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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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혼란
2021.12.06.
북부 전선으로 향하는 보급품 루트에 도달한 가렛의 의적단은, 보급 마차 행렬이 아직 해당 포인트를 통과하지 않았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그만한 마차가 길을 지나갔다면 선명하게 남아 있어야 할 바퀴자국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늦지 않고 제시간에 목적지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시간을 많이 지체한 만큼 언제 보급 마차가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최고의 타이밍이었어.”
가렛은 스테치의 등짝을 두들겼다.
쓰러지듯 누워서 잠이 든 엘레나의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는, 그제야 시선을 가렛에게로 돌렸다.
깨어나자마자 가렛을 쫓던 추격자 여성을 작살 낸 것도 모자라, 옆에서 따라 달리던 적의 강철 마차까지 일격에 파괴한 스테치.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보여준 활약은 의적단의 사기를 한층 더 끌어올리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이번엔 거꾸로 엘레나가 스테치를 회복시키느라 피로가 쌓인 나머지 곧장 잠에 빠져 버렸다.
한동안 그녀를 전력으로서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근데 그놈들은 뭐였어? 상황이 상황이라 일단 날려 버리긴 했는데…….”
“뭐, 그 근육덩어리 여자랑 마차? 나한테 붙은 추격대였던 모양이야. 용병들 중에는 수배자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팀도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중 하나였겠지.”
가렛은 스테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저 아가씨한테 잘 대해 줘라. 네가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아예 자기 목숨도 던져 버릴 기세였다니까.”
“…….”
스테치는 문득 엘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스테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네 말이 맞다. 큰 은혜를 진 셈이지.”
“알았으면 됐어. 작전 개시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니까, 너도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라.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기회가 생길 거야.”
가렛은 기지개를 쭉 켜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들과 마차를 점검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멀어져 가는 가렛을 가만히 지켜보던 스테치는 엘레나가 잠들어 있는지 재차 확인해 본 뒤, 메멘토 모템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그건 뭐였냐?’
『…….』
메멘토 모템의 심중이야 알 방도가 없었지만, 적어도 스테치는 속이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
끝없는 어둠 속을 헤매다가 꾸게 된 그 괴상한 꿈이며, 잠에서 깨자마자 발현된 그 강력한 힘.
스테치는 나중에서야 자신이 사용한 그 능력이 이전에 미처 해금해지 못했던 메멘토 모템의 어빌리티, ‘싱크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에 대한 것만 말하고 있는 게 아냐. 그 검은 아티팩트…… 우리가 그때 본 그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잖아. 그런데 대체 왜 멋대로 흡수한 거지?’
『…….』
‘대답 좀 해 봐!’
『아직은 때가 아니야.』
메멘토 모템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스테치의 거듭된 강요에 결국 말문을 텄다. 그러나 그 대답은 스테치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 말투는 뭔가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딴 식으로 나오면 대체 내가 널 어떻게 믿고 함께 하라는 건데?’
메멘토 모템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스테치는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그가 꾼 꿈에 대해 다시 한번 떠올렸다.
동산과 집, 그리고 그 장소를 둘러싸고 있던 숲…… 어느 것 하나 스테치의 기억에는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스테치를 가장 경악케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꿈에서 등장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런 게 사실일 리가 없어…….’
신.
스테치가 아는 한 지금 이 시대까지도 신을 믿는 종족은 인간을 제외한 엘프와 드워프뿐이었다. 그런데 그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꿈 안에서, 그는 수차례나 신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는 장면을 본 것이었다.
엘프의 신 데스트라와, 드워프의 신 엑스턴.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스테치에게 있어, 그것은 상상도 못 할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파헤쳐선 안 될 역사의 일부분을 엿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 두 신들이 실존했다면, 남은 하나는 인간의 신이라는 소리잖아. 그럼 뭐야? 내가 본 것은 신들과 그들을 창조한 절대자라도 된다는 소리인가?’
스테치가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 그의 옆에 누워 있던 엘레나가 번쩍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스테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는지 피로감도 전부 잊어먹은 채 벌떡 일어났다.
“아……!”
“다행이다, 몸은 좀 어때?”
바로 몸 상태부터 묻는 스테치로부터 빠르게 거리를 벌린 엘레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손을 휘저었다.
“괘, 괜찮아요, 문제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작 몇 시간 잠을 잔 정도로 기력이 회복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스테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덕분에 무사히 깨어날 수 있었어…… 고마워.”
“아, 아뇨…….”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머리를 푹 숙였다.
사실 그 말처럼 그녀의 몸이 완전히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며칠에 걸쳐 강제로 마력을 발산시킨 결과, 이제는 간신히 쥐어 짜낼 정도의 수준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의 아티팩트인 아므리타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몸 상태는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한편,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둘을 유심히 지켜보던 가렛이 외쳤다.
“야, 잉꼬 부부! 둘 다 정신 차렸으면 이리로 와!”
가렛의 헛소리를 애써 무시한 스테치는 엘레나와 함께 가렛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갔다.
연기와 빛의 노출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인지, 가렛의 옆에 피워진 모닥불은 크기도 작은 데다 마차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일인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니까, 지금같이 여유 있을 때 작전을 짜야 될 거 아냐. 저길 봐.”
스테치는 가렛이 건네준 스파이 글래스를 받아들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저편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이 스테치의 눈으로 들어왔다.
“저게 우리 목표인가?”
“맞아. 여전히 멀리 있긴 하지만, 지체된 시간을 생각해 보면 정말 아슬아슬했던 거지.”
가렛이 말했다.
“이미 저쪽으로는 정찰 요원을 보내 두었어.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까, 작전을 짤 준비를 해 보자고.”
가렛이 주변의 흙바닥을 대충 정리하고, 굵직한 나뭇가지를 들어 요령 좋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가렛이 언급했던 정찰 요원이 숨을 헐떡이며 야영지로 되돌아왔다.
“역시 내 부하답게 발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구만. 그래, 저쪽 분위기는 어때?”
“최악입니다, 보스.”
정찰 요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가렛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전선으로 보내는 보급 마차인 만큼, 그 경계가 허술할 거란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최악’이라고?
“말해 봐라.”
그러자 남자는 가렛이 든 나뭇가지를 들어 바닥에 그려진 그림에 자신이 확인한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내용들을 덧붙여 나갔다.
구불구불 S자로 꺾인 마차 행렬에서, 정찰 요원은 마차 모두를 뒤덮는 사이즈의 거대한 원을 그렸다.
“이 원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짜고짜 그렇게 말한 정찰 요원은 말을 이어나갔다.
“마차 행렬의 중간에 아큐라사스의 조련사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적어도 반경 300m 안으로 접근했다간 발각되고 말겁니다.”
“아큐…… 뭐?”
스테치가 갸웃거리자, 가렛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엘레나가 먼저 답했다.
“아큐라사스입니다. 지능이 높은 조류형 몬스터인데, 눈이 거의 엘프만큼이나 뛰어나기로 유명하죠. 그런데 조련이 가능한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만…….”
“가능해. 다만 알에서 깨어날 적부터 훈련을 시켜야 하는 데다, 지정된 조련사가 아니면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지. 여하튼 중요한 건 녀석의 위협 탐지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거야.”
한 마디로 말해, 조련사만 먼저 제거해 버리면 아큐라사스를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적의 인식 가능한 영역 밖에서 공격을 가하기에 최적화된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엘레나였으나, 문제는 지금의 그녀는 활시위 하나조차 당길 힘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른 문제는 뭐지?”
스테치의 질문에 정찰 요원이 나뭇가지로 또 다른 그림을 추가했다.
“사실, 아큐라사스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상합니다. 일반적이라면 수비와 공격에 모두 능한 마법사를 대거 동원해서 《라이프 디텍션》을 사용하는 편이 몬스터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힐 텐데 말이죠.”
“그렇긴 하지.”
그의 말에 가렛은 동의했다.
아큐라사스의 운용은 사육부터 훈련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노력과 자금이 투입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굳이 그런 수단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문에 정찰 요원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입니다만, 마차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의 장비에 디스펠륨 처리가 되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으음…… 역시 그건가. 하긴 아군이 디스펠륨을 쓰는데 마법사를 운용해 봤자 효과만 반감될 뿐이겠지.”
가렛이 난색을 표했다.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병사들이 오히려 디스펠륨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어색하다.
만약 정찰 요원의 의견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투사 계열 마법으로는 원거리 공격은 불가능할 터. 게다가 의적단의 특기인 기습도 아큐라사스가 버티고 있는 한 성공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아큐라사스는 제가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엘레나가 말하자마자, 스테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녀의 몸 상태를 고려해 보면 절대 안 될 소리였다.
“안 돼.”
“고작 새 한 마리조차 처리 못 할 정도로 힘이 빠진 건 아닙니다. 정 걱정되신다면 딱 한 발만 쏘고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강경하게 나서는 엘레나에게 스테치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상 그녀의 저격 능력이 없다면 돌파할 수 없는 난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렛도 영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가 놈들에게 접근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아가씨가 아큐라사스를 제거해 주면 되겠지. 그렇다면 디스펠륨 쪽은?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일단은 대응책을 생각해 둬야…….”
“상관없어. 디스펠륨이 있어도 놈들에게 먹힐 방법이 있으니까.”
스테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