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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비밀 (64/203)


64화 비밀
2021.12.04.


평소와 같이 화창하고 맑은 어느 날.

머리카락처럼 불그스름하고 육중한 갑옷을 걸친 남성 하나가 성큼성큼 숲이 우거진 동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갑옷과 대검의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그 발걸음은 놀랄 만치 가벼웠으며, 그 와중에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다.

“오래간만이군. 촐랑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성은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성역이라 불리는 이 동산에는 어느 누구도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텐데, 대체 누가 감히 그에게 말을 건넨단 말인가?

남성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키가 정확히 그의 반절보다 조금 못 미치는 꽁지머리의 금발 드워프 하나가 서 있었다. 거의 자기 몸만 한 사이즈의 기계식 건틀렛을 양 팔에 끼운 그 모습에 남성은 피식 비웃으며 대꾸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물건은 들고 다니지 말라고 아버지가 가르치지 않았냐, 똥자루?”

“거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오늘은 누구 턱주가리가 먼저 날아가는지 한 번 볼까?”

드워프가 활짝 웃으며 건틀렛을 위협적으로 절그럭거리자, 남성은 등에 멘 대검을 풀어 붕붕 휘둘러 보였다.

“그거 좋지. 집에 들르기 전에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그 말버릇을 고쳐주마.”

화악!

한창 눈을 부라리고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창이었다.

싸움을 중단시킨 이는 다름 아닌 푸른 머리카락의 엘프 여성. 그녀는 어린아이들을 대하듯 두 사람 모두에게 소리쳤다.

“카인, 엑스턴! 아버지의 영역 안에서 뭐하는 짓이야? 싸우려거든 최소한 어디 안 보이는 곳에 가서 하던가!”

그러자 더 거세게 치고받을 것 같던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마냥 역으로 그녀에게 면박을 주었다.

“어차피 진짜 싸우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래, 데스트라. 너야말로 왜 볼 때마다 우리를 몰아세워?”

갑작스런 역공이 쏟아지자 데스트라는 성숙한 외견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볼을 잔뜩 부풀리며 씩씩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산을 앞질러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 모습에 킬킬대며 따라갔다.

동산의 위에는 작고 그리운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그들이 태어난 장소이자, 모든 것을 배우고 깨우친 곳.

모두가 말없이 쭉 걸어간 끝에 오두막까지 도착하자 그들은 곧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머뭇거렸고, 하는 수 없이 카인이 먼저 나서서 노커로 문을 두들겼다.

탁탁.

그러자 노크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껑충하고 마른 체격의 사내가 집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깎지 않아 부쩍 자란 수염, 과거와 달리 얼굴에 그득한 주름살을 제외하면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잠깐 눈을 끔뻑이던 그는 이내 눈앞의 셋을 알아보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이구나.”

데스트라가 말없이 사내를 꽉 끌어안자, 카인과 엑스턴은 씩 웃더니 각각 사내의 어깨와 허리춤을 탁탁 두들기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서야 기나긴 포옹을 끝낸 데스트라는 물기에 젖은 눈을 닦아 내며 말했다.

“죄송해요, 더 일찍 자주 들렀어야 했는데.”

“너희가 항상 일 때문에 바쁜 거 잘 아는데 내가 왜 재촉하겠니? 어서 들어가자.”

사내는 데스트라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데스트라가 집 안 거실로 향하자, 그곳에는 이전과 변함없는 그리운 광경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지럽게 널려진 종이 뭉치. 난장판이 된 책상. 생활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실의 모습에 데스트라는 투덜거렸다.

“청소 좀 하고 사세요, 아버지. 자식들 나가자마자 집안 꼴이 이게 뭐에요?”

“혼자 살다 보니 청소할 필요가 없어지더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는 사내의 모습에 데스트라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더니 손가락을 휘저었다.

집 안의 모든 쓰레기들이 그녀의 지휘에 맞춰 일제히 공중으로 떠오르자, 대충 아무 물건 위에 걸터앉아 사과 껍질을 깎던 카인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엑스턴이 종이 두루마리로 가득 찬 나무통 뒤에 숨은 채 외쳤다.

“야, 귀쟁이! 오래간만에 아버지랑 만나자마자 한다는 짓이 청소야?!”

사내는 세 사람이 서로에게 내지르는 소리로 가득 찬 거실을 쳐다보았다.

옛날처럼 다시 떠들썩해진 집안이 향수를 자극한 것일까? 그는 멍하니 추억에 잠겼다.

사내가 세 사람을 탄생시킨 지 벌써 500년.

그의 정수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데스트라 · 엑스턴 · 카인.

전능에 가까운 사내의 능력 중에서도 세 사람이 가장 강하게 물려받은 것은, 다름 아닌 창조의 능력이었다.

사내를 닮아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창조하는 데에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던 세 사람은 후에 자신들을 닮은 고유의 새 생명들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빈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번성하게 되었다.

세 사람이 자신들의 피조물들에 의해 신으로 불리게 되기까진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세 신의 창조주 격인 사내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격상되어 있었다.

만일 그 피조물들이 지금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았더라면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신들이 절대신의 집에서 한가롭게 청소질이라니,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해 보겠는가.

“그래, 요즘은 좀 어떠니?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몇 십 년 전이잖느냐.”

오늘은 세 사람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만나 뵙고자 모인 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종족을 다스리느라 바빠진 그들이 오래간만에 성사시킨 귀중한 순간이었다.

“사람 사는 문제는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죠. 밭을 개간하고, 쉼터를 꾸리고. 요즘은 몬스터들까지 처리하느라 이전보다 배는 더 일이 힘들어졌어요.”

“몬스터라고?”

몬스터.

최초로 목격된 50년 전부터, 별안간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을 공격하고 다니는 괴생명체들. 그 기원은 아무도 모르며, 출현율은 해가 지날수록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청소를 대충 마친 데스트라가 차를 내오자, 자식들의 설명을 듣고 있던 사내는 그것을 받아 마시며 쓴웃음을 지었다.

“신기하구나.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물건들은 없었는데.”

사내가 말한 물건이란 다름 아닌 세 사람이 걸치고 있던 갑옷과 무기들이었다.

몬스터의 위협만 없었더라도 평생 쓸 일이 없었을 것들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한다는 게 사내에게는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사실 저희가 쓸 필요는 없지만, 다스리는 자로서 솔선수범할 필요가 있어서요.”

이후로 해가 떨어질 때까지 그들은 지금껏 못 다한 이야기들을 한참 동안 나누었다.

주변에 일어난 사소한 일들부터, 피조물들을 다스리느라 힘들었던 점이나,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추억 이야기까지. 한창 차를 마시던 카인은 문득 사내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 뭔가를 만들고 계시나 봐요?”

그 말에 데스트라와 엑스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벽 이곳저곳에는 복잡한 공식과 도식들이 그려진 종이들로 한가득이었다.

평소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엑스턴이 통에 들어 있던 스크롤 하나를 뽑아보려 하자, 사내는 그것을 휙 낚아챘다.

“떽!”

“아, 왜요!”

“제대로 결과가 나오면 그때 보여 주마. 그 전까진 비밀이야!”

사내가 한사코 거부하자, 엑스턴은 하는 수 없이 스크롤을 포기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네 사람은 다과를 즐기며 한동안 다른 주제로 다시금 이야기꽃을 피웠다.

몇 시간 동안이나 말하면 입이 아플 법도 하건만, 즐거운 나머지 대화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가 하나의 거대한 종족을 이끄는 리더이자 신이었기에, 안타깝게도 마음 편히 쉴 여유는 그닥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고 노을이 질 무렵, 데스트라가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즐거웠어요, 아버지. 아쉽지만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창조물을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그녀의 말에서는 어머니로서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애정이 느껴졌다. 사내에게 작별의 말을 건네는 데스트라를 가만히 지켜보던 엑스턴도, 이내 끙- 하는 신음과 함께 일어섰다.

“이야기해서 좋았습니다, 아버지. 가끔은 동산에서 좀 내려오셔서 저희 집도 방문해 주세요.”

“지금 하는 연구가 끝나는 대로 한 번 들러보마…… 카인, 너는 안 가니?”

“……슬슬 가긴 가야죠.”

카인도 순순히 몸을 움직였다.

세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며 사내의 배웅을 받고 문턱을 건너자, 그렇게나 시끄럽던 거실에도 순식간에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문을 닫기 직전까지 자식들을 향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던 사내는, 문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대로 쭉 바닥에 주저앉았다.

“헉…… 헉…….”

사내의 등허리는 어느새 땀으로 젖어 흥건해져 있었고, 숨소리는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긴장감과 안도감으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 사내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
.
.
.

들킬 뻔했다.

* * *

“이랴!”

레지아 계곡을 떠난 지 이틀째.

직접 고삐를 쥐고 마차를 모는 가렛과, 그의 뒤를 따라 부하들이 타고 있는 다른 마차들이 일제히 달리고 있었다. 마차의 위에는 그것들이 과거 가로드 용병단의 소유물이었음을 증명하는, 울부짖는 용의 머리통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마차에는 몸놀림이 재빠르고 야습에 능한 부하들과, 며칠 내내 먹기에 부족하지 않은 식량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보스인 가렛의 마차에는 단 두세 사람뿐이었다.

“…….”

가렛의 마차 뒤쪽의 짐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엘레나는, 누워 있는 스테치에게로 마력을 불어넣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마차 바퀴가 가끔씩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리곤 했으나, 스테치에게로 향한 그녀의 손이나 시선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스테치를 돌보기 시작한 이후로, 그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불길한 기운을 풀풀 풍기던 검붉은 마력은 엘레나의 마력과 뒤섞여, 스테치가 끼고 있던 반지 안으로 수월하게 흡수되고 있었다.

하지만…….

“휴우.”

엘레나가 잠시 숨 좀 돌리는 사이 억눌려 있던 검붉은 마력이 서서히 스테치의 몸 밖으로 일어나려 들자, 그녀는 혀를 차며 황급히 손을 도로 얹었다.

자연 상태의 마력은 기본적으로 물이나 바람과도 같다.

누군가가 건드리지 않는 한은, 어디로든 자유롭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검은 마력이 흡수되는 것에 스스로 반발하는 그 광경은, 마력 그 자체에 어떠한 의지가 깃들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도 참,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무심코 든 생각을 자신의 과민 반응이자 착각으로 판단한 그녀는 계속해서 스테치에게 마력을 주입하는 한편, 남는 손으로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기력 보조제가 담긴 병을 꺼내 안의 내용물을 쭉 들이켰다.

맛이 꽤 쓰긴 했지만, 효과는 좋았다.

“이봐, 그쪽은 잘 되가나?”

한창 말을 몰던 가렛이 묻자, 엘레나는 스테치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민감한 작업이니 재촉하지 마세요.”

딱히 가렛에게 까칠하게 굴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엘레나의 반응은 어쩐지 미묘하게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 중 스테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 한 사람뿐이었기에, 혼자서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간호하느라 수면 부족이 누적된 탓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가렛은 손을 흔들어 보이곤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저래서야 말동무가 되긴 글렀구만…….’

가렛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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