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회상 (63/203)


63화 회상
2021.12.03.


쏴아아–.

늦은 시각, 드물게 내리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레지아 계곡을 적시고 있었다. 평소라면 밤마다 나타나는 몬스터들도 그날만큼은 이례적으로 조용했다.

“휴우.”

잠을 자기는 커녕, 두 눈 멀쩡히 뜬 가렛과 그의 부하들은 침울하게 탁자 위 싸구려 양초 불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사흘에 걸쳐 만들어 낸 훌륭한 다리도 있고 하니 지금쯤 신나게 자축회를 열 법도 하건만, 이틀이 지난 지금도 만들어진 다리가 실제 쓰이긴 커녕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

벽에 기대어 술잔만 까딱까딱 기울이던 가렛은 부하들을 뒤로 한 채 잔을 챙겨 어디론가 향했다.

부하들의 시선이 그의 등으로 꽂혔으나, 아무도 그를 붙잡진 않았다.

벽에 걸린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발밑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춤을 췄다.

잔뜩 오른 취기에 통로를 따라 걸어가는 가렛의 발걸음이 살짝 꼬이긴 했지만, 요령 좋게 다시 일어선 그는 굽이진 길목을 이리저리 꺾어 들어가 어느 방 앞에 도달했다.

문턱 틈새로 어른거리는 불빛을 본 가렛은 먼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이윽고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가렛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문을 열었고, 의자에 앉아 있던 여성은 그를 알아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면 부족으로 꽤 수척해진 그녀는 확 밀려오는 술 냄새에 곧 얼굴을 찌푸렸다.

“또 술입니까?”

“지금 그게 문제인가…… 뭣하면 아가씨도 한 잔 하시지 그래?”

누가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였으나, 휴식을 취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가렛이 흔드는 잔을 거부한 엘레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스테치 아텔리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평온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대조되게 그를 돌보는 엘레나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깨어나긴 할까?”

술에 절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차분한 목소리로 가렛이 물었으나, 엘레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던전 키퍼를 쓰러뜨리고 아티팩트인 검은 오브를 입수했던 그날, 아티팩트를 흡수한 그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벌써 지금으로부터 5일 전. 가렛이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고는 있지만…….”

인간인 가렛과는 달리, 엘프인 엘레나의 눈에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스테치의 체내를 휘젓고 다니는 검붉은 마력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스테치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 이마저도 첫날에 비하면 상당히 나아진 수준이었으나, 그가 언제 깨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엘레나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쉰 가렛은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도 알고 있겠지만, 계획을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어.”

그가 말하는 것은 베네지아의 보급 마차에 관한 이야기였다.

5일이나 지난 지금, 이 이상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스테치를 기다린답시고 계획을 연기했다간 보급품을 강탈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 터였다.

가렛으로선 스테치를 이곳에 두고 가든 데려가든, 어느 쪽을 골라도 곤란하긴 매한가지였다.

스테치는 보급 마차를 지키고 있을 병사들을 제압하기 위한 최고의 전력으로, 계획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엘레나는 아래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회복을 앞당길 만한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부터 그 방법을 사용해 보려던 참이었어요.”

“엉,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면 왜…….”

더 일찍 시도해 보지 않았는가? 가렛이 뒷말을 애써 삼키긴 했지만, 엘레나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차분히 가렛에게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설명했다.

“누구도 지금껏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전례도 없고, 따라서 해결책은 아무도 모르죠. 이런 상황에서 제가 섣불리 움직였다간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바로 그래서 제가 가만히 있었던 겁니다.”

엘레나는 가만히 손을 쥐락펴락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가능하다면 상태가 자연히 호전되기를 바랐습니다만, 이대로라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겠죠. 그래서 오늘부턴 제가 고안해 낸 방법을 사용해 회복을 도와 보려고 합니다.”

가렛은 턱 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저 친구는 아가씨가 책임지고 깨워 줘. 그동안 나는 마차를 가져와서 녀석을 싣고 갈 준비를 할게.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한다면 제 때에 보급 마차 무리를 덮칠 수 있을지도 몰라.”

엘레나가 그 말에 동의하자마자, 가렛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두 사람만 남은 방. 엘레나는 상의를 벗어 복장을 편하게 하고, 온 정신을 문신 쪽으로 집중했다.

애초에 스테치에게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티팩트에 담겨 있던 마력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던 탓에, 그의 반지가 이를 한번에 완벽히 흡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지가 남은 잉여 마력도 마저 흡수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스테치가 정상화되기 위해선 또 얼마나 걸릴지…….

이 검은 마력을 빠르게 억누르고 다스리기 위해선 그와 상반되게 깨끗하면서 순도 높은 마력을 대량으로 투입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때처럼…….’

엘레나의 오른팔 위에 그려진 문신이 재배열되며 마법 회로를 형성했다.

그녀가 자신의 마력을 회로 안으로 천천히 흘려 넣자, 푸른빛의 마력이 회로를 순환하며 황금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팔뚝 위에는 어느새 회로를 따라 떠오른 금색의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던전에서 싸우는 동안 엘레나가 자기도 모르게 발동시킨 문신의 새로운 활용법이었다. 이렇게 만들어 낸 마력을 스테치에게 직접 주입하면 회복 과정을 지금보다 배 이상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 터.

두근–두근–.

스테치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놓고 한참동안 마력을 불어넣던 엘레나는, 문득 머리가 차갑게 식어 있는 것을 느꼈다.

남는 왼손으로 이마를 훑자 그녀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많은 땀이 묻어 나왔다.

‘……페이스 조절에 신경 써야겠군.’

그러나 엘레나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며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다.

* * *

꿈.

어둡고도 차가운 공허의 바다를 유영하며, 스테치는 하염없이 꿈을 꾸고 있었다. 그저 바람과 수류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며…….

‘여긴 어디지?’

‘내 이름은 뭐였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이따금 머릿속에서 물거품이 되어 떠오르던 의문들은, 곧 바람 앞의 한 줌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에게 빈껍데기가 되기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나는…… ㄴㅏ는…… ㄴ……?’

찰나의 시간이 흐를 때마다 모든 것들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나뉘어져 갔다.

그의 상념도, 지식도, 감정도. 이윽고 자신이 쓰는 언어조차 망각해 버리기 일보 직전, 두 눈 꾹 감아 가려진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새하얗게 텅 빈 머릿속으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수많은 기억들이 홍수와 같은 기세로 쏟아져 들어왔다. 무한한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찬 순간, 스테치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악!!”

계속되는 아픔과 비명. 그러나 그것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 * *

짹짹-.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이, 집안 한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어느 꾀죄죄한 몰골의 사내에게로 내리쬐고 있었다. 바닥에 그려진 복잡한 원형진, 사방에 흩어져 있는 수백 장의 복잡한 공식 투성이 종이 문서들. 누군가 보면 폭풍이라도 지나갔나 하고 착각할 정도의 난장판이었다.

“으음…….”

이따금 들려오는 새 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잔뜩 충혈된 눈을 비비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찡그린 채 손끝으로 더듬어 의자를 붙잡은 사내는 그 위에 걸터앉고선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라…… 그러니까, 내가 어제 어쩌다가 잠이 들었더라?’

아침이라 그런지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그는 왜 자신이 자기 집 안에서 쓰러져 있었는지를 떠올리느라 끙끙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기에, 사내는 하는 수 없이 오늘도 변함없는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떨어져 있던 종이들을 하나씩 갈무리했다.

“어?”

사내가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세 개의 인영을 발견한 것은 그러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목각인형 마냥 말없이, 꿈쩍도 하지 않고 두 눈만 끔뻑이며 서 있는 세 명의 남녀들. 그들을 보는 순간, 사내는 지난밤 그가 지쳐 잠들기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을 순식간에 전부 떠올랐다.

세 사람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를 한 템포 늦게서야 지각한 사내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해, 해냈다! 정말로 내가 성공했어! 드디어!”

사내가 피우는 소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 세 사람.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기대에 찬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세 남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인간 남성, 드워프 남성, 엘프 여성.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던 사내는 기어이 생명을 창조해 내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셋은 역사에도 기록될 만큼, 그의 위대한 업적 그 자체였다.

자신의 피조물들을 바라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던 사내는 문득 그들의 코앞에서 손가락을 몇 번 튕겨 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아하, 그렇군! 아직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으니 개인으로서의 지각 능력이 활성화하지 않은 거야!”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혼잣말로 신나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사내는 크게 헛기침을 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며칠 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수염이 수북이 자라난 자리를 긁적이며,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 살아갈 이들에게 있어 이름과 성격의 부여는 매우 중요했다.

“정했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인 그는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을 세 사람에게로 뻗었다. 새하얀 마력의 빛이 손가락 끝으로 집중되자, 사내는 그대로 손을 휘적여 무언가를 허공에 새겨 넣었다.

첫 번째는, 엘프 여성에게로.

“너의 이름은 ‘데스트라’. 자애로운 마음을 지닌 엘프다.”

스르륵.

데스트라로 이름 붙여진 엘프에게로 마력의 빛이 흘러 들어가자, 생기 없는 그녀의 눈에 빛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호흡해 보는 사람 마냥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허억……!”

그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는, 드워프 남성에게로.

“너의 이름은 ‘엑스턴’. 굳세고 올곧은 심지의 드워프다.”

데스트라에 이어 ‘다시 깨어난’ 엑스턴은, 세상을 접하게 된 충격으로 신음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헐떡였다. 역시 이 공정이 끝나기 전까진 정상적인 사고조차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차례대로 그들을 둘러보던 사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피조물에게로 향했다.

세 번째는, 인간 남성에게로.

“너의 이름은 ‘카인’. 강인한 의지를 소유한 인간이다.”

“!”

카인 또한 다른 두 피조물처럼 비틀거렸으나, 그만큼은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텨 냈다.

과연, 강인한 의지를 가진 인간다운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모든 피조물들을 일깨워 낸 사내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넘쳐나는 자랑스러움과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을 환영한다. 내가 너희들을 만들어 낸 주인이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사내의 앞으로 세 사람이 부복했다.

“우리의 주인이시어.”

“존함을 가르쳐주십시오.”

“내 이름?”

사내는 자신의 피조물들의 질문에 멋쩍은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대답했다.

“내 이름은…….”
 

16564294813553.png

1656429481361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