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카일덴트 (1)
(69/203)
69화 카일덴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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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카일덴트 (1)
2021.12.09.
베네지아 북서쪽 숲의 외곽.
갑옷과 무기 등의 병기구, 식량과 생필품을 가득 실은 마차가 덜거덕거리며 차륜을 굴리고 있었다.
산에서 풍겨오는 진한 풀 내음에 엘레나는 마차 바깥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한껏 숨을 들이켰고, 스테치는 마부에게 물었다.
“여기는…….”
“카일덴트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라면 원하시는 회복수단을 찾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카일덴트.
특색 하나 없는 이 평범한 마을은 최근 크기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희귀한 식물들이 대량으로 자라나는 군생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강의 구조가 식물에게 있어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준 덕분이었다.
약초와 약의 유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통행이 불편하던 카일덴트의 길은 많이 정리되었으나, 마을이 워낙 변두리에 있었던 탓에 상기한 소식들을 접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넓은 정보망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가렛은, 지친 엘레나를 돕고자 했던 스테치의 요구에 따라 그를 카일덴트 마을로 보낸 것이었다.
“전 정말 괜찮은데요…….”
『안 괜찮아.』
메멘토 모템의 단호한 목소리가 스테치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사실, 반지의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엘레나의 모습은 스테치의 눈에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숨소리는 가빴다. 스테치는 한숨을 푹 쉬더니 엘레나에게 말했다.
“활을 만들어 봐.”
갑작스런 지시에 엘레나는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순순히 레코르다치오를 꺼내 손에 쥐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손잡이의 양쪽 끝에서는 마력으로 구성된 두 개의 활대와 활줄이 만들어졌으나, 채 10초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아…….”
스테치는 변명하는 듯한 눈으로 쭈뼛거리는 엘레나를 자리에 앉혀두었다.
생물에게 있어 마력은 혈액과 같은 신체의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사용해서 없어지더라도 휴식을 취하거나 영양을 보충해 주면 회복된다. 그러나 마력을 거의 한계까지 쥐어짜서 사용한 엘레나는, 마치 물이 다 빠져 말라 버린 스펀지와도 같았다.
이 이상 무리한다면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은 안 들을 거야. 몸이 나아질 때까지 쉬고 있어.”
스테치가 딱 잘라 말했다.
복수는 둘째 치고 이러다가 자신의 하나뿐인 동료가 죽게 생겼는데, 어딜 함부로 쏘다닌단 말인가. 그는 엘레나로부터 고개를 돌려 가렛의 부하에게 물었다.
“우리가 얼마나 온 거지?”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지붕과 굴뚝이 작게 보이고 있었다. 스테치는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길도 험했는데 용케 여기까지 우릴 데려다주고…… 정말 고맙다.”
“아뇨, 별일 아닙니다. 지금까지 저희들 일을 도와주셨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가렛과 얽히길 그렇게 싫어했던 스테치였으나, 정작 지금의 그와 가렛의 관계는 거의 비즈니스 파트너나 다름없었다.
만약 다음번에 또 만나게 되면 실명 정도는 가르쳐줄까…… 깍듯하게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스테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다 왔습니다.”
목책으로 된 조촐한 벽과 입구를 지나 마차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벌건 대낮이라 모두들 약초를 캐거나 일을 하러 나갔는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럼 이제…….”
막 엘레나를 부르려고 뒤를 돌아본 스테치는, 마차 한 켠에 쥐 죽은 듯이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의 모습에 말을 멈췄다.
“이런.”
덜컥 겁이 난 스테치는 엘레나에게 다가가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엘레나는 정신을 잃었을 뿐,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상태가 실시간으로 악화 중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스테치는 가렛의 부하에게 엘레나를 부탁했다.
“마차 세워두고 기다려, 그 사이에 약이든 약초든 사서 돌아올 테니까!”
스테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약초와 약병이 잔뜩 늘어선 좌판대 몇 개를 발견한 그는 노점상 하나를 골라 말을 걸었다.
“마력 회복제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어, 없는데…….”
그 말에 스테치는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노점상에게 눈을 부라렸다.
마력이란 막연히 뭔가를 먹거나 마셔서 충당할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었다.
최선의 방법이라곤 약으로 신체의 특정 기능을 자극하여, 간접적으로나마 마력에 대한 자연회복능력을 가속시키는 것뿐. 단순한 강장제나 기력약이 아닌지라 마력 회복제의 재료는 복잡다양하고 희귀했다.
하지만…….
“그게 말이 돼요? 희귀 약초 재배지로 유명한 카일덴트에서 고작 마력 회복제 하나 못 구한다뇨?”
스테치가 좌판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물었다.
“정말이야, 기본적인 약들은 우리도 팔지만, 마력 회복제는 지금 마을의 어느 누구도 취급하지 않아.”
한바탕 설전을 벌이려던 찰나, 노점상과 스테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좌판대의 여성이 끼어들었다.
“회복제의 주재료인 ‘던라이트’의 꽃이 바위산 꼭대기의 꽃밭에서만 자라는데, 지금은 아무도 못 들어가. 몇 개월 전부터 꽃밭에 갔던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서 있었던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되돌아왔거든.”
그 말을 들은 스테치가 물었다.
“그럼 만약 제가 그 꽃을 구해오면 약을 만들어 줄 수 있나요?”
“거야 뭐…… 하지만 어떻게?”
“가지 않는 게 좋아! 자네도 별수 없을 거라고!”
한사코 말리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잇따랐지만, 더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 * *
부득이하게 엘레나를 마을 사람들과 가렛의 부하에게 맡겨놓은 스테치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카일덴트 옆의 바위산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해 주었으니, 그도 거기에 상응하는 보답을 되돌려줄 필요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말하길, 바위산의 산꼭대기 화원으로 가기 위해선 산 밑자락의 숲과 중턱에 있는 동굴을 지나야 된다고 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문제를 겪게 되는 장소가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떤 자식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다니는 거지?”
『몬스터, 마법사? 누가 알겠어.』
잠시 후 카일덴트의 숲에 도착한 스테치는 마을 사람들이 끄적여 준 약도를 꺼내 들었다.
숲은 나무가 빽빽하여 함부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기 쉬웠지만, 약도에 그려진 랜드마크들을 따라간다면 쉽게 산을 오르는 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와…… 말도 안 돼.”
스테치는 숲에 들어오고 나서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았는데 곳곳에서 보이는 귀중한 식물들에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서늘하고 습한 곳에는 어김없이 버섯이나 이끼가 자라 있었고, 양지가 바른 곳에는 약초나 꽃이 피어올라 있었다. 심지어 그중 태반은 책에서만 보았을 정도로 구하기 힘든 종이었다.
약초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장소였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닌데.’
스테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후다닥 숲속 깊숙한 곳으로 달려갔다.
엘레나가 죽어가고 있는데, 지금 한눈을 팔 틈이 있겠는가? 마구 숲속을 내달리던 스테치는 숲의 한층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이제는 나뭇가지가 너무 촘촘히 자란 탓에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은 그가 있는 위치까지 내려오기도 전에 가려져 버렸다.
스테치는 낮인데도 밤 같은 숲의 분위기에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반지로 앞길을 밝히고 계속 뛰어가는 스테치의 눈앞에, 거대한 실루엣 하나가 보였다.
‘어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그가 발걸음을 멈추자, 실루엣은 거꾸로 스테치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사람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거대한 사이즈와 기이한 움직임에 스테치는 본능적으로 검부터 뽑았다.
상대가 메멘토 모템이 뿜어내는 빛의 범위 안까지 들어오자, 촘촘히 자라난 억센 체모와 여덟 개의 다리가 달린 징그러운 외형이 비로소 드러났다.
유리알 같이 반짝이는 수십 개의 작은 눈깔들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본 스테치는,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으악!”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거미형 몬스터인 그로자크네.
앞발에 난 작은 집게와 가위 같은 주둥이를 딸깍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는 녀석의 혐오스런 모습에, 스테치는 검을 겨누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마을 사람들한테서 이 근방에서 몬스터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스테치가 생각할 여유를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그로자크네는 스테치에게 앞발을 날카롭게 만들어 찔러 넣었다. 그러나 스테치는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가볍게 공격을 피한 다음 검을 내리 휘둘러 다리를 절단 냈다.
역겨운 체액이 얼굴에 잔뜩 튀었지만 스테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손바닥을 그로자크네에게로 향했다.
“날아가 버려라아앗!”
『《에어 버스트》!』
콰광!
그로자크네의 몸이 《에어 버스트》의 풍압에 밀려나더니, 촘촘하게 자라난 나뭇가지들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공중을 유영하듯 날아가던 그로자크네의 거체는 서서히, 그러나 점차 빠른 속도로 추락하여 몇 초 뒤 지면과 충돌했다.
빠직-!
우지끈-!
그로자크네의 몸뚱이가 지면을 휩쓸고 한 번 구를 때마다 녀석의 다리 관절들이 하나씩 이상한 각도로 꺾여 나갔다.
조용한 카일덴트의 숲에 때 아닌 소란이 벌어지자, 잠자고 있던 새들이 일제히 햇빛이 쏟아지는 나뭇가지들 틈새로 날아올랐다.
스테치는 움찔거리는 그로자크네에게 천천히 걸어가 검을 몸뚱이 중심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여덟 다리들을 미친 듯이 버둥거리던 그로자크네는, 전신을 오그라뜨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발로 몸을 밀어내며 검을 뽑은 스테치는 팔을 크게 흔들어 날에 묻어 있던 끈적한 체액을 털어 냈다.
“커스 이팅.”
깔끔하게 마력을 회수한 스테치는 검을 소드벨트에 다시 걸었다.
현재 카일덴트의 숲 속은 어둠으로 인해 마치 던전에 들어온 것 마냥 몇 미터 앞조차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
아무것도 없다던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는 달리 몬스터의 존재가 확인되자, 아무래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그로자크네라고? 일이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나머지는 어디 갔지?』
메멘토 모템이 의문을 표하자, 스테치는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로자크네는 절대 홀로 생활하는 몬스터가 아니다.
암컷이 한 번에 낳을 수 있는 알의 수는 무려 1500~2000마리. 온전히 성체까지 살아남는 수가 적다고는 해도 최소 200~300마리다. 즉, 한 마리가 보이면 나머지도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
‘어쨌거나 큰일이야. 우리가 던라이트를 구해오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몬스터들을 그냥 방치해 두었다간 마을이 언젠가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도대체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한 거지? 스테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막 떼는 순간,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날카롭게 촉을 세운 화살 하나가 날아갔다.
콰직!
그러나 애써 시도한 기습이 무색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만 뻗은 스테치는 그를 노리고 쇄도해온 화살을 맨손으로 붙잡아 부러뜨렸다.
천천히 뒤를 돌아 자신을 공격한 습격자를 노려보는 스테치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스테치가 입을 열었다.
“넌 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