은 갸우뚱거렸지만, 잠자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자신이 주제넘게 나설 일이 아니었다.
각자가 무기를 꺼내 준비하는 사이, 스테치는 배낭을 열어 수통 하나를 꺼냈다.
단단히 밀봉된 뚜껑을 열자 알싸하게 퍼지는 시큼한 냄새에 스테치는 잠시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엘레나와 가렛에게 말했다.
“이건 마정화의 씨앗에서 추출해낸 액이야. 쉽게 말해서 금속이나 광물을 녹이는 용해액이지.”
마정화는 토양의 미네랄이나 금속을 흡수하기에 용이하도록, 그것들을 녹일 수 있는 성분을 씨앗에 품고 있었다. 같은 계곡의 희토류를 먹고 자란 락 이터에게 있어, 이보다 강력한 독은 없을 것이다.
“각자 무기에 이 액을 충분히 발라둬…… 무기가 녹는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이곳 토양과 다른 재질의 물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
그 말을 들은 가렛은 단검 두 개를 뽑아 내밀었고, 스테치는 수통을 뒤집었다.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와 날을 뒤덮자, 가렛은 마치 요리사처럼 단검날을 서로 비벼 액체를 얇게 날 표면 위로 펴 발랐다.
“여기.”
스테치의 손짓에 엘레나가 스피라투스를 내밀었고, 그는 추출액을 용 주둥이 안에 조금 부어 넣었다.
이것으로 그녀가 만드는 화살에는 추출액 성분이 더해지게 되었다.
“그거면 락 이터의 단단한 외갑도 버터처럼 뚫어 버릴 거야. 하지만 명심해. 효과는 쓰면 쓸수록 줄어들어! 만약 락 이터 떼와 접촉하게 되면 공격은 최소로 하고, 돌파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생각해.”
마지막으로 스테치는 추출액을 페네트레이터의 검신 위에 콸콸 쏟은 후, 텅 빈 병을 옆으로 휙 던지고선 터널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몬스터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어서 그런지 터널은 가끔 아래나 위로 꺾여 있거나, 두 터널이 교차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동하는 과정에서 겪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패스파인딩》의 궤적은 변함이 없었다.
툭.
한참을 걸어가던 엘레나의 발치에 무언가가 채여 날아가자, 그녀는 랜턴을 들어 굴러다니던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보인 것은 부러져 나간 뼈마디.
엘레나의 시선이 바닥에서 앞으로 향하자, 스테치의 등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뼈 더미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저리 흩어져 나뒹구는 두개골과 흉골들을 보며, 엘레나는 왜 스테치가 락 이터 이외에 다른 몬스터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던전의 상위 포식자는 녀석이었으니까.
쿠르르–!
“어어?!”
“왔다!”
미약하게 울려 퍼지던 진동과 소음은 순식간에 일행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커졌다.
던전 밖에서부터 들어왔던 소음의 원흉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 중이라는 신호를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콰광!
빠른 속도로 방어 대형을 구축한 그들의 머리 위에서, 천장을 뚫고 거대한 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