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카일덴트 (3)
(71/203)
71화 카일덴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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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카일덴트 (3)
2021.12.11.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은신처로 난입했던 인간이 던라이트를 구하기 위해 떠난 지 몇 분 후. 여성의 중얼거림을 들은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기회’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리아드?]”
엘프들 중 가장 완고해 보이는 젊은이가 말했다.
“[단 한 사람의 인간도 동굴로 가게 놔둬선 안 돼. 자칫 잘못하면 우리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거야!]”
미리아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젊은이를 힐난했다.
“[너야말로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돼? 조금만 생각해 보면 뻔한 이야기인데? 언젠가 일이 터지는 건 시간문제란 말야.]”
그러면서 그녀는 은신처 벽에 놓여져 있던 자신의 검을 등에 둘러맸다.
“[나는 갈 거야. 지금 그로자크네 떼를 일망타진하지 못한다면, 마을의 인간들은 둘째 치고 우리들까지 전부 끝장이니까.]”
미리아드는 적당히 무장을 갖춘 후, 멀뚱거리며 서 있던 동생의 옷깃을 비틀어 쥐고 질질 끌었다.
“[에엥, 나도 가는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넌 무조건 따라와야지!]”
* * *
스테치는 엘프들의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카일덴트 숲의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약의 제조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조금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도 전에 나뭇가지 곳곳에 걸쳐진 얇은 거미줄들을 본 스테치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였다.
“!”
두텁게 엮인 나뭇가지들 틈바구니에서 거대한 그로자크네 두 마리가 거미줄을 타고 내려와 스테치를 덮쳤다.
한 놈은 뒤, 한 놈은 앞.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충분히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던 스테치는 그로자크네보다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그로자크네는 분명 자기 무리에서 떠나는 일이 거의 없는데, 왜 이놈들은 따로 움직이는 거지?’
옆으로 몸을 날리자 그로자크네 한 마리가 달가닥거리는 이빨을 들이대며 돌진해왔고, 그것을 검으로 받아낸 스테치는 뒤로 질질 밀려났다.
그로자크네는 본디 무리 지어 생활하는 몬스터. 상대를 공격할 때에는 절대 지금처럼 하나씩 따로 덤빌 몬스터들이 아니다.
거기다 먹잇감이 자기 영역에 아주 깊숙이 발을 들이지 않는 한은 절대 모습을 먼저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흐아아악!”
그로자크네가 입에서 내뿜는 산성액이 스테치의 팔뚝 위로 한 방울 떨어지자,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는 거품과 함께 살이 녹아내렸다.
불에 타는 것보다도 더한 고통에 스테치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저런 걸 검으로 막으려 들었다간 무기 자체가 못쓰게 되어 버릴 것이다. 스테치는 상처를 회복한 뒤 주문을 날렸다.
“《에어 버스트》!”
뻥!
마법에 얻어맞은 그로자크네가 다른 녀석과 한데 엉켜 지면을 굴러갔다.
그대로 녀석들을 끝장낼 수도 있었지만, 스테치는 그대로 돌아서서 산의 동굴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로자크네들의 출몰 빈도는 스테치가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높아졌다.
거미줄은 무시하고 지나치기 힘들 정도로 많아지더니, 급기야는 스테치의 팔다리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망할!”
어느덧 동굴 근처까지 도착한 스테치는 거미줄이 달라붙은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거미줄은 더욱더 끈끈하게 엉겨 붙었고, 줄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을 감지한 그로자크네들이 하나씩 나타나 스테치에게 접근해왔다.
순식간에 자신이 포위되었음을 인지한 그는 몸에 뒤얽혀 있던 굵직한 거미줄들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아이스 웨이브》.”
차가운 냉기가 부드러운 거미줄 위를 내달리자, 주변 나뭇가지들 사이에 걸쳐져 있던 거미줄들이 전부 얼어붙었다. 거대하고 육중한 그로자크네를 지탱할 수 없었던 거미줄은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고, 녀석들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정신을 차리기 전에 끝장낸다……!’
전부 다 처치할 시간은 없다. 스테치는 바라크의 능력으로 검을 강화시킨 뒤, 길을 가로막고 있던 몇몇 그로자크네들의 숨통을 끊어가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미 엘프들과 대화하면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기에 그의 행동에서는 조급함이 묻어 나왔다.
“잠깐.”
“엉?”
스테치가 손에 쥔 검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겨누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의 두 엘프가 서 있었다.
청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만지작거렸고, 여성은 태연스레 스테치에게로 다가왔다.
“어, 아까 그 엘프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 이름은 엘프녀가 아니고 미리아드다, 인간. 이쪽은 내 동생인 시드. 너에게 도움을 주러 왔다.”
“내 이름도 인간이 아니라 스테치다. 그리고 난 다른 사람 도움 따윈 필요 없어. 싸울 때 누가 주변에 있으면 거치적거린단 말야. 엘레나라면 모를까…….”
그가 엘레나를 높게 평가하는 요소는, 처음 짝을 지은 사람하고도 능숙하게 합을 맞출 줄 아는 그녀의 서포트 능력이었다.
아군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적에게 빈틈이 생길 때마다 날카롭게 공격을 때려 박는 그녀의 움직임은 평생을 홀로 지내온 스테치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스테치의 반응에 미리아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아이랑 함께 싸워 봤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걔만큼 특출 난 엘프도 드물 테니까. 어쨌든…….”
그녀는 방금 전까지 그로자크네가 쓰러져 있었던 자리를 되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직접 싸우는 걸 보니 스테치의 능력에 대한 시드의 증언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네가 가려고 하는 산꼭대기의 화원은 그로자크네가 둥지를 튼 장소이기도 하지. 제아무리 너라도 화원의 던라이트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수백 마리나 되는 몬스터들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걸.”
“……어떻게 도와줄 생각인데?”
“네가 자유롭게 싸울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 주겠다. 던라이트는 우리한테 맡겨.”
스테치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커스 이팅으로 그로자크네의 시체들을 흡수했다.
놀라워하며 쳐다보는 시드와 미리아드를 무시한 그는 고개를 까딱였다.
“좋아, 따라와.”
생각보다 협조적인 스테치의 태도에, 미리아드는 설득을 위해 준비한 오만가지 코멘트들이 전부 쓸모없게 된 걸 아쉬워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인간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시드는 그닥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진 않았던 모양인지, 스테치와 미리아드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조금 의외군. 우리들을 상대로 이렇게나 적대심 없는 인간을 보게 되니 기분이 이상할 지경인데. 엘레나는 그래서 너와 동행하고 있는 건가? 너희 둘은 어쩌다 엮이게 된 거지?”
갑작스런 질문에 스테치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궁금한 게 아주 많은 처자구만. 설명하기엔 아주 긴 이야기니까, 듣고 싶거든 엘레나가 낫고 난 다음에 직접 들어. 너야말로 왜 날 돕는 거지? 역시 이유는 엘레나인가?”
미리아드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다른 이유도 있다.”
그녀가 이끄는 엘프 집단은 카일덴트 마을이 탄생했던 시기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이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들이 숲 주변에 마을을 형성한 이후에도 직접적인 노출과 무력 충돌을 피해가며 은밀하게 생활해 온 그들이었으나, 그로자크네 떼가 숲으로 몰려들어 오면서 그러한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놈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강력했고, 엘프들에 비해 숫자도 더 많았다.
그 결과 미리아드와 엘프들이 그로자크네들을 제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굶겨 죽이기’였다.
영역에서 잘 빠져나오지 않는 그로자크네의 특성을 역이용하기 위해,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놈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것은 엘프들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었다.
『일을 너무 잘 했구만.』
메멘토 모템의 말에 미리아드의 설명을 듣고 있던 스테치는 납득했다.
엘프들이 사람들의 접근을 막은 탓에, 굶주리다 지친 그로자크네들이 먹이를 찾아 하나둘씩 영역 밖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로자크네들을 억제해 봤자 결국 임시방편일 뿐, 영구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으리라.
미리아드도 스테치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얼른 덧붙여 말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게 좋은 계획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몬스터란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생물. 극한까지 굶주린 녀석들이 언제까지고 저 안에 처박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로자크네들을 제거할 수단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다녔던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스테치가 있었다.
“가자!”
스테치와 미리아드, 그리고 시드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동굴은 마을 사람들의 출입이 끊긴 이후 그로자크네들의 소굴이 된 탓에, 몇몇 통로들이 두터운 거미줄 벽으로 가로막혀 통과할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스테치는 인챈트 된 페네트레이터로, 미리아드는 《윈드 커터》로 거미줄을 가르며 계속 나아갔다.
“키에엑!”
벽을 뚫고 그 너머로 나아가자, 모퉁이에서 그로자크네들이 기습을 가해 왔다.
미리아드는 몬스터들의 돌진에 정면으로 달려들며 한 줌 흙을 퍼 올리듯 바닥으로 손을 뻗었다.
《액티브 스킬 : 록 스파이크.
바위로 된 뾰족한 구조물을 생성하여 공격합니다. 투사체처럼 날려 보낼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반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미리아드의 손을 따라, 지면에서부터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스파이크들의 첨단부가 그로자크네들의 머리통을 찢어발겼다.
주문의 절륜한 위력에 스테치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쿠르륵-
천장에 펼쳐진 거미줄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그로자크네 한 마리가 스테치 일행이 지나가려는 타이밍에 맞춰 떨어져 내렸다.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에서의 공격에 스테치와 미리아드가 회피 동작을 취하려는 순간, 푸른 스파크가 날아와 공중에 떠있던 그로자크네를 강타했다.
“어?”
짜릿한 전기불꽃을 튀기며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지는 그로자크네. 스파크가 날아온 궤적을 좇자, 손을 뻗고 있는 시드의 모습이 스테치의 눈에 들어왔다.
어쭈? 시드는 스테치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가 뭘 또 잘못했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야, 네 동생 의외로 쓸 만하다?”
“그렇지? 근데 애가 성격이 너무 유약해서 원…….”
악담을 퍼부으며 동굴의 중심을 지나 출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그로자크네들과 마주쳤으나,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산꼭대기의 화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그들의 생각과는 영 동떨어진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넓디넓은 화원 정중앙에는 10m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원뿔형 첨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로자크네의 체액과 흙을 섞어 만든 탑 표면에는 무수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는데, 안에서는 하얗게 부풀어 오른 알집들이 꿈틀댔다.
그리고 그 첨탑의 아래에, 지금까지 봐 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그로자크네가 있었다. 굵직한 체모, 주둥이로부터 질질 흘러내리는 부식성 체액. 온몸에 돋아난 수포들. 비주얼 테러에 버금가는 외견을 보고 미리아드와 시드는 할 말을 잃었다.
모든 그로자크네들의 어미이자 알파, ‘마테라크네’였다.
“징그러운 새끼.”
스테치가 한 마디 툭 던졌다.