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망령
(62/203)
62화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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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망령
2021.12.02.
두 키퍼는 물론이고 가렛과 엘레나도 멈칫할 정도의 굉음.
어느 틈엔가 대공동의 입구 쪽으로 뻗어진 스테치의 손에서는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뒤, 뚫린 입구로부터 락 이터 떼가 쏟아져 들어왔다.
“저, 저건……!”
“세레나를 피신시켜!”
스테치의 외침에 마지막 얼음 벽을 통과해 낸 가렛은 곧장 엘레나에게로 달려갔다.
몸 이곳저곳에 서리가 끼어 덜덜 떠는 그녀를 끌어안은 후 망토를 둘러 은신하자마자, 눈앞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기 위해 직선으로 이동하던 락 이터 무리가 그대로 얼음 인간을 덮쳤다.
제 아무리 던전 키퍼일지라도 어지간한 마법조차 통하지 않는 락 이터들의 공세를 단박에 뿌리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렛과 엘레나는 난장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엘레나는 아스트랄 도메인으로 들어갔을 때의 감각이 익숙지 않았기에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
얼음 인간에게로 고개를 돌린 화염 인간이 스테치에게서 떨어지려 하자, 그는 화염 인간의 멱살을 붙잡아 자신에게로 잡아당겼다. 텅 빈 면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눈깔 돌리지 말고 똑바로 봐! 네 상대는 나라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화상이라 그랬다던가? 맨손으로 화염 인간을 붙잡은 스테치의 손이 장갑채로 타들어 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한껏 뒤쪽으로 당긴 뒤 내질렀다.
빠악!
몸이 공중으로 들릴 정도의 괴력.
부스트로 강화된 신체 능력에 덕분에 강철도 우그러뜨릴 수 있게 된 스테치는 키퍼에게도 먹힐 위력의 타격을 연달아 날렸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주먹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세를 이어 나가는 스테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안면에 무릎을 꽂아 넣고, 내려간 턱에 그대로 어퍼.
몸을 사리지 않는 공격에 화염 인간은 반격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계속 얻어맞았다.
촤악!
휘둘러진 화염의 검에 의해 통째로 떨어져 나간 스테치의 팔 한 짝. 하지만 그마저도 메멘토 모템의 빛이 번쩍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전부 재생되었다.
『머뭇거리면 바로 불 날아온다! 계속 밀어붙여!』
“하아아아!”
스스로의 힘과 불길에 의해 손가락뼈가 살을 찢고 새하얗게 드러날 때까지도 공격을 늦추지 않는 스테치. 급기야 그는 화염 인간의 안면을 두 손으로 비틀어 잡았다.
쩌저적!
손바닥에서 시전된《아이스 웨이브》에 의해 머리를 기점으로 상반신 전체가 전부 얼어 버린 화염 인간. 그 위로 어김없이 날아온 킥에 의해 얼음이 박살 나며 화염 인간은 저 멀리 날아가 벽에 꽂혔다.
쏟아지는 흙먼지와 바위 파편들을 뒤집어쓰는 화염 인간.
그러나 녀석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천천히 몸을 털고 일어나더니 이전보다도 한층 더 강한 불길을 뿜어냈고, 스테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역시 뭔가 이상해.』
‘…….’
제아무리 던전 키퍼일지라도 방금과 같은 데미지를 받아내고서 100% 멀쩡할 수는 없다. 그런데 녀석은 어째서 저렇게 여유만만해 보이는 걸까.
정면에서 밀려오는 열기에 숨이 턱 막힌 스테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헐떡이다가 문득 생각했다. 얼음으로 뒤덮여 있던 화염 인간. 2체로 분리된 이후로 계속해서 높아져 가는 녀석의 온도.
때마침, 락 이터들과 치닥거리던 얼음 인간을 무심코 바라본 스테치의 뇌리에서 한 가지 가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설마?’
스테치는 다가오는 화염 인간에게 가만히 손을 뻗은 뒤, 《파이어볼》을 발사했다. 거대한 화구가 빠른 속도로 키퍼에게 날아가 명중하려는 순간,
“!”
지금까지의 느긋한 태도와는 다르게 놈은 사력을 다하여 그것을 피해냈다.
난데없이 빙결계 주문이 아닌 화염계 주문이 날아오자 당황한 듯 보였다. 《파이어볼》이 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본 스테치는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냉각제였던건가!』
메멘토 모템 또한 눈치챘는지 스테치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지금껏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덩어리의 키퍼가 자신과 전혀 상극으로 보이는 얼음 인간의 체내에 있었던 이유. 그리고 끝을 모르고 상승하는 온도. 얼음 인간은 처음부터 화염 인간의 체온을 낮추게 만들기 위한 ‘냉각제’였던 것이다.
모든 인식이 역전된 순간, 스테치는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판단해낼 수 있었다.
“…….”
푸확!
스테치가 뒤이어 던진 불덩이가 다시 피하려던 화염 인간의 몸에 적중했고, 화염 인간은 더해진 열기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전투를 개시한 이후론 처음 보는 생소한 반응.
스테치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굴러갔다.
아마도 녀석의 약점은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신체의 열. 그의 예상대로라면 키퍼를 이대로 얼음 인간과 분리시켜둔 채 온도를 강제로 높여주었을 경우, 자멸할 가능성이 있었다.
거기까지 확신한 스테치의 이빨에서 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오래 갈 필요도 없이 바로 처리해 주마! 커스 디바우러!”
팔찌 하나가 또 먼지로 사라져 가고, 스테치는 화염 인간에게 주문을 날렸다.
“《인페르노》!”
《파이어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초고온의 불길이 화염 인간을 향해 시뻘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휘몰아쳤다. 어찌나 효과적이었는지, 화염 인간은 불꽃으로 곧잘 반격하던 좀 전과는 다르게 스테치의 주문 앞에서 맥을 못 추었다.
그 사이, 락 이터들과 한참을 엎치락뒤치락하던 얼음 인간이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얼음으로 된 기둥들이 얼음 인간을 중심으로 둥글게 치솟아 락 이터들을 날려 버렸고, 얼음 인간은 하늘 높이 떠오른 락 이터 하나하나에게 고드름 창을 쏘아 보냈다.
콰각!
창에 꿰이자 급속도로 얼어붙으며 다시 떨어지는 락 이터들. 마법에 강한 놈들조차 키퍼를 상대로는 역시 시간 벌이 이상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얼음 인간도 지속적인 락 이터들의 공격으로 신체 여기저기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스테치가 회심의 미소를 짓자, 화염 인간은 바닥을 두 주먹을 하늘로 치켜 올리더니 그대로 지면을 내리쳤다.
“뭐……!?”
섬광과 함께 터져 나오는 불기둥. 뒤늦게 화염 인간에게 달려들었지만, 폭압으로 날아간 스테치가 사그라드는 불기둥 너머로 본 것은 얼음 인간에게로 달려가는 화염 인간이었다.
『안 돼!』
“가레에엣! 놈이 얼음 껍데기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아!”
바닥에 착지한 스테치가 가렛에게 외치자, 엘레나를 보살피던 가렛은 얼음 인간에게로 뛰어가는 화염 인간을 보았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피라투스를 집어 들었다.
가렛이 원하는 사이즈로 변형된 아티팩트는 거대한 구경의 탄을 장전하여 제자리에 서 있던 얼음 인간에게로 발사했다.
투쾅!
탄환에 얻어맞은 충격으로 날아가 화염 인간과의 거리가 또다시 멀어져 버린 얼음 인간.
몸에서 점점 더 많은 불꽃과 연기를 발산하던 화염 인간은 자신을 방해한 가렛을 노려 화염 덩어리들을 집어던졌다.
“이런 씨……!”
현재 가렛은 무리해서 스피라투스를 조작한 탓에 반동으로 팔 한 짝이 나간 상태.
타른카페로 엘레나와 함께 은신하기엔 도무지 제때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엘레나가 죽기 살기로 불덩어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스……!》“
얼굴을 뒤덮은 문신이 빠르게 오른팔로 이동하며 뱀처럼 휘감아, 마법진을 구성하는 복잡한 회로 형태로 변형됐다.
체내를 마구잡이로 흘러가던 마력이 회로를 따라 압축되고 정련되어, 의도했던 것보다 한층 더 강력한 형태로 발현되었다.
《레인포스드 액티브 스킬 : 거스트 윈드 => 훨 윈드.
휘몰아치는 선풍으로 적들을 휩쓸어 버립니다. 낮은 확률로 범위 내의 적들이 일시 무력화됩니다.》
팔의 마법 회로를 따라 허공에 떠오른 황금빛의 문양.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은 단순한 돌풍이 아닌 회오리바람이었다.
불덩어리들을 꺼트리고 나아간 바람이 이내 화염 인간마저 날려 버리자, 엘레나는 정작 그 결과에 놀라워했다.
아티팩트의 사용에는 이제 완전히 통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푸쉬이이–.
널브러진 화염 인간의 몸은 무서운 기세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녀석을 붙잡아둘 수 있다면 자멸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
몸을 이상한 각도로 뒤틀며 눈에 띄게 괴로워하는 화염 인간. 녀석을 따라잡은 스테치는 타오르는 화염 인간의 흉부를 부츠 발로 짓밟고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뒤, 머리통에 짧고도 강한 주먹 한 방을 때려 넣었다.
퍼억!
“뒈져라아아!”
양손을 모아 초근접거리에서 발사한 《인페르노》의 불길이 스테치와 화염 인간 양측을 모두 덮쳤다.
화염 인간이 자유로운 양팔로 스테치의 정강이를 붙잡아 태워 보기도 하고, 똑같이 불을 발산하는 등의 발악을 했다. 그러나 스테치는 전신이 타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재생하며, 저항하는 키퍼에게 끊임없이 불꽃을 끼얹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광기에 치달은 인간 그 자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일반인이라면 지금쯤 미쳐 버렸겠지만, 스테치는 극한까지 자극된 통각으로 오히려 불길이 포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덜그럭.
스피라투스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얼음 인간이 얼어붙은 관절을 삐걱대며 스테치의 뒤로 다가왔다.
스테치의 반응은 놈의 움직임을 눈치채고도 흘끔 쳐다보는 것에 그쳤는데, 이미 냉각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의문인 데다 몸은 이미 주위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툭!
스테치에게로 뻗은 얼음 인간의 팔이 바닥에 떨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땅에 닿기도 전에 액체가 된 놈의 신체 덩어리로 집중되었다.
이내 팔을 시작으로, 녀석은 무릎과 허리가 무너져내리더니 삽시간에 작은 물웅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화염 인간의 몸에서 끓어오르던 열기도 거짓말처럼 훅 사라져 버렸다.
한계까지 자신의 몸을 연료 삼아 태우던 화염 인간의 흉부는 스테치가 짓누르는 힘에 의해 허무하게 푹 꺼져 들어갔고, 나머지 부분들도 목탄처럼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
잿더미만 남은 키퍼의 모습을 확인한 스테치는 그제야 비로소 안도감 섞인 한숨을 토해 냈고, 엘레나는 마법으로 가렛의 팔을 치료해 준 뒤 그와 함께 스테치에게로 다가갔다.
“……좀 전에는 당신이 진짜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앞으로 다시는, 다시는 이딴 무모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거칠게 쏘아붙이는 엘레나에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스테치.
시종일관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던 가렛은 비로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키퍼와의 싸움이 끝났다는 것이 여태 실감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제 뭘 하면 되지? 아티팩트를 가지러 가면 되나?”
그 말에 스테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아티팩트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 보이지 않자,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본 그는 바닥에 소복이 쌓인 키퍼의 먼지와 재 사이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표면을 덮고 있던 잿가루를 살살 털어 내자, 흑요석처럼 새카만 빛을 발하는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오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아티팩트.
“이번 던전의 아티팩트는 키퍼가 품고 있었나 보군.”
“그게 아티팩트야? 좋아, 그럼 챙겨서 여길 빠져나가자. 난 여기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가렛의 불만 어린 재촉에 스테치는 말없이 검은 오브의 위로 남은 손을 얹었다.
이 물체가 아티팩트라는 사실은 처음 만지자마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이한 이질감도 함께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뭐지, 이건?’
일반적인 아티팩트는 만지자마자 그 이름과 능력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런데 이 오브를 만지고 스테치가 느낀 것은, 몸서리가 절로 처질 정도로 끝없는 공허와 냉기였다.
“윽!”
심장에 박힌 단검처럼 파고드는 차가움에 스테치는 오브에 집중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이 아티팩트는 뭔가 이상하다. 한 마디로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스테치가 흡수해온 아티팩트와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어째 좀 느낌이 이상한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메멘토 모템에게 말을 걸던 스테치는 문득 자신의 파트너조차 이상해졌음을 감지했다.
평소라면 혼자서 신나게 나불대야 할 친구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스테치가 다시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 갑자기 오브 주변으로 무형의 에너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
일반적인 마력과는 달리, 만지기만 해도 불길함이 느껴지는 검붉은 빛의 마력. 엘레나와 가렛은 물론이고, 스테치마더도 그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이것은 분명…… 그가 커스 이팅을 시전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스테치의 직감이 미친 듯이 위험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엘레나와 가렛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스테치는 반지를 향해 외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침묵이었다. 일부러 대꾸를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것인지. 그리고 스테치가 더 행동하기도 전에, 검붉은 마력은 그의 반지로 빨려들어갔다.
마력을 흡수할수록 심해에 잠긴 것처럼 갑자기 숨통을 죄어오는 압박감. 스테치는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컥…….”
이건 아니다.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놀란 엘레나와 가렛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잠시, 정신이 혼미해진 스테치의 시야는 점점 어두워졌다.
춥고, 어둡고, 졸리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까만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